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SF절차탁마 8월 15일 공지

작성자
황지은
작성일
2018-08-11 19:54
조회
144
숙제 공지부터 먼저 드리겠습니다ㅎ <도덕의 계보> 제2논문을 읽은 후 양심의 가책의 심리적 매커니즘에 대한 글을 쓰시는 것과 <선악의 저편> 9장을 읽고 ‘고귀함’에 대해 정리를 하는 것입니다. @_@ 간식 공지는 곧 건화가 댓글로 달 예정입니다!ㅎㅎ

 

적극적 힘, 반응적 힘

 

긍정의 힘의지, 부정의 힘의지. 적극적 힘, 반응적 힘. 니체를 접하면서 뭔가 ‘전자는 좋은 것 같은데 후자는 나쁜 것 같다’는 대략의 자의적인 이미지만 가지고 있었는데요, 그래서 채운샘께서 한 번 더 설명해 주셨습니다. 이 세계는 차이와 동일성으로 구성됩니다. 그런데 방향을 어떻게 볼 것인지에 따라 그 양상은 나뉘는데요, 동일성으로 차이를 보는 것과 차이로부터 동일성을 사유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동일성으로부터 차이를 볼 때에는 개체들 각각이 하나의 동일자이고, 차이는 그 동일자들 사이의 측량 가능한 간극을 말합니다. 그런데 차이들을 통해 동일성을 본다고 할 때에는 생성을 사유하게 됩니다. 채운샘은 ‘파란색’의 예를 들어 주셨습니다. 동일자들 간 차이의 경우는 파란색과 빨간색이 먼저 있어서 그 두 색이 다르다고 이야기하는 것이고, 차이로부터의 동일성이 생성되는 것은 파란색이 어떤 색과 이웃하는가에 따라 매번 다른 느낌을 자아내는 ‘파란색’이 매번 형성되는 것과 같습니다. 주체는 하나의 동일자로 먼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주체로 형성된 결과입니다. 엄마의 자식으로서의 나, 어떤 공간에서 누구와 함께 일하는 나 등.

 적극적 힘은 존재와 역량이 분리되지 않는 상태, 긍정의 힘의지, 끊임없는 차이화를 말합니다. 끊임없는 차이화로 동일성을 생산합니다. 반응적 힘은 존재와 역량이 분리된 상태로, 차이를 통해 자신의 생성을 긍정하기 보다는 ‘되고 싶은 모습’를 설정하고 그것에 도달하려 합니다. 지금 이 순간 나의 역량을 펼치기 보다는, 역량을 관념적으로 고정시켜놓고 그 상태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역량을 펼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채운샘은 정치인들의 예를 들어주셨는데요, 역량이 있다고 여겨지는 자리를 차지하는 것만이 자신의 역량을 펼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하는 방식이 바로 존재와 역량의 분리입니다. 돈이 있어야만 무엇을 할 수 있어라던가, 지금의 조건에서는 이걸 할 수 없어라고 생각하는 방식이 모두 반응적 힘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도덕적 우월성

 

이제 본격적으로 7장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채운샘은 질문을 던져주셨습니다. ‘인간은 언제 도덕적 우월성을 주장할까? 우리는 도덕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 어떤 사항, 누군가에 대해 도덕적 우월성을 확보하고 싶은 순간은 언제일까요? 그런데 다른 사람을 도덕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권리는 어디에서 생겨나는 것일까요? 나는 어떤 도덕을 믿고 있으며, 그 도덕의 실체는 어떠할까요?

 누군가를 도덕적으로 비판할 때 우리는 자신을 도덕적으로 중립의 위치에 두고 그에게서 자신의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자유를 빼앗습니다. 이것은 앞에서도 말했듯 나의 역량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므로 반응적 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내가 관계를 다르게 풀어나가지 못하는 것을 그를 심판함으로써 나의 정당성을 확보합니다. 채운샘은 이러한 도덕이 원한의 정신화 또는 내면화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힘들의 차이 속에서 누구와 함께하거나 싸우는 대신 도덕적 판결자가 되어 내가 우위에 있다고 위안을 느끼는 것. 우리는 도덕적 판결자가 되기가 참 쉬운 환경에 있지 않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쟁점이 되는 이슈들은 많은데 그 모든 것들이 자신의 삶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거나 그 이슈와 관련된 사람들과 내가 개인적인 관계를 맺고 있지는 않으니까요. 그래서 기사만을 통해, 여론에 휩쓸려 도덕적 판단을 내리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근대의 신은 ‘절대 선’으로서 악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위치에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신, 도덕적 선을 지향해야 하며 그렇게 하지 않는 자는 악이 되는 것이죠. 그런데 ‘선’이라는게 무엇인지, 신이 왜 선하다고 하는지에 대해서는 우리는 질문하지 않습니다. 자본주의를 예를 들어 보면 노동하지 않는자, 상품을 욕망하지 않는 자는 ‘악’이 됩니다. 자본의 흐름에 참여하지 않기 때문이죠. 자본주의적 시스템 및 삶의 양식에 충실히 복무하는 자가 ‘선’인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악’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어떤 속성이라기 보다는 도덕주의자들이 발명해낸 것이 아닐까요?

 

역사적 감각

 

니체는 본능과 이성이 따로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인간의 정신은 이성과 본능이 뒤섞여 있습니다. 이성은 본능과의 관계 속에서 발휘됩니다. 따라서 인간을 본능을 몰아낸 이성적 인간, 또는 이성이 부재한 본능만을 가진 인간으로 딱 나눌 수 없는 것이죠. 시야를 조금 더 확대해서, 문화 차원에서도 니체는 문명과 야만을 따로 떼어놓지 않습니다. 그는 인간의 문명이 반(½) 야만 상태라고 말하는데요, 문명과 야만을 따로 구분짓지 않고 문명 속에 야만이 있다고, 문명이 야만으로부터 발생되었다고 보는 것이죠. 따라서 문명은 야만 상태를 모두 제압한 후 도달하는 어떤 ‘완성의 상태’가 아니라, 미완성 상태에서 계속 변이합니다. 마찬가지로 ‘민족성’ 또한 어떤 완성된 민족의 속성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니체가 말하는 ‘역사적 감각’을 가진 인간은 역사나 문화를 ‘완성된 상태’로 보는 시각을 거부합니다. 역사적 감각을 지닌 사람들은 현재 우리의 문화를 이루는 힘의 배치를 읽을 수 있는 본능을 지닌 이들입니다. ‘이것이 우리 문화야, 우리 전통이야’라고 말하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는 것이죠. 문화는 사람과 사람들이 이동하고 관계 맺는 과정 속에서 생성되는 것이지, 어떤 민족의 속성이 미리 주어져 있어서 그로부터 문화가 형성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중요한 질문 앞에 서게 됩니다. ‘우리편’이 아닌 역사는 모두 제거해야 하는 것인가? 제거하는 것이 우리의 전통을 지키는 일인가? 우리의 순수한 전통이 있을 수 있는가?

 이에 이어서 ‘여성성’, ‘‘국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여성성’은 과연 무엇일까요? 여성만의 고유한 속성이라는게 있을까요? 여성에도 다양한 계열이 있습니다. 나이가 어린/많은 여성, 장애를 가진 여성, 아시안 여성, 등등. 내가 ‘어떤’ 여성인지에 따라 놓인 관계의 장이 다르죠. 이 많은 케이스들을 ‘여성 일반’으로 묶어서 말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성평등이 꼭 ‘여성과 남성은 똑같은 노동자로 똑같은 대우를 받아야 한다, 집안에서의 역할도 똑같이 분담해야 한다’ 등의 담론으로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일까요? 굉장히 헷갈리는 문제인 것 같습니다. 동일한 가치척도 아래 남성과 똑같이 ‘임금 노동자’가 될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정말 여성의 해방을 말하는 것일까요?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남성과 다르지 않다’는 선언 아래 남성과 똑같은 교육을 받아온 여성이 남성과 다른 가치를 상상한다는 것 또한 무언가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국가 차원에서 생각해 보자면, 평등주의는 모두가 단일한 체제에 복속하면서 동일한 가치척도에서 평가받기를 원하는 이념입니다. 차이의 생성을 거부하는 동일자들의 세계인 것이죠. 우리가 말하는 평등이 실은 모두를 억압하는 것은 아닐까요?

 

사유의 폭력성/잔인성

 

이번 토론에서 많은 이야기가 오갔던 ‘정신의 근본의지’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근본’을 영어 단어로 옮기면 ground, foundation이 되겠습니다. ‘기초적인’이라는 뜻이 강한데요, 근본적인 것에 대한 의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정신의 작용은 신체가 그렇듯 생리적 과정을 따릅니다. 낯선 음식을 우리의 위가 소화시키면서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듯, 정신 또한 새로운 것을 자신의 원래 바탕과 동화시키며 통일성을 만듭니다. 정신의 관성 작용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새로운 것이 다가올 때 우리는 그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는게 아니라 우리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사유 방식으로 소화시키는 것이죠.

 하지만 정신을 이루는 충동에는 비슷한 관념을 재생산하는 충동 외에 또 하나가 있습니다. 바로 어떤 것에 대한 기존의 해석을 차단하고 그것에 저항하는 충동도 함께 가지고 있는 것이죠. 모든 것을 다 자기 식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이건 그런 식으로 해석할 수 없지 않아? 그런 식으로 이해하는건 아니지 않아? 그냥 그렇게 보이는 것일 수 있잖아’라는 식으로 질문을 던지게 되는 충동. 기존의 관성적 사유로는 돌파할 수 없는 사건을 마주하게 될 때 이런 정신의 작용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런 것을 ‘정신의 폭력성' 내지 ‘잔인성’이라고 합니다.
전체 3

  • 2018-08-12 14:53
    간식은 윤순샘과 봉선샘께서 준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차이들을 통해 동일성을 본다는 것, 힘들의 차이 속에서 관계한다는 것... 어느새 이런 말들에만 익숙해져버린 것 같네요. 익숙해지니까 더 이상 생각하지 않게 되고...

  • 2018-08-12 15:00
    도덕주의자란 말이 생각보다 넓은 것 같아요. '평가자'라는 자기 위치를 세우는 것은 말이 얼마나 화려하든 반응적 힘에 불과할 뿐!인데, 몸에 벤 습은 적극적 힘보다 반응적 힘이 더 편하단 말이죠...

  • 2018-08-12 18:13
    저는 니체가 생각하는 민족 개념에 놀랐습니다. '단일민족'같은 것은 개나 줘버려. 였더군요. 19세기 말 민족주의가 드글드글 끓었을 텐데, 니체는 그 와중에 한 민족 안에서의 힘들, 힘들의 차이를 보고 있었나 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