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SF 절차탁마 9월 12일 공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8-09-10 12:48
조회
149
1. 인식과 도덕

이번 주에는 각자 에세이 프로포절을 써와서 그 내용을 바탕으로 토론을 진행하고, 푸코의 《지식의 의지에 관한 강의》를 바탕으로 강의를 들었습니다. 뭐랄까, 저는 다른 세미나에서 에세이를 쓸 때 늘 마지막까지 생각하기를 미루다가 꾸역꾸역 써내곤 했습니다. 그래서 에세이도 늘 마음에 들지 않았고, 세미나도 마무리하지 못한 느낌으로 끝나곤 했습니다. 이번 에세이는 시간을 들여서 생각을 밀고 나가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겠습니다.

‘어째서 인식과 도덕을 함께 이야기해야 하는가?’ 채운샘은 이 질문을 상기시켜주셨습니다. 우리는 늘 질문을 합니다. ‘무엇이 좋은 삶인가?’, ‘무엇이 윤리적인 선택인가?’ 대개 이런 질문들을 구체적인 상황에 따라 바꾸어가며 되풀이하고 있죠. 그런데 이런 질문은 ‘좋음’과 ‘올바름’에 대한 최초의 전제로 다시 회귀하거나, (좋음과 올바름 그 자체란 없기에) ‘알 수 없다’라는 무력한 결론에 도달할 뿐입니다. 사실은 어떤 질문도 구성하지 못하고 있음에 다름이 아니죠.

우리가 늘상 던지는 이러한 무력한 질문들과 ‘철학적’ 질문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철학적 질문이란, 인식의 문제와 윤리의 문제를 동시에 건드리는 질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가치를 출현시키는 인식의 메커니즘에 대한 질문 없이 그 결과로서 주어진 답을 전제로 삼아 물음을 던집니다. 때문에 말한 것처럼 질문은 무력할 수밖에 없겠죠. 이와 달리 철학은 인식과 진리의 관계를 문제 삼는 과정을 통해 삶과 윤리에 대해 질문합니다. ‘누구의 도덕인가?’라는 니체의 질문은, 하나의 가치를 그것을 출현시키는 힘의 메커니즘 속에서 파악하는, 인식에 대한 전혀 다른 전제로부터 비롯되죠. 철학이 인식론을 경유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다른 전제로부터 다른 질문들을 구성하기 위해서.

인식과 도덕을 함께 사유해야 하는 이유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떤 사유도 구성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번 에세이가 니체와 푸코의 사유를 통해 우리가 어떤 힘의 메커니즘 속에서 사유하고 질문하고 인식하고 있는지를 되묻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여 채운샘이 던져주신 이번 에세이의 공통된 목표는 질문을 다르게 던지는 일입니다. 늘상 반복해오던 익숙한 구도를 넘어서 자신의 힘으로 질문을 하나 구성해보는 일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2. 지식의 의지에 관한 강의

《지식의 의지에 관한 강의》는 1970~1971년 사이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행해진 푸코의 강의입니다. 채운샘께서는 이 당시 푸코의 작업을 좀 더 이해하기 위해서 이 책의 뒷부분에 수록되어 있는 다니엘 드페르의 〈강의 정황〉과 비슷한 시기에 푸코가 쓴 〈니체, 계보학, 역사〉를 읽어볼 것을 추천해주셨습니다.
푸코의 작업 자체도 흥미로웠지만, 푸코가 다른 철학자들의 사유에서 그들이 전제하고 있는 것들과 그들이 사유를 구성해나가는 방식들을 분석해내는 푸코의 예리함에 더욱 놀라게 되었습니다.

“모든 인간은 본성적으로 인식에 대한 욕망을 갖는다. 다양한 감각에서 오는 즐거움이 그 증거이다. 사람들은 쓸모를 떠나 감각을 그 자체로 즐기는데, 다른 어떤 감각들보다 특히 눈을 통한 감각을 즐기기 때문이다.”(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푸코는 니체의 철학에 관해 이야기하기에 앞서 아리스토텔레스를 불러냅니다. 그리고 그가 ‘인식에의 욕망’을 보편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선언함으로써 어떻게 인식으로부터 신체와 욕망으로 대표되는 외부성들을 밀어내고 있는지를 분석하죠.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선 욕망의 뿌리에는 인식이 있으며, 따라서 ‘인식의 욕망’ 자체가 있음을 전제합니다. 이렇게 ‘인식 욕망 자체’를 전제하는 순간, ‘인식’은 ‘인식에 대한 욕망’의 전제조건으로 부여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에의 욕망에는 고유한 즐거움, 즉 모든 쓸모로부터 해방된 관조적 쾌락이 깃들게 됩니다.

그렇다면, 인식을 향한 욕망에 새겨진 ‘인식 자체’와 그로부터 파생하는 관조적 쾌락이 향하는 곳은 어디일까요? 당연히 진리입니다. 진리는 욕망과 인식 사이의 제3의 요소로 도입됩니다. 이제 ‘진리’와의 관계로부터 구성된, 인식의 욕망과 관조적 쾌락이 형성되고, 인식으로부터 신체와 욕망(외부성)은 그로부터 배제됩니다. 즉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인간은 본성적으로 인식에 대한 욕망을 갖는다”라는 전제로부터 인식과 인식욕망을 진리의 질서에 종속시키는 데 이르게 됩니다.

제가 흥미롭다고 생각했던 것은, 이러한 모든 과정이 욕망을 인식의 지배 아래 두거나, 신체를 정신의 통제 하에 두려는 시도이기 이전에 인식에 대한 욕망 앞에 ‘인식 자체’를 새기는 일이며, 또 인식을 진리의 질서에 편입시키는 일이었다는 점입니다. 가령 우리가 정신과 신체를 떨어뜨려 놓을 때, 그것은 사실 정신에 의한 신체의 억압이 아니라, 그보다 근본적으로 진리의 질서에 사유를 우겨넣으려는 폭력이 아닐까요.

푸코는 니체의 텍스트를 “인식의 형식과 인식의 법에서 인식에 대한 욕망을 해방하려는 시도”(《지식의 의지에 관한 강의》 p.49)로 읽고자 합니다. “모든 인간은 인식을 추구한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전제라면 “인식을 위한 인식은 없다”는 니체의 전제입니다. 이러한 전제로부터 니체는 진리에의 의지를 의심합니다. 인식을 위한 인식이 없다면, 아리스토텔레스가 구축한 진리의 질서가 일종의 오류일 뿐이라면 진리 추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니체는 ‘진리에의 의지’가 사실은 삶에 반하는 ‘금욕적 이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폭로하고자 합니다.

《도덕의 계보》를 읽으며 살펴본 것처럼, 금욕적 이상이란, 원한과 가책으로 중무장한 노예들로 하여금 삶을 견딜만한 것으로 느끼게 만들어주는 환영입니다. 니체는 이것이 허무를 향한 의지이며 삶에 대한 적의를 나타내고 있다고 말하죠. 들뢰즈에 따르면 니체가 말하는 니힐리즘에서 ‘니힐’은 ‘무(無)’가 아니라 ‘무가치’입니다. ‘무’라는 어떤 실체에 대한 의지가 아니라, 삶을 무가치한 것으로 비방하고자 하는 의지. 때문에 니체의 관점에서는 삶을 초과하는 ‘우월한 가치들’을 내세우는 것도 일종의 니힐리즘입니다. 이상주의란 그 자체로 허무주의이기도 한 것이죠. 삶을 찬양하는 것처럼 보이나 사실은 삶을 좀먹고 있는 우월한 가치들, 그러한 가치들에 대한 니체의 통찰과 비판은 인식에 대한 의심으로부터 비롯됩니다. 인식과 도덕의 문제를 계속 붙들고 가야겠습니다.

다음주에는 《지식의 의지에 관한 강의》 3, 4장을 읽고 오시면 됩니다. 에세이와 관련해서는 우선 처음 5주 동안은 쓰려고 하는 주제에 따라서 니체와 푸코의 텍스트로부터 글감을 찾아 정리하는 것이 미션입니다. 간식은 저와 지은누나가 준비하겠습니다.
전체 1

  • 2018-09-11 08:53
    철학을 한다는 것은 인식과 도덕을 문제삼는 일.
    당연한 모든 것들을 향해, 다시 질문을 던져보는 일. 윽. . 고통스러워욥. T.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