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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 동사서독 공지

작성자
혜원
작성일
2017-11-26 23:59
조회
129
171202 동사서독 공지

 

=걷기의 철학

 

[서무귀] 13장에는 세 가지 인간 유형이 나옵니다. ‘다른 사람과 잘 지내며 자기를 꾸미는 사람’, ‘의존적인 인간’, ‘기상이 없는 인간’. 앞의 두 사람은 새로 알게 된 학설에 자신을 동일시하거나 남에게 의존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경우 자기만족에 빠지거나 일정 수준에 도달하면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 없게 되지요. 그리고 세 번째 경우, 장자는 순임금을 예로 듭니다. 순임금은 <장자>에서 단골로 디스당하는(?) 유가의 성인 중 한명인데요, [서무귀]에서는 순임금이 노린내 나는 행동을 했다고 말하죠. 그가 가는 곳마다 도시가 세워지고 사람들이 따르고...이게 다 그의 노린내 나는 행동 때문이라는 거예요. 아니 사람들이 따르면 좋은 거 아닌가? 그런데 <장자>에서 이러한 재주는 공연히 사람 피곤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순임금은 재주가 있고, 그것을 드러내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였고, 그로 인해 평생 고생했다는 것이 장자의 생각이니까요. 즉 순임금의 행동은 사람들이 모여 존경하고 따르는 것의 ‘좋다’는 측면만 알고 그 이면을 모른 것이죠.

<도덕경>에서는 “도를 깨달으면 어리석어 보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때의 ‘어리석음’은 지금의 이익을 챙기는 사람들의 눈에 비치는 깨달은 자입니다. 지금 얻을 이익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얼른 그것을 취하려는 사람은, 당장 이익을 취하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그를 어리석다고 합니다. 그 이익이 의심의 여지없이 필수적인 것이라고 생각할 때는 더더욱 그렇지요. 대표적으로 돈이 그렇습니다. 돈이 많으면 좋다고 생각하지 그 이면을 생각하기란 쉽지 않으니까요. 아니, 이면을 생각하더라도 더 이상 그쪽으로는 생각의 방향을 밀고 나가고 싶지 않은 것인지도. 그것보다는 지금의 좋은 것, 이익 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니까요.

[서무귀] 편 13장에는 걷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요. 인간이 내딛는 걸음은 협소하지만 내딛지 않은 땅을 우선 믿어야 한다는 구절입니다. 장자는 앎의 차원 이전에 믿음의 차원에 대해 말합니다. 우리의 몸은 땅을 믿고 한발을 내딛으며 걸어갑니다. 하지만 정신은? 정신은 계속해서 잡념을 양산하며 앞으로 나아가지를 못하지요. 가령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불안이 있습니다. 우리 몸은 지금 막 발을 내딛는 땅이 꺼질지 아닌지 모르면서도 일단 걸어가는데 정신은 ‘우선 다 알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지요. 이것은 완성을 추구하는 것이라기보단 지금 내가 원하는 것을 미래에 투사하여 그것을 얻지 못할까 불안해하고 안달을 내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자기를 지키는 수고로움

 

[서무귀]편에는 자기 재주에 자기가 걸려 넘어지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가령 8장의 원숭이 같은 경우 다른 원숭이들이 도망갈 때 자기도 얼른 피해야 할 텐데 왕 앞을 알짱대면서 재주를 넘고 있습니다. 이 원숭이는 혼자 유독 죽고 싶어 환장한 것일까요? [서무귀] 편에서는 이런 원숭이의 ‘오만’은 결국 칭찬의 노예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사람들은 다들 자기가 잘하는 것을 통해 세상에 내보이고 싶어 하고 또 인정받고 싶어 하는데, 그 ‘잘하는 것’, ‘재주’가 자신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것은 알지 못한다는 것이죠. 순임금으로 치면 ‘노린내 나는 행동’을 계속하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고요.

서무귀는 무후를 위로하기 위해 찾아온 은자입니다. 산속에서 사는 은자가 제후를 위로할 일이 뭐가 있을까요. 좋은 궁궐에서 맛난 것 먹고 사람들 거느리고 살고 있는데요. 거기다 전쟁을 멈추겠다고 하는 것을 보니 왕으로서 나름 비전도 있어 보입니다. 그런데 서무귀는 그런 감각에 사로잡힌 삶, 대의명분에 사로잡힌 삶의 피로에 대해 말합니다.

장자는 기본적으로 감각에 사로잡히는 것을 경계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특정한 상태에 고착화시키는 것이 다름아닌 감각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맛, 색, 소리를 알게 되면 거기에 바로 표상과 욕망이 들러붙게 되죠. 그럼 우리는 이제 그런 감각을 계속 원하게 되고, 그 감각이 없는 상태를 ‘결여’로 여기게 됩니다. 이 ‘결여’가 무서운 것 같습니다. 계속 그 결여감에 사로잡혀 있으면 그것 때문에 자신을 밀고 나가 변화할 수 없게 되니까요.

또 대의명분에 집착하게 되면, 다름 아닌 백성들이 피폐해진다고 서무귀는 말합니다. 왜냐하면 대의명분을 추구하는 정치란 그 다른 부분은 모두 배제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좋은 명분을 세워도 늘 명분 바깥에는 불만족이 생성됩니다. 이것은 백성들을 아우를 수 없는 정치요, 군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정체인 셈입니다. 결국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 혹은 ‘자기’라고 여기는 것에 의해 우리는 수고롭게 살게 됩니다.

 

=장자와 혜시

 

[서무귀]편에는 혜시가 죽어 장자가 넋두리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코에 살짝 회칠을 한 상대와 그것을 절묘하게 벗겨내는 묘기를 부리는 콤비에 자신과 혜시를 비교하지요. 혜시는 <장자>에서 다소 희화화 된 측면이 있습니다만, 기본적으로 장자와 ‘통하지 않는’ 대화를 주고받는 묘기를 부리는 파트너였던 것 같습니다. 혜시는 논리를 끝까지 밀고 나가며 사유하는 사람이었고, 장자는 그 논리 자체를 넘어서려는 사람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이런 이질성 때문에 벗이 된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코끝에 묻은 회칠의 존재를 알게 해주고 또 걷어내 주는, 그렇게 자기 자신을 알게 하는 이질적인 사람들이야말로 벗이 될 수 있다고 장자는 생각했던 것일까요? 장자의 우정에 대한 생각은 어떤 것인지 궁금해집니다.

 

 

후기는 건화

다음 시간은 ‘즉양’ 읽어옵니다.

암송과 공통과제 있고요~

간식은 은남쌤 태욱쌤

 

다음 시간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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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11-27 08:27
    강의시에 선생님이 우정론을 말씀하시면서, 아리스토텔레스에 이어 이름만 들어본 데리다('우정의 정치학'). 들뢰즈('프루스트와 기호', '철학이란 무엇인가')를 언급할 때 머리에 쥐났습니다. 그리고 중용시간에 우샘이 조선시대에 책한권(주희의 주석서)을 읽고서 무슨 지평을 넓힐 수 있었겠는가라는 언급도 와 닿았습니다. 以文會友 以友輔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