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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5 동사서독 공지

작성자
혜원
작성일
2017-11-20 00:13
조회
110
171125 동사서독 공지

[지북유]편에서는 道를 찾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道가 대체 무엇입니까? 도는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가질 수 있습니까?’ 이들의 공통점은 道를 ‘어떻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도를 언어화할 수 있다는 생각의 기저에는 그것을 소유할 수 있다는(有) 전제가 있고요.

서양철학에는 일찍이 언어를 통해 철학을 구성하는 전통이 있어 왔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 말과 같이, 언어는 곧 합리성이고 지성인 것이죠. 이런 사고방식은 서양의 존재론을 반영합니다. 자연을 초월하는 존재가 있다고 생각하는 초월론이 오랫동안 서양을 지배하고 있었으니까요. 스피노자가 위대한 것은 서양의 오랜 초월론을 깨고 인간의 윤리를 자연의 질서 속에서 사유했다는 것입니다.

반면 동양의 경우 언어가 곧 합리/지성과 연관되지는 않고, 초월적 존재가 우리를 만들었다는 생각 자체도 없습니다. 기본적으로 내재적 사유인 것이지요. <장자>에서 중요한 것은 완벽한 질서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여러 작용 속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장자는 상대주의자로 여겨지기도 합니다만, 반드시 상대주의자로 볼 수도 없습니다. 우선, ‘너는 너 나는 나’라고 하며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것을 상대주의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모든 존재가 각각 ‘너는 너 나는 나’라고 한다면 한 가지 문제가 생깁니다. 바로 존재 자체가 성립할 수 없게 됩니다. 가령, 나무는 그저 나무로서 존재할 수 없습니다. 햇빛과 빗물을 받아야 나무일 수 있지요. 마찬가지로 햇빛 역시 다른 것들과의 작용 안에서 존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무수히 많은 영향 속에서 존재한다는 것.

이렇게 보면 ‘나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따로 존재한다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저것’으로 규정되는 것이 있을 때 생겨나는 결과로서의 ‘이것’입니다. ‘이것’과 ‘저것’이 서로 공존하는 만물제동의 세계에서 ‘너는 너 나는 나’식의 상대주의는 근본원리를 무시하는 것이 되겠죠.

노장 사상에서 道는 우선 ‘있다’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 ‘있다’는 것은 고정된 것이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있다’라고 할 때 변하지 않고 고정되어 ‘있는’ 것을 먼저 떠올립니다. 하지만 <장자>에서의 도는 ‘없지는 않은 것’ 입니다. 개별적인 것이 작용할 때 그 원리로서의 도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도는 개별적인 것을 떠나서 존재할 수는 없습니다. 존재는 다른 것들의 작용 속에서 유동하며, 그 유동하는 차원이 바로 道인 것입니다.

[지북유] 편에서 도는 ‘두루(周)’, ‘널리(遍)’, ‘모두(咸)’의 차원이라고 합니다. 장자는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道는 초월적인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지요. 그런데 道에 대해 말해달라고 하는 순간 고정되어 버린 道를 기대하게 됩니다. 꼭 집어 말해달라고 하는 사람이 [지북유]편에 여럿 나오지요. 그때 道에 대해서 말하는 방법은 모든 것을 구체적으로 하나하나 거론하거나 아니면 ‘고정할 수 없다’는 의미로 말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북유]에서는 道가 무엇인지 많은 이야기가 변주되면서도 결국 道가 무엇인지 제대로 아는 사람은 입을 다문다고 나와 있지요. 이런 다양한 침묵(?) 앞에서 우리는 질문을 다시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道는 무엇(何)이지?’라고 물으며 계속해서 고정된 무엇인가를 바라 왔던 자신에 대해서요.

다음시간은 ‘서무귀’ 읽어옵니다.

후기는 각 조에서 지은언니, 은남쌤

간식은 완수쌤, 규창

다음 시간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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