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SF절차탁마 8월 8일 공지

작성자
박규창
작성일
2018-08-05 19:27
조회
123
아, 너무 덥군요! 입추(8월 7일)가 얼마 안 남았다지만, 이 더위가 좀 더 오래 갈 것 같아요. 아무래도 시도 때도 없이 졸게 되는 시기를 좀 더 견뎌야할 것 같습니다. ㅎㅎ 추운 날씨와 따뜻한 달빛마루가 기다려집니다.

 

먼저 공지부터 하겠습니다. 이번 주에는 《선악의 저편》 6장, 7장을 읽어 오시면 됩니다. 숙제는 1. 이번 시간 채운쌤이 설명해주신 힘의지를 각자의 방식으로 정리한 다음, 2-⓵각자의 도덕의 계보학을 쓰거나 ⓶-2《선악의 저편》 단편 중 하나를 해석하면 됩니다. 왠지 호정쌤은 자기 얘기 섞으면서 재미있는 계보학을 쓰실 것 같아요. 벌써부터 기대됩니다. ^_^ 그리고 8월 15일 저녁에 절차탁마 끝나고 나서 조촐한 회식이 있을 예정입니다. 그날 모두 시간 비워두세요~ 간식은 크누쌤과 지은 누나에게 부탁할게요. 그럼 다음 시간에 뵙겠습니다~

 

항상성, 적극적 힘의지의 결과

 

채운쌤이 여러 번 설명해주셨지만, 계속 힘을 능력으로 생각했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적극적 힘과 반응적 힘도 곧 좋은 것 그리고 나쁜 것으로 제 안에서 나눴던 것 같습니다. 가령, 적극적 힘은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이기 때문에 좋고, 반응적 힘은 차이를 배제하여 동일성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나쁘다고만 한 것이죠. 어디서 들은 건 있어서 ‘차이’란 글자만 나오면 좋다고 생각하는 나쁜 편견이 생겨버렸습니다. ^^;; 하지만 차이만 발생하면 ‘나’라는 자아가 성립할 수 없습니다. ‘나’라는 동일적인 주체는 차이를 배제함으로써만 형성되기 때문이죠. 힘의 유형으로 말하자면, 적극적 힘이 차이를 생성한다면, 반응적 힘은 적극적 힘을 무화하고 자연의 흐름으로부터 분절함으로써 동일성을 생성합니다. 들뢰즈가 기원 자체에 있어서 공존 관계에 있다는 것은 두 가지 힘이 동시에 작동하고 있음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세상에 대한 우리의 해석은 항상 차이를 만들어내는 적극적 힘과 차이를 무화하는 반응적 힘이 동시에 작동한 결과입니다. 그렇다면 차이를 발생하는 것과 동일화의 관계를 어떻게 사유해야 할까요? 쉽게 말하면, 힘을 발생적으로 사유할 때, 우리는 어디서 윤리적인 지점을 도출할 수 있을까요?

유가의 가르침은 기-승-전-‘자강불식(自强不息)’입니다. 그리고 니체를 읽다보니 차이를 긍정할 수 있는 자만이 삶을 항상된 방식으로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유가의 사심을 덜어내는 수행과 니체의 차이에 대한 긍정이 잘 매치가 안 되더군요. 그런데 이번 시간에 채운쌤이 그걸 설명해주셨습니다..!

우리의 몸은 그 자체로 매 순간 끊임없이 해석하는 일종의 기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름에 기온이 40도에 육박하고, 겨울에 영하 20도로 떨어져도 우리의 신체는 변화하는 환경을 해석하며 36~37도 사이를 유지합니다. 가령, 더우면 땀을 배출함으로써 열기를 내보내고, 추우면 신체에 비축된 지방과 근육을 분해해서 열기를 발생시키죠. 그렇다면 이것은 동일성을 유지하는 것이기 때문에 반응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여기에서 ‘종합’이라는 문제를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체가 그렇듯, 자연은 생생불식(生生不息)하여 단 한 번도 동일한 것으로 귀결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지구의 자전은 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았고, 계절의 흐름도 봄-여름-가을-겨울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인간의 예측을 벗어날 뿐이지 자연은 변덕 같은 것을 부리지 않습니다. 이것은 자연이 이러한 차이들을 종합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규칙이나 동일적인 것이 미리 주어져있어서 그 틀 안에서 자연이 운동하는 게 아니라 이질적인 것들을 종합한 결과로 규칙이 있는 것이죠. ‘나’는 이러한 해석하는 존재로서, 해석하는 힘의지의 집합으로서 살아가는 중입니다. 그렇다면 관건은 차이를 단지 무화시키는 게 아니라 차이를 발생시키고 긍정하는 것이 됩니다. 채운쌤은 여기서 도가에서 말하는 허(虛)를 사유와 연결해서 설명해주셨습니다.

노·장이 말하는 ‘허’란 꽉차있음의 대립으로서의 ‘허’가 아닙니다. 《도덕경》 4장에 “도(道)는 비어있지만 기운이 가득하기 때문에 작용할 수 있고, 어떤 상황에서도 고갈되지 않는다(道沖而用之, 或不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도에 대한 묘사가 허를 설명해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니라 모든 작용을 할 수 있는 유연함으로서의 ‘허’입니다. 이러한 허란 결국 자기 사유의 스타일을 계속해서 실험하는 과정을 요구합니다. 사유는 그 자체로 우리에게 어떠한 방식으로 주어져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해석이 일정한 사유를 형성합니다. 그런데 차이를 포착하고 종합하는 과정을 동반하지 않으면 우리의 사유는 항상 일정한 방식으로밖에 해석하지 못합니다. 노·장이 허를 이야기한 것은 이질성을 받아들여서 종합할 수 있는 사유의 유연함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신을 비우는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사유는 경직된 채로 차이를 포착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똑같은 방식으로서 해석한 결과로 동일성을 유지하는 것과 이질적인 것들을 종합함으로써 동일성을 형성하는 것은 아예 다른 힘의지의 결과입니다.

유가에서의 자강불식도 마음을 사욕으로 굳어지지 않게 물렁하게 만드는 수행이라는 점에서 똑같이 사유의 유연함을 요구합니다. 생각해보면, 타성에 젖은 삶은 작은 낯섦이 끼어드는 순간 불완전하게 망가집니다. 하지만 자기 삶을 구성하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사건들이 벌어져도 그것들에 휘둘리지 않으며 일상을 가져갈 수 있겠죠. 따라서 자강불식이란 동일한 것을 반복해서 습관적 삶을 만드는 게 아니라 더 큰 해석역량의 결과, 더 많은 이질성을 종합할 수 있는 유연한 사유를 말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도덕을 힘의지의 차원에서 문제 삼는 니체의 계보학이 역량의 증대로 이어지는 것도 더 큰 종합을 가능케 하는 사유를 구축하기 때문 아닐까요?

 

도덕을 문제 삼기, 인식을 문제 삼기

 

니체는 역사적으로 어떻게 반응적 힘이 적극적 힘을 전복하고, 이기는지에 대해 힘의지의 차원에서 분석했습니다. 우선, 힘은 그 자체로 양적인 힘으로 소유된 게 아니라 관계 속에서 어떤 유형(type)으로 작용됩니다. 들뢰즈는 크게 적극적 힘과 반응적 힘 두 가지로 설명했는데, 반응적 힘은 적극적 힘을 행위와 행위자를 분리함으로써 이깁니다. 즉, 반응적 힘이 적극적 힘을 이길 때조차 반응적 힘인 것이죠. 여기서 우리는 할 수 있는데 하지 않았다거나 하지 않을 수 있는데 했다는 식의 어법이 나옵니다. 《도덕의 계보》 1논문에서 살펴봤듯이, 이렇게 힘을 발휘하는 주체가 설정되는 순간 의식은 특권적 위치를 차지하게 되고, 도덕은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일 대상이 됩니다. 여기서 ‘주어진 도덕’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도덕적으로 악한 의지를 가진 사람이 됩니다. 그런데 인간의 의식이 특권을 부여받으면 받을수록 역설적으로 우리는 의지가 약한 인간이 됩니다. 이때 의지가 약하다는 것은 해석역량이 작은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니체는 도덕을 문제 삼을 때 어떤 힘의지로부터 추동된 것인지를 묻습니다.

반응적 힘을 문제 삼는 것은 언어에 대한 문제제기와 통합니다. 들뢰즈는 반응적 힘이 적극적 힘을 분리할 때, 그 분리는 허구, 신비화, 왜곡에 근거한다고 말했습니다. 저번에 저는 니체가 왜곡이란 단어를 특정문법으로 사용한다고 생각했는데, 그 뿐만 아니라 허구, 신비화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사용되던 단어였습니다. 따라서 언제나 도덕의 문제는 인식의 문제와 같이 갈 수밖에 없습니다. 주체에 특권을 부여하는 인식의 거대한 조작이 없으면 도덕에 대한 우리의 조작도 없습니다. 채운쌤은 불교의 중론(中論)을 통해 우리의 모든 가치 판단이 언어적 조작에 근거하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에 대응하는 세계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중론에서는 판단이 언어적 분별에 의해 조작된다는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인식, 정서의 예속을 극복하는 일은 언어의 예속으로부터의 해방을 동반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작업이 계보학입니다. 잠시 《지식의 고고학》을 생각해보면, 푸코는 언어 이전에 본질적인 대상이 있다거나 대상 이전에 본질적인 의미를 지시하는 언어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각 시대의 언어(지식)는 담론과 비담론과의 관계 속에서 출현합니다. 따라서 푸코가 ‘문서를 기념비화’한다는 말은 언표를 특정한 시공간에 위치시킴으로써 그 시대를 다시 그려내는 것을 뜻합니다. 푸코는 계보학을 통해 상이한 국지적 사건들이 그 시대의 정치적인 것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보여주었습니다. 이러한 작업은 우리에게 익숙한 방식으로 작동하는 언어적 분별을 중지하고, 새로운 문법을 창조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토론 중에 재밌었던 얘기 짧게 남기고 후기를 마치겠습니다. 역사적으로 적극적 힘과 반응적 힘의 대결에서 항상 반응적 힘이 이기는 이유에 대해서 얘기했었습니다. 적극적 힘은 매번 소진되고 새로이 발휘되지만, 반응적 힘은 힘을 남기고 축적하는 방식으로 발휘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현실을 ‘흐름’이 아니라 하나의 ‘이미지’로 분절함으로써만 인식합니다. 따라서 현실에 남는 것은 항상 반응적 힘이고, 역사적으로도 반응적 힘이 승리하는 것도 반응적 힘만이 남아있기 때문일 거라는 얘기를 했었습니다. 힘의지를 강자, 약자의 태도가 아니라 인식의 차원에서 생각해볼 수 있어서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걸 어떤 맥락에서 얘기해야 될지 모르겠네요. 하하
전체 2

  • 2018-08-05 20:54
    동일성이란, 말하자면 차이들의 종합. 그러므로 차이는 능동적 힘, 동일성은 반동적 힘이라고 이분화할 수 없지. 매번의 차이를 종합하여 동일성을 생산해내는 것 자체가 힘의 능동성! 그렇다면 반동적 힘은? 힘에 대한 이해를 더 더 더 !!^^ 다음 시간에 모두들 정리해서 말씀하실 준비를 해오세요~~ 이게 다 규창이 후기 덕분이란 걸 잊지 마시고요ㅋㅋㅋ

  • 2018-08-06 07:45
    규창아 이렇게 개인 숙제를 내주나? 얼척이 없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