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SF 절차탁마 8월 29일 공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8-08-24 11:56
조회
136
니체의 비판

벌써 잊으셨을지도 모르지만(?) 채운샘은 우리의 뭉뚱그려서 공부하는 경향을 지적하셨죠. 학위를 따려는 것도, 누구에게 보이려는 것도 아닌 완벽하게 이기적인 공부이기 때문에 더 정교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아마추어는 대충하는 자가 아니라 자기 행위를 목적과 동일시하지 않는 자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목적 없이 행하는 자라는 점에서 자기 삶과 행위가 일치되는 자인 것이죠. 채운샘은 느낌에 의존하지 말고 개념을 가지고 실험을 해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화두를 들어야 한다고도 말씀하셨죠. 화두를 든다는 것은 문제를 쥐고 다닌다는 뜻인데, 문제를 이런 저런 방식으로 시험해보고 어떤 상황과 충돌하고 … 하면서 하나의 개념을 갖게 되는 과정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의식하지 않고도 개념을 통해서 뭔가를 보게 되는 순간, 개념을 갖게 되었다고 할 수 있겠죠.

독일어에서 고귀함을 뜻하는 Vornehmhei에는 ‘높은 신분에 속하는’, ‘먼저 취하는’이라는 뜻이 있다고 합니다. 저열함을 가리키는 Gemeinheit에는 ‘공동체의’라는 뜻이 함께 포함되어 있다고 하죠. 이로부터 알 수 있는 것은 저열함이란, 나를 무리 속에 놓고 시작하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다른 것들과의 거리에서 자기 자신을 출발점으로 놓는 것이 고귀함이라면, 무리 속에 자신을 놓는 것은 저속함입니다. 니체는 자못 보수적이거나 엘리트주의적으로 보이는 개념들을 자주 사용합니다. 어째서 니체는 이런 개념을 만들어내야 했던 것일까요?

어떤 철학자가 개념을 창조-사용하는 데에는 그 철학자의 시공간적 구체성이 있습니다. 따라서 니체의 시대 속에서 왜 이런 개념이 필요 했을까,를 질문해야겠죠. 니체가 자신의 시대에 가장 참을 수 없었던 것은 무리들의 도덕·정치·문화·경제였습니다. ‘사람들은 왜 자신의 행위를 통해 가치를 만들지 않고 일할 ‘권리’를 외치는가?’ 말하자면 니체는 이와 같은 질문을 제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노동이란 자신의 행위역량에서 노동력만 뽑아내서 화폐가치와 교환하는 것이죠. 노동이란 우리가 생산하는 것, 우리가 일하는 작업장, 생산과정, 우리의 정신으로부터의 우리 자신의 소외를 함축합니다. 니체가 보기에 우리는 일할 자유와, 여가의 권리를 누군가에게 달라고 ‘요청’하는 노예적인 형식으로만 힘을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죠. 민주주의라는 이름 하에서 대의제의 한 부분이 되는 데에 만족하는 것입니다.

말한 것처럼 니체는 ‘고전적 취향’을 지니고 있습니다. 진보를 자체하는 ‘자유사상가’들보다는 그리스의 철학자들이나 중세의 귀족들을 더 가깝게 느낀 것 같습니다. 니체의 이러한 경향은 우리 자신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합니다. 우리는 대개 ‘새로 생겨나는 것들’과 스스로를 동화시키기를 원하죠. ‘혁신’과 ‘개혁’을 좋아하고 어떻든 ‘보수’나 ‘반동’보다는 ‘진보’로 불리고 싶어 하죠. 우리는 ‘새롭다’는 것에서 정당성을 구합니다. 그러나 니체는 새로운 조류에 휩쓸려가면서 만들어지는 검증되지 않은 가치들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니체가 참을 수 없었던 것은 사람들의 경박함이었습니다. 대중의 변덕. 충분히 천천히 사유하지 않는 대중들의 감각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죠. 거기에 그러한 변덕스러운 여론을 정당화하고 최고의 선이라고 하는 지식인들의 허영이 덧붙여집니다. 허영. 허영이란 자기 자신을 타인들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 맞추고자 하는 욕망입니다. 허영 또한 니체가 참을 수 없었던 많은 것들 중 하나였죠. 인간들은 자신들이 무리를 이루고 있다는 것만으로 자기들이 선하다고 여깁니다. 여론으로 도피하는 것이죠.

니체의 비판은 어떤 철학적 이론에 대한 것이 아니라 심리적 메커니즘에 대한 것인 경우가 많습니다. 철학이론을 비판할 때에도 니체는 논증을 통해 반박하는 데 집중하기보다는 그 안에 작동하고 있는 심리를 분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도덕의 계보》에서 니체가 파고들고 있는 것도 ‘심리’죠. 도덕을 형성하고 있는 심리적 메커니즘. 니체는 ‘무리 속에 있고자 하는 자들의 도덕을 만들어내는 심리는 뭘까?’라고 질문합니다. 채운샘은 고귀함, 저속함도 맥락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고귀함

인간은 위계질서를 버린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흔히 이것을 다 버려야 한다고 주장함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계급, 위계, 차이를 만들어내는 방식이 다를 뿐, 그런 것이 없는 사회란 없습니다. 어떤 시대에나 억압이 있고 그 와중에 자유를 구성해내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억압이 다르면 그로부터 도주하는 자유의 양상도 달라질 수밖에 없겠죠.

거리의 파토스.das Pathos der Distanz는 높은 계급에 있는 자가 낮은 계급에 있는 자에 대해서 갖게 되는 복종과 명령, 억압과 거리의 끊임없는 연습의 과정을 뜻합니다. 코드를 생산하는 방식이라고도 할 수 있겠죠. 모든 높은 계급에는 그들에게 요구되는 고유한 무언가가 있습니다. 중세 귀족의 경우 옷을 입고, 말을 하고, 음식을 먹는 독특한 양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말하는 방식(단어, 악센트 등등)조차도 달랐을 것입니다. 이러한 생활양식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과정으로부터 ‘나는 저들과 다르다’라는 감정이 생산됩니다. 그에 비해 지금 우리에게는 도덕을 구성하는 방식, 훈련, 메커니즘이 전혀 없죠.

푸코는 어떻게 학교가 학생들의 품행을 특정한 방식으로 인도하는지를 분석했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모두를 노멀한 방식으로 주체화하는 근대 학교의 메커니즘을 문제화했죠. 서로 비슷해지는 것. 평준화되는 것. 근대는 ‘품행이 소수적으로 길들여진’ 귀족들을 똑같이 평준화시킵니다. 푸코의 가장 중요한 문제의식은 ‘삶의 스타일’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삶의 양식, 실존의 미학적 양식을 만들어내는 것. ‘예술’이란 보편적일 수 없습니다. 미학적 양식의 생산이란 보편적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 아름다움을 깨는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푸코는 존재의 스타일을 만들어내는 것이야말로 지금 우리 앞에 놓인 미학적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ex, 공자. 옷 입고 말하고 먹고 몸가짐 ... 존재의 양식을 만들어낸 인간)

거리의 파토스란, 자신의 삶의 양식을 만들고 있는 자들이 다른 자들에 대해 느끼는 거리감입니다. 정해진 거리, 즉 ‘나는 너랑 달라!’ 라는 상대적 차이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양식을 만들어내고 있는 도중에 발생하는 차이의 느낌. 앞서 설명한 것처럼 이는 부단한 연습으로부터 생겨납니다. 프루스트는 부르주아에게 이러한 거리의 파토스가 근본적으로 결여되어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그의 소설에서 부르주아들은 자신들이 결코 가질 수 없는 뭔가를 가지고 있는 몰락한 귀족 여성들에 대해 질투를 느낍니다. 돈으로 교환 불가능한 무언가. 들뢰즈와 가타리는 자본주의 사회에는 부르주아라는 하나의 계급밖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모두의 욕망이 부르주아적인 배치 속에서 작동한다는 점 때문입니다. 니체 역시 비슷한 말을 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삶의 양식을 구축하는 훈련과 연습의 과정을 결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것을 화폐를 통해 교환 가능한 이미지로 대체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모두 부르주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공지입니다. 

<읽기>
  1. 도덕의 계보와 니체와 철학 4장(원한에서 가책까지).

  1. 도덕의 계보 3논문.


<쓰기>

1.노예의 양심의 메커니즘 정리하기 + 금욕주의적 이상이 왜 허무주의인가?
+ 《지식의 고고학》 상기하기
전체 1

  • 2018-08-28 01:38
    내 삶의 양식을 만드는 일이 곧 내 삶의 위계를 바꾸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