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SF절차탁마 9월 5일 공지

작성자
박규창
작성일
2018-09-02 18:17
조회
180
날이 포근해질 무렵 시작된 절차탁마가 어느새 마지막 학기에 접어들었네요. 《지식의 고고학》부터 ‘도대체 무슨 소리야’는 지금도 여전하지만, 괴롭기만 했던 책이 조금씩 나아졌습니다. 그리고 이 학기가 지나면 절차탁마가 마무리된다고 생각하니 뭔가 아쉽기도 하네요. 다음 프로그램도 꼭 같이 가요!

다음시간 공지입니다. 《지식의 의지에 관한 강의》 2강까지 읽으시면 됩니다. 그런데 이 책은 1970~71년 사이 콜레주드프랑스 강의를 모은 거라서 내용을 정리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서 에세이를 쓰기로 했습니다. 에세이 주제는 ‘인식과 도덕’입니다. 아는 것과 사는 것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각자의 방식으로 쓰시면 됩니다. 큰 틀은 이렇게 가져가고, 세부적인 내용은 각자 정리해서 다음시간에 가져오시는 게 이번 주 숙제입니다. 강의 때는 이걸 가지고 써야겠다고 생각했었는데 갑자기 막막해지네요. 허허. 간식은 저랑 호정쌤이 준비할게요. 그럼 모두들 파이팅입니다~!

들뢰즈는 ‘힘’의 관점으로 《도덕의 계보》를 정리했습니다. 채운쌤은 이렇게 정리한 사람은 들뢰즈 이전에 없었다고(그리고 아마 지금까지도) 하셨습니다. 음... 하지만 전 아직 이게 뭐고, 저게 뭔지 구분이 안 되는 상태여서 그런지 그렇게 크게 감흥이 오지는 않더군요. 흠흠;;

적극적 유형, 영향 받을 수 있는 능력

일단 가장 쉽게 오해되는 지점 중 하나가 반응적 힘을 그 자체로 부정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들뢰즈는 적극적 유형을 소개할 때 반작용과 반작용을 재촉하는 작용의 정상적인 관계라고 말합니다. 푸코식으로 말한다면, 주체화의 과정에는 능동성과 수동성이 공존합니다. 따라서 주체화를 문제 삼는 것은 능동과 수동의 관계를 문제 삼는 것이고, 이는 들뢰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니체가 《도덕의 계보》에서 원한, 양심의 가책 등을 얘기한 것은 반응적 힘 자체에 대한 비판을 위해서가 아니라 반응적 힘이 적극적 힘을 ‘이긴 것’에 대한 분석 결과입니다. 채운쌤은 반응적 힘이란 영향을 받는 것이며, 충격이 가해졌을 때 그 충격을 흡수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반응적인 것이 적극적 유형에 속할 수 있는 것은 영향 받을 수 있는 힘이 바로 반응적 힘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괴로움을 겪어도 그것을 잊을 수 있는 것은 반응적 힘 덕분입니다. 따라서 반응적 힘은 그 자체로 나쁘고, 적극적 힘은 그 자체로 좋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스피노자에서도 살펴봤지만, 우리의 의식은 이미 반응적 힘의 결과입니다. 의식 자체가 반응적이기 때문에 적극적 유형은 생각할 때는 어떻게 영향 받을 수 있을지에 대한 생각도 같이 해야 합니다. 그런데 니체가 비판하는 ‘원한’은 반응적 힘이 적극적 힘을 이기게 합니다. 반응적 힘이 적극적 힘에 의해 영향을 받는 게 정상적인 관계이고 적극적 유형인데, 원한은 이와 반대되는 결과를 만드는 것이죠. 그래서 들뢰즈는 원한의 핵심으로 영향 받기를 중단한 것을 말합니다. 스피노자의 수동성도 이와 연결됩니다. 스피노자가 말하는 수동성이란 반응적인 게 아니라 정념에 휩싸인 것입니다. 수동성이 문제가 되는 것은 자기 감정에 얽매여 전체 구조를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즉, 언제나 같은 방식으로밖에 반응하지 못하는 무능력한 신체입니다.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얘기를 들을 때 공부가 떠올랐습니다. 일단 공부는 선생님한테 배우는 과정을 필요로 합니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겠지만 생활 전반에서 나타나는 변화도 배움에 포함됩니다. 그렇다면 공부할 때 선생님의 가르침을 다양하게 받을 수 있는 신체를 구성하는 일이 필수적일 듯합니다. 그런데 선생님한테 영향을 받으면 그 가르침이 자신의 일상에서도 드러납니다. 선생님의 가르침을 자신을 교정하는 데까지 가야 공부가 됐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강자의 유형으로 힘을 발휘하는 것만 생각했었는데, 영향을 받는 능력도 중요한 지점이었군요!

노예의 긍정

니체를 읽으면서 몇몇 단어들은 특정 의미로 사용됐는데, ‘그러므로’까지도 해당될 줄은 몰랐습니다. 들뢰즈는 고귀한 자와 비속한 자 각각에게 적용되는 ‘그러므로’의 의미가 다르다고 했습니다. 강자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가치의 기준을 만들어내는 자입니다. 그는 누군가에 대해 경멸을 표할 때도 자신에 대한 좋음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즉, 그가 말하는 “나는 선량하다. 그러므로 너는 악의가 있다.”에서 ‘그러므로’는 고귀한 자가 스스로에게 가지는 확신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비속한 자는 누군가를 악으로 규정하고 그처럼 할 수 없는 자신의 무능력을 선으로 포장합니다. 그러니까 비속한 자가 말하는 “너는 악의가 있다. 그러므로 나는 선량하다.”에서 ‘그러므로’는 원한으로부터 나타난 가치의 전도, 주체와 행위를 발생시키는 단어입니다. 이밖에도 ‘……(말줄임표)’도 자주 나오는데, 이것도 어떤 문법적 기능을 하는 걸까요? 자꾸 글자에 관심이 간단 말이죠. 일종의 니체의 글쓰기를 통해 이해하는 니체의 철학이랄까요? 하하하

부정에 의한 주체화의 대표적인 사례는 헤겔입니다. 헤겔은 두 번의 부정을 통해 새로운 역사로 나아가는 변증법을 얘기하는데, 노예가 자신의 주체성을 확립하는 과정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노예는 어떤 행위를 악으로 부정하고, 부정한 행위에 대한 부정을 통해 자신의 도덕을 발생시킵니다. 노예의 도덕이 문제인 이유는 그것이 부정을 자신의 근본으로 삼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생산하고 긍정하는 게 아니라 부정하고, 분리하는 힘. 니체는 대다수의 사람들에 이런 노예의 도덕이 뿌리박혀있음을 봅니다. 어떤 일을 겪을 때 주로 심판자의 시선을 가지게 되는 것도 일종의 노예적 태도입니다. 심판자란 양자 사이를 완벽하게 분석하고 판단할 수 있는 위치를 상정합니다. 이런 심판자가 필요한 것은 양자를 중재할 수 있는 중립적인 것을 원할 때이고, 중립을 상정한다는 것은 판단능력의 부재를 뜻합니다. 이 얘기 들을 때 뜨끔했었습니다. 판단을 남한테 미뤄놓고 일이 잘못되면 그 사람을 탓했던 게 떠올랐습니다. ㅋㅋㅋ 니체는 우리 스스로 윤리를 정초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절대적 가치로 존재하는 선과 악을 전복함으로써 자기 윤리를 창조하는 것. 여기서 철학이 예술과 연결되는 것 같습니다. 미학적 가치가 단지 자극적이고 예쁜 데 있는 게 아니라 사회적 코드의 오작동에서 나온다는 걸 요즘에서야 실감하고 있습니다.

힘의지로 분석하는 정치

니체를 통해 정치도 새롭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정치의 문제는 주로 권력의 획득과 관련되어 얘기됩니다. 하지만 니체에 따르면, 권력을 가진 자도 약자에 속할 수 있습니다. 니체가 마르크스를 비판하는 지점 중 하나가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은 자본가를 상정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은 얼핏 자본가를 공격하는 것처럼 보여도 오히려 공격 대상으로서 자본가를 계속 소환한다는 것이죠. 이것은 기독교에서 신자의 상처를 생산하는 동시에 치료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68세대는 올바름 자체에 대한 탈출구이자 새로운 정치, 혁명의 가능성을 니체에게서 봤습니다. 잘 정리된 것 같지 않지만, 니체는 공자나 노장이 얘기해줄 수 없는 시선을 제공해주는 것 같습니다.
전체 2

  • 2018-09-03 10:42
    반응적 힘, 적극적으로 영향받을 수 있는 능력. 그만큼 자신을 여러 문맥에 위치시킬 수 있는 능력이고, 그 정도의 유연성과 변용능력을 지니려면 정말 철저하게 실험할 수 있어야겠군요.
    무시무시. ^^

  • 2018-09-03 14:13
    에세이 주제에 대해, 어떤 주제를, 왜, 어떤 식으로 풀어내고 싶으신지, 짤막한 프로포잘을 써오세요. 그리고 지난주에 공부했던 원한과 가책의 메커니즘에 대해 말로 정리해오시길! 돌아가며 얘기해 보겠슴다. 도덕의 계보도 가져오시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