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n

11.28 공지

작성자
수경
작성일
2016-11-24 14:47
조회
270
지난 시간에는 <인도철학사 1>  3장 및 4장 일부를 함께 읽었습니다. 그런데 본격적인 책 읽기에 앞서 채운 쌤께서 몇 가지 당부를 하셨지요.

하나, 내용 발제라고 해도 자기 맥락을 만들어야 한다. 맥락 없이 책의 순서대로 요약을 하다보면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논의할 만한 것인지 알 수 없는, 기계적 요약문이 되어버리기 일쑤지요. 읽으면서 자신이 중요하다거나 문제적이라고 여긴 지점, 그것을 중심으로 다시 책을 구성해야 한답니다. 이때 순서, 논점 등이 책과는 약간 달라질 수 있음은 물론이고요. 꼭 달라져야 하는 건 아니지만, 자신의 독해를 중심으로 발제를 하다보면 자연스레 순서와 구성 방식 등이 생길 테니까요.  그리고 발제자는 필히 해당 범위까지 소화해야 한다는 건, 기본 중의 기본! 잊지 맙시다 ㅎㅎ

둘,  문제화할 수 있어야 한다. 첫 시간에 공지되었듯 매 시간마다 각자 책을 읽고 질문을 정리해와 공유하고 함께 이야기하기로 했었죠. 그런데 이때 질문이란 책에 등장하는 개념에 대한 1차원적 질문(아트만이 뭔가요? 베다랑 우파니샤드랑 뭐가 달라요?)이 아님은 물론이거니와 인도에서 발생한 다른 사상체계인 불교 등 다른 철학 및 종교와의 단순 비교가 되어서도  안 되겠습니다. 불교가 인간과 세계를 통찰하는 하나의 사유인 것처럼, 베다도 그렇지요. 그렇다면 물어야 할 건 이게 옳은가 그른가가 아니라, 어떤 조건과 배경으로 당대에 이와 같은 사유가 발생했는가, 그리고 이 같은 사유를 통해 무엇이 드러나는가라는 것. 어째서 인도인은 신의 위계를 창조했다가 아트만을 고안하게 되었을까? 왜 인간은 '나' 혹은 '존재'를 넘어서는  어떤 것을 끊임없이 생각하게 되는가? 등등.

셋, 개념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 기존의 이해에 갇히지 말아야 한다.  책에 보면 '배후' '실재' '주체' '절대자' 같은 단어들이 심심찮게 등장하죠. 특히 불교를 공부해온 분들은 어쩐지 이런 단어들을 보면서 힌두사상이 보다 덜 엄밀하고, 서구의 본질주의 철학과 맞닿아 있는 면이 있다고 여길 수도 있는데요. 채운 쌤은 그것이야말로 불교를 도그마화(세계는 空이라고 했으니까 실재 혹은 영원을 말하는 우파니샤드는 잘못된 거야! 하는 식)하고, 선판단을 가지고 책을 읽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의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어와 문장의 맥락과 더불어 사유 전체에 대한 조망이 필요한데, (책을 읽기도 전에 자신이 의미를 부여해버린)단어 하나에 갇혀서 섣불리 판단을 내리는 건 성실한 공부법과 거리가 아주 멀죠.

이 같은 조언 혹은 질책 후에 드디어 우파니샤드에 진입했습니다^^;

베다 종교에서 유독 철학적인 것이 우파니샤드인 만큼, 채운 쌤께선 종교에서 철학으로의 이행에 대한 간략한 언급으로 수업을 시작하셨죠.
종교란 무엇인가? 세계와 삶에 대한 공포나 두려움, 더불어 욕망과 소망을 외적인 데 투사해 만든 인위적인 상을 절대시하는 것이랍니다.
라다크리슈난에 의하면 초기 베다에서 발견되는 바가 그와 같다죠. 자연에 대한 외경에 인간적인 것을 부여해 인간은 자연과 신을 섬기기 시작했답니다.
그런데 이같은 원시 종교가 인간의 두려움과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기는 해도, 그것은 '나'를 묻지 않는다는 점에서 아직은 나, 내면, 주체 같은 게 발견되기 이전 시대라 해도 좋겠습니다.
신에 대한 의지는 있으나, 나를 출발점으로 세계를 묻고 나와 세계의 관계를 고찰하는 건 그 후의 일이죠. 이를 곧 철학의 시대라 부를 수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소크라테스의 철학의 시작점으로 삼는 건 그 때문이라죠. 그에게 있어 관건은 나 자신을 아는 것, 즉 나의 무지를 아는 것입니다.
채운 쌤 설명에 의하면 신에 대한 의탁이 아니라 나를 출발점 삼아 로고스를 사용해 세계를 이해하고자 하는 것, 그 모든 과정을 철학이라 부를 수 있답니다.
그런 면에서 우파니샤드로의 이행은 철학의 시작이라 말할 수 있다고 해요. 우파니샤드에서 문제 삼앙 것이 고통의 자각인바, 고통이란 곧 나의 실존에 대한 자각인 탓이랍니다.

채운 쌤께서 종종 말씀하시지만 생성과 변화를 문제삼지 않는 철학은 없대요. 하긴 나와 세상이 변한다는 바로 그 사실이 없었다면 철학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철학이 그 현상만을 문제 삼거나 변화만 있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는 게 더 중요하지요. 철학은 언제나 현상 너머를 묻지요.
말하자면 철학이 하는 일이란, 현상을 가능케 한 조건과 원리를 탐구하는 겁니다. 그걸 플라톤 철학, 기독교 철학, 유불도 등등에서 각기 다르게 답하고 있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아무튼 종교와 사유의 발전사를 보아도, 문학적 변천을 봐도 거의 비슷하게 나타나는 것은, 인간은 변화를 아는 데 만족하지 않고 동시에 그 변화를 가능케 한 힘이 무언지, 그게 자신과 어떤 관계인지를 궁금해 한다는 사실입니다.
3분 전과 바로 지금의 내 감정이 다르다고 우리는 압니다. 10년 전의 나와 현재의 내가 다르다는 것도. 시간이 흐르고 날과 달이 바뀌고 계절이 바뀌는 것도 알지요.
하지만 그렇게 바뀌면서도 동시에 인간은 내가 나로 있다는 것을, 세계가 흩어지는 게 아니라 거대한 동일자(달리 표현이 생각나지 않습니다)로서 남아 있다는 것도 알지요.
라다크리슈난이 브라흐만과 아트만을 통해 설명하는 바가 이와 연관됩니다.
책에서 말하길 아트만은 경험적 자아로 설명될 수 없는, 자아와 비아, 주체와 대상, 토대와 그 위의 존재 이 모두를 포함하는 보편적 자아입니다. 그러니까 한정된 시공간성 안의, 경험되고 변화하는 자아 말고 그것 너머의 자아.
이 둘의 관계는 무엇인가? 고대 인도인은 이를 궁금해 했답니다.
채운 쌤은 이로부터 윤리적 문제가 도출된다고 하는데요. 모든 변화하고 생성한다, 나는 변한다, 이것으로는 어떤 윤리적 문제도 나오지 않지요.
문제는 우리가 매번 변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가능케 한 더욱 거대한 평면 내지 궁극적 실재, 법칙, 생명 같은 것과 연관되어 그렇게 된다는 것, 그러므로 우리의 변화는 전체 세계와 동떨어진 채 가동되는 게 아니라는 것, 하지만 그 전체 세계는 조종자 인격신 같은 게 아니라는 것...
그러므로 어떻게 살 것인지를, 무엇을 선택하고 어떻게 관계맺을지를 물어야 할 수밖에요.

음, 사실 아트만도 브라흐만도 아직까지는 잘 감이 잡히지 않습니다. 채운 쌤께서는 직접 <우파니샤드>를 읽어가면서 다시 개념을 이렇게 저렇게 생각해보라고 조언하셨지요. 그때를 기약하며, 중요 개념들을 머리속에 잘 넣어둡시다^^

후기는 은하쌤이시죠. 제가 미처 기억하거나 정리하지 못한 부분 좀 잘 부탁드려요ㅋㅋ
다음 시간 발제는 택원, 은남쌤, 미영쌤, 현옥쌤이십니다.
그리고 간식 및 후기는 은남쌤.
모두 잘 부탁드려요!
그럼 담주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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