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SF 절차탁마 8월 1일 공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8-07-31 11:32
조회
106
공지가 너무너무너무 늦어버려 정말정말정말 죄송합니다ㅠㅠ!

1. 관점주의

“신은 죽었다”라고 말한 니체. 그런데 ‘신’이란 무엇일까요? 신을 요청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니체가 《즐거운 학문》에서 말하는 것처럼, 신앙심이란 확실성에 대한 요청입니다. 이것을 인식의 차원으로 가지고 오게 되면, 신이란 대상과 주체의 확실성을 부여하는 매개로 기능하게 되죠. 모든 것은 변합니다. 우리의 감각은 영원한 것은 없다고 말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고정된 대상과 그것을 인식하는 고정된 주체를 상정합니다. 이때 인식하는 주체와 인식되는 대상 각각의 동일성을 부여해주는 것, 즉 주체 자체와 대상 자체의 존재를 보증해주는 것이 바로 신입니다. 혹은 신에 준하는 무언가겠죠.

따라서 니체에게 신의 죽음이란,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확실성의 기반이 파괴됨을 의미했습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확인한 것처럼 니체는 주체와 대상의 동일성을 부정하죠. 그렇다면 인식은 어떻게 가능해질까요? 인식의 베이스를 상정하지 않는 인식. 클로소프스키는 이것을 ‘기호학’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기호학에서 의미는 대상에 내재해 있지 않으며, 주체가 가지고 있지도 않습니다. 진리의 담지체 자체를 부정하죠. 따라서 모든 것은 기호일 뿐인데, 이때 기호는 해독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해석되어야 할 것입니다. 해독이란 그것의 참뜻을 밝혀내는 것이죠. 그렇다면 해석이란 무엇일까요?

그 전에 ‘우주적 종합’이라는 개념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들뢰즈는 ‘주체’, ‘대상’, 그리고 그것을 보증해주는 ‘신’으로 이루어진 형이상학적 틀을 ‘종합’이라는 말로 대신합니다. 진리를 담지하고 있지 않은 기호들의 세계. 신이 기호들을 미리 만들어서 우리에게 준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그것들에 대한 일관된, 적어도 준안정적인 해석을 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종합’입니다. 들뢰즈가 보기에 자연은 분열증적입니다. 분열증자는 ‘나는 ~ 이다’라고 말하지 않고 ‘~이거나 ~이거나 ~이거나’라고 말합니다. 분열증자에게는 ‘세계가 곧 나’인 것이죠. 들뢰즈가 보기에 끊임없이 규정을 벗어나는 자연의 생산방식은 분열증의 메커니즘과 닮아있었습니다. 우주는 진리의 담지체들을 숨기고 있는 대상들의 합이 아니라 진리가 생산되는 기호들의 세계입니다. 따라서 종합이란 공통된 기반 위에서 다른 것들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이질적인 것들이 관계한 결과로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즉 동일성이란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우주적 종합에 의해 매번 생산되는 것입니다.

니체에게 우주적 종합에 해당하는 개념은 ‘영원회귀’입니다. 차이에도 불구하고 동일성을 유지하는 세계. 니체가 영원회귀 개념으로 말하고자 했던 것은 끊임없는 해석을 요청하는 기호들의 세계라고 합니다. 자, 이때 해석을 한다는 것은 뭘까요? 그것은 신이 부여한 의미를 확인하는 것도, 참된 것에 대한 앎을 ‘상기’하는 것도 아닙니다. 징후들을 읽어내고 진단하는 것. 무언가를 하나의 징후로 간주한다는 것은, 그것을 주어진 대상으로 보지 않고 그것을 그것으로 출현시키는 조건 혹은 과정을 사유하는 일입니다. 가령 네모를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네모는 어떻게 ‘네모임’을 유지하는지를 질문하는 것. 차이들의 종합으로서의 동일성에 대해 질문하는 것.

2. 루터와 정신의 농민혁명

역사에는 종종 진보인 것처럼 보이는 반동이 있다. 이것이 루터의 종교개혁에 대한 니체의 평가였다고 합니다. 니체는 흔히 연장선상에서 평가되곤 하는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을 구분합니다. 르네상스란 중세가 황혼기에 접어들고 있음을 보여주는 현상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세속적인 것을 긍정하고 민중적인 것을 거리낌 없이 드러냅니다. 프랑수아 라블레, 브뤼겔, 보쉬 같은 작가들. 니체가 보기에 이는 중세적 가치의 몰락을 증언합니다.

그런데 당시 루터는 새로운 가치의 가능성이 꽃피는 몰락의 시기를 교회적 가치의 부패로만 받아들였습니다. 새로운 힘들의 징후들이 펼쳐지는 가운데에서, 몰락할 것을 몰락하게 두는 대신 저물어 가는 힘들에 대한 분노를 표출한 것이죠. 니체가 어떤 시대를 바라보는 관점은 매우 흥미로운 것 같습니다. 루터에게 종교로부터의 해방이란, 억압으로부터의 개인의 해방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의 개혁은 농민혁명과 접속되지 않았죠. 루터는 교황청의 부패만을 바라보았습니다. 사람들이 삶을 긍정하는 것을 보기보다는 교회가 신을 믿지 않게 된 것을 본 것이죠. 아이러니하게도 이때 교회의 부패에 대한 루터의 공격은 교회의 재생으로 이어집니다. 가치들이 몰락하는 시대로부터 스러져가는 것들을 볼 것인가, 새롭게 발생하는 것을 볼 것인가? 이것은 니체가 루터를 비판하며 던지는 중요한 질문인 것 같습니다. 권력(자)에 대한 비판이 때로는 권력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비롯될 수도 있다는 것. 몰락하는 가치들을 몰락하도록 두는 것. 어쩌면 이것은 가치를 추구하는 것보다 더 많은 지혜와 사유의 역량을 요구하는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3. 종교성

우리는 왜 종교성을 잃어버렸을까? 종교성을 상실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종교란 무엇일까요? 니체는 신이라는 추상적 관념뿐만 아니라 종교적 의례나 종교집단의 생활양식에 대해서도 많은 말을 했습니다. 일상과는 다른 리듬을 만들어내는 집단성과 의례, 그리고 존재의 변이를 체험하게 하는 수행과 고행. 이것이 곧 종교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고대 사회에는 종교적 체험과 일상을 유지하는 고유한 리듬이 있었습니다. 종교로부터 비롯되는 비일상적 체험이 다시금 일상을 살아가게 하는 힘으로 변환되는 메커니즘이 있었던 것이죠. 그런데 근대의 프로테스탄티즘은 이러한 일상/비일상의 리듬을 빼앗았습니다.

앙리 르페브르에 따르면 자본주의적 ‘억압’은 노동, 임금 등의 차원 이전에 우리의 삶의 리듬에 작동합니다. 우리 삶의 리듬을 획일화하는 것. 공간/시간의 리듬이 획일적으로 되는 것 자체가 자본주의의 억압이라는 것이죠. 자본주의는 자본의 흐름에 맞춰 우리의 삶의 리듬을 규정합니다. 가령 니체가 비판하는 것처럼, 노동을 중심으로 노동 외의 시간(여가)도 규정되어버리는 것.

자본주의는 일상과 비일상을 컨트롤하는 종교적 리듬을 해체하고 그것을 대신하여 일상을 폄하하고 끊임없이 비일상의 영역을 환상으로 가득 채우게끔 하는 노예적 메커니즘을 만들어냈습니다. 결과로 삶 전반이 지지부진해졌죠-_-; 노동을 혐오하는 동시에 월급과 휴가를 손꼽는 삶. 자본주의는 우리의 환상에 끊임없이 먹이를 주면서 삶 전체의 리듬을 황폐화시킵니다. 종교성이란 비일상적 힘의 고양을 통해 일상을 견고하게 가져가기 위한 훈련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모든 종교에는 얼마간의 잔인성이 내포되어 있죠. 고행, 통과의례, 금욕과 같은. 고대의 종교란 훈련과 수행의 문제였습니다. 채운샘은 이러한 잔혹성의 효과에 대해 질문하셨습니다. 학교에서 10시간 공부를 하게 만드는 근대의 합리적 잔혹성과 종교 공동체의 (우리가 야만적이라거나 미신적이라고 부르는) 잔혹성.

다음시간 공지입니다.

- 《선악의 저편》 5, 6장과 나눠받은 들뢰즈의 《니체와 철학》 프린트 8, 9, 10을 읽고, 들뢰즈를 중심으로 힘의지 개념을 정리하는 것이 숙제입니다.

-  간식은 저와 규창
전체 2

  • 2018-07-31 12:40
    종교성의 핵심에 자기 극복, 자기 변용, 자기 수련이 있다는 점을 배웠습니다. 종교심이란 신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극복될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를 필요로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 2018-07-31 14:19
    종교성 얘기할 때, 자공이 초하루에 양을 바치는 제사를 없애자 공자가 "자공아, 너는 양을 아끼지만, 나는 그 예법을 아낀다."라고 했던 게 생각나네요.
    요즘에는 합리성을 바탕으로 생활 곳곳에 스며든 '비합리적인' 관습들을 제거하지만, 동시에 그 합리성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어떤 생활양식을 꾸려나가고 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