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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4 후기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7-12-01 14:34
조회
99
죄송합니다 후기가 늦었네요

‘이면’을 보기

서무귀에는 수많은 ‘자기상실자’들이 나옵니다. 지모가 뛰어난 자는 모략을 짜내고 꾸밀 사건이 일어나야 즐겁고, 변설에 능한 사람은 자기 말빨을 뽐낼 실마리가 있어야만 즐겁고, 사물을 잘 살피는 사람은 자신의 사려깊음으로 타인을 꾸짖을 수 있는 사건이 생겨야 즐겁습니다. 농부는 밭일이, 상인은 장사하는 일이 있어야 즐거우며 서민은 아침저녁으로 할 일이 있어야만 힘써 일하죠. 4장에서 장자는 이들을 싸잡아서 ‘자기상실자’들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재주, 자신의 일, 자신이 믿는 가치 등 무엇이 되었든 ‘나라고 믿는 것’에 갇히는 순간 우리는 역설적으로 자기를 상실하게 됩니다. 자기 영토에 갇히게 되는 것이지요. 13장에서는 4장에서 ‘자기상실자’라고 한 것을 세 가지 유형으로 세분화해서 보여줍니다. ‘다른 사람과 잘 지내면서 자기를 요상하게 꾸미는 유형’과 ‘타인에게 지나치게 의존하여 안일함을 탐하는 유형’, 그리고 ‘몸을 움츠려서 뻗어나가는 기상이 없는 유형’. 이들의 공통점은 자신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에 매몰되어 그 이면을 보지 못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자신이 거처삼은 돼지의 몸뚱아리를 ‘세계’라고 믿어버리는 이처럼. 장자는 계속해서 가치를 뒤집으며 우리가 믿고 있는 것들의 이면을 보게 합니다.

“아아! 나는 사람들의 자기상실을 슬퍼하였는데 이제 다시 나는 사람들의 자기상실을 슬퍼하는 자(나)를 슬퍼하였으며, 그리고는 나는 또 다시 사람들의 자기상실을 슬퍼하는 자를 슬퍼하는 자(또 다른 나)를 슬퍼하였다. 그랬더니 그 뒤로 날로 자기상실로부터 멀어지게 되었다.”

채운샘은 ‘이면’을 보는 것이 사회적 규범 속에서는 ‘어리석음’으로 드러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세계의 이면을 본다는 것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과 같은 의미에서 지혜로워지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9장의 남백자기가 그러한 예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전제의 이면을 본다는 것은 우리의 가치규범들을 그대로 둔 채 몇 수 앞을 내다보는 일이 아니겠죠. 이면을 보는 것은 지금 여기에서의 우리의 선택과 판단을 바꾸어놓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판단은 눈앞의 현실에만 매몰된 이들에게는 어리석음으로 드러날지도 모릅니다. 그러고 보면 제가 멋지다고 생각했던, 그리고 그렇게 되고 싶다고 생각했던 이상형은 그저 눈앞의 현실에 매몰된 이들 중에서 조금 더 뛰어난 사람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無’의 차원

서양철학과 비교했을 때 동양적 사유의 특징 중 하나는 ‘무(無)’에 대한 사유에 있다고 합니다. 서양에서 ‘없음’은 ‘있음’의 상대개념입니다. 그래서 ‘없음’을 사유하려면 일단 무언가를 떠올린 다음 그것의 소멸을 상상해야 하죠. 이때 ‘무’는 ‘유’의 결여로 정의됩니다. ‘국가’나 ‘질서’, ‘문명’, ‘사회’ 등은 대개 ‘있음’을 숭배합니다. 사회, 문명, 국가 등의 바깥을 ‘질서의 결여’, ‘혼돈’ 등으로 규정함으로써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것이죠. 그러나 실은 이때 정당화되고 있는 것은 ‘무질서’의 반대로서의 ‘질서’가 아니라 다른 가능한 질서들을 배제하는 하나의 질서입니다. 국가바깥 혹은 국가이전에는 무질서가 아니라 또 다른 질서가 있고, 보다 근본적으로는 모든 질서를 잉태해내는 ‘무’의차원으로서의 ‘카오스’가 있습니다. 경상초 6장에서는 이러한 무의 차원을 ‘天門’이라는 개념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생성과 사멸이 있고 나오고 들어감이 있으니 들어가고 나옴에 그 모습을 볼 수 없는 것” 장자적 사유에서 ‘무’는 ‘문’입니다. 그 스스로 어떤 규정적 존재로 환원되지 않으면서 모든 작용(들어감 나감)을 가능하게 하는 문.

유토피아에 대한 욕망

서무귀 1, 2장에는 ‘성군’이 되려고 애쓰는 무후와 그에게 태클을 거는(?) 서무귀의 일화가 나옵니다. “인민을 사랑하고 정의를 위해 전쟁을 멈추려”하는 자신을 응원해 달라는(?) 무후에게 서무귀는 “아름다움을 이루는 것은 악을 담는 그릇”이라고 답합니다. 채운샘은 이반 일리치의 문제의식을 통해 이 구절을 설명해주셨죠. 이반 일리치는 문명의 이로움을 한편에 두고 그것의 부작용을 해소한다는 문제설정에 저항합니다. 너무나 흔히 접하게 되는, 그리고 실제로 우리가 얼마간 빠져있기도 한 논리죠. ‘지속가능한 성장’, ‘녹색성장’ 같은 예쁜 말들은, 누리고 있는 것들은 그대로 누리면서 그것이 야기하는 ‘부작용’도 감당하기 싫은 탐욕을 감추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우리가 문제라고 여기는 것들은 정말 자본주의의 ‘부작용’일까요? 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모든 것들을 그 자체와 떼어놓고 생각해도 되는 걸까요? 혹시 우리의 유토피아적 환상과 누리되 감당하지 않으려는 욕망 자체에 함정이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반 일리치는 문명의 편리함과 함께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 것들을 사유해볼 것을 제안한다고 합니다. 그것들을 충분히 숙고한다면, 다시 말해 ‘이면’을 충분히 본다면 우리의 욕망이 같은 방식으로 작동하지는 않겠죠. 그런데 여전히 질문은 남습니다. 서무귀의 관점을 수용할 때 ‘통치’라는 것은 가능한가? 물론 그가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행하되 잘하려고, 의도하는 대로 되게 하려고 애쓰지 말라는 것이겠죠. 자기 정당성 없이 행한다는 게 무엇일지는 두고두고 생각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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