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SF절차탁마 9월 19일 공지

작성자
박규창
작성일
2018-09-17 14:38
조회
160


지금 제 옆에는 호정쌤과 영님쌤이 앉아계셔요. 에세이 주제를 생각하느라 고생 중이시네요. 이번 시간에 월요일에 머리를 맞대서 어떻게든 주제를 뽑아내자고 얘기를 했는데, 공지를 늦게 올려서 안 오실까 살짝 걱정했었습니다. ㅎㅎ;; 하지만 오셨네요! 다행입니다!

다음 시간 공지하겠습니다. 일단 시간이 12시로 땡겨졌습니다! 오금희까지 하려면 11시 반까지 오셔야겠네요. 아예 일찍 오셔서 아침부터 같이 공부하죠. ^_^

저번시간에 나눠드린 프린트 중에 니체의 유고집과 《지식의 의지에 관한 강의》 5, 6장을 읽어오시면 됩니다. 한동안 숙제는 계속 에세이 주제 및 개요 설정입니다. 그것도 얼마 안 남았네요. 얼른 잡아야 할 텐데... 주제가 잘 풀리지 않는 분들은 이 대열에 합류하세요. 수요일까지 어떻게든 주제를 뽑을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그리고 숙제는 못해도 화요일 밤에는 올려서 서로의 것을 보자는 선민쌤의 당부도 있었습니다. 간식은 봉선쌤과 윤순쌤께 부탁드릴게요. 그럼 다음시간에 봬요!

 

1.에세이 주제 잡기

소-생 프로젝트에서도 문제의식이 없어서 고생인데, 비슷한 상황을 수요일, 목요일에 걸쳐서 겪고 있습니다. ㅋㅋ 에세이 주제를 설정하는 게 참 어렵네요. 채운쌤은 푸코와 니체가 질문을 제기하는 방식을 보라고 계속 얘기하셨습니다. 《지식의 의지에 관한 강의》 3, 4장에서 푸코는 소피스트가 어떻게 담론에서 배제됐는지를 보여줍니다. 플라톤의 이데아는 절대적 진-선-미입니다. 따라서 플라톤의 논의는 그것이 참된 진리인가, 거짓된 진리인가를 판별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소피스트의 논의는 플라톤의 논의와 아예 층위가 다릅니다. 소피스트는 무엇이 더 참된 것인지를 밝히기보다는 논쟁의 승리를 목적으로 합니다. 전제가 아예 다르기 때문에 플라톤의 철학 안에서 소피스트가 들어설 자리는 없습니다. 여기서 푸코는 플라톤으로 대표되는 그 시대의 담론에서 소피스트의 앎은 배제됐다는 것에 주목합니다. 즉, 플라톤은 이데아를 말함으로써 소피스트를 담론 밖으로 배제한 것이죠. 《지식의 고고학》에서도 나왔는데, 푸코는 어떤 시대에 진리로 허용된 것과 되지 않은 것이 생기는 ‘진리 게임’이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 진리를 따질 수 있는 장과 그 장으로 포섭되지 않은 외부가 생기는 것이죠. 푸코는 안과 밖, 허용되는 지점과 그렇지 못하는 지점을 문제 삼습니다.

푸코의 이러한 문제제기는 니체의 힘의지를 묻는 방식과 매우 흡사합니다. 채운쌤의 에세이 코멘트 중에서 니체식 질문이란 ‘어떤 것을 더 가치 있다고 느끼는 해석 체계와 힘의지를 묻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죠. 지금 푸코가 제기하고 있는 문제는 플라톤 이후 일련의 철학들이 ‘진리를 향하는 것으로서의 지식의지’를 전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니체는 그런 지식의지들이 어떤 가치의 위계로부터 발생했는지 《즐거운 학문》과 《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를 통해서 보여주죠. 따라서 푸코의 문제제기는 그 자체로 니체의 문제의식을 얼마나 소화했는지 보여줍니다. 이슬람을 철학적으로 분석한 이즈쓰 도시히코의 글을 봐도 참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는데, 새삼 문제의식 자체가 공부의 내공이라는 걸 느낍니다.

에세이 주제에 대한 코멘트를 간단하게 정리해보겠습니다.

우선, 우리는 알게 모르게 인식을 도덕적인 차원으로 환원합니다. 진리가 도덕성을 보장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계속 도출해내는 답이 당위가 되어버리죠. 하지만 니체는 어떤 것이 더 진리에 가깝다는 차원이 아니라 그것을 가치 있다고 느끼는 힘의지를 묻습니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힘의지는 자유의지가 아닙니다. 힘의지는 자신을 확장하려는 충동에 가깝습니다. 그 결과로 ‘나’라고 할 수 있는 의식도 구성되죠. 그렇다면 어떤 것을 가치있다(혹은 가치없다)고 느끼는 힘의지를 묻는 것에서부터 글이 시작돼야 합니다. 이것이 고민의 출발점이기도 하죠.

그리고 구체적으로 각자의 가치들의 위계를 보는 것도 필요합니다. 강자와 약자를 나누는 것은 더 가치 있는 진리의 체득이 아니라 어떤 것을 진리라 생각하는 위계의 다름이었죠. 구체적인 사항에서 우리의 선택은 우리가 상정한 가치의 위계에 따릅니다. 따라서 무엇을 더 가치 있거나 혹은 가치 없다고 느끼는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밖에도 각자에게 해주신 채운쌤의 코멘트를 안고 고민합시다~

 

2.소피스트

채운쌤은 《지식의 의지에 관한 강의》를 읽으면서 몇몇 철학자들을 같이 곁들이겠다고 하셨는데, 이번 시간에는 소피스트입니다. 푸코가 3, 4강에 걸쳐 플라톤의 이데아적 앎이 등장함에 따라 소피스트의 앎이 어떻게 배제됐는지를 보여줍니다. 소피스트는 어떤 지점에서 플라톤에게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그들과 결국 다른 앎의 층위일 수밖에 없었을까요?

소피스트가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아테네의 황금기 페리클레스에 이르러서입니다. 철기시대로 진입함에 따라 축적이 발생했고, 축적은 분쟁을 가져왔습니다. 그 분쟁이 밖으로는 페르시아 전쟁,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안으로는 공동체 구성원들 사이의 잦은 소송으로 드러났습니다. 전쟁만큼이나 내부의 소송도 매우 중요한 정치적 사안이었는데, 이때 법정에서 자신을 변론하지 못하는 사람은 바보 취급을 당했습니다. 따라서 아테네가 황금기를 맞이함에 따라 논변의 기술이 더욱 요청되었고, 이는 자연스레 소피스트가 본격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무대를 마련합니다.

하지만 플라톤은 아테네를 망친 요인 중 하나로 꼽을 만큼 소피스트를 비판합니다. 소피스트의 논변은 상대방을 이기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플라톤이 보기에 이러한 소피스트들은 승리를 위해 본질을 외도하는 사기꾼들이었습니다. 플라톤은 소피스트의 교육이 아테네에 성행한 결과 참된 앎인 이데아 대신 여러 거짓된 진리가 인식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플라톤은 소피스트를 진리를 추구하는 자가 아니라 승리를 위해 논리를 흩뜨리는 자들, 궤변론자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플라톤은 소피스트의 교육을 바로잡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우선 플라톤은 철학을 진리에 대한 열정으로 규정합니다. 그의 교육에서 핵심은 이데아를 인식하고자 하는 열망을 갖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열망을 끝까지 잊지 않은 자에게 변론술을 가르치며 통치를 맡깁니다. 즉, 자연세계에 있는 진리를 발견하여 그로부터 사회의 원리를 세우는 것이죠.

그러나 소피스트들의 논변술에 대해 플라톤이 참을 수 없었던 반면에 니체는 철학의 새로운 출구를 발견합니다. 소피스트는 플라톤처럼 정합적이고 보편적 앎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현실에서 사회는 항상 자연과 충돌하고 어긋납니다. 그것은 그들이 감각과 언어를 사유하는 데서 잘 드러납니다. 소크라테스와 그 이전의 자연철학자들은 감각을 불신한다는 점에서 공통됩니다. 대표적으로 헤라클레이토스와 파르메니데스가 그렇죠. 헤라클레이토스는 대립된 것의 투쟁을 사유하기 위해, 파르메니데스는 환상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 감각을 배제합니다. 그러나 소피스트는 진리를 사유하는 데 있어서 감각을 배제하지 않았습니다. 프로타고라스는 “만물의 척도는 인간이다.”라고 말했는데, 이 말은 인간의 가치 판단의 기준은 자신의 신체라는 얘기입니다. 즉, 소피스트에게 있어서 진리란 각각의 신체가 해석함에 따라 분기되는 것이었죠. 언어도 비슷합니다. 이전의 철학자들이 언어를 사물을 투명하게 비추는 것으로 생각할 때, 소피스트는 언어가 사물에서 미끄러지는 지점에 주목했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인식을 진리와 연결시키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차이, 곧 앎의 기본적인 전제의 차이로 이어집니다. 플라톤의 저작에서 소크라테스와 소피스트들의 대화는 공통적으로 소피스트가 자리를 떠나면서 끝납니다. 플라톤은 이러한 장면을 통해 소크라테스를 논쟁의 승리자로 그리려했겠지만, 실제 그들의 논쟁은 타협되지 않는 선에서 끝난 것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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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9-17 19:37
    '각자의 신체가 해석하는 진리' 요 대목이 콕 들어옵니다. 그럼 수요일까지 다들 계속 고생해보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