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n

0620 수업 공지

작성자
수경
작성일
2016-06-16 17:08
조회
6403
토론 시간에 수정 쌤이 대략 다음과 같은 의문?의혹?을 제기하셨죠.
불교에서는 내려놓으라 하지만, 실제로 삶을 살면서 목적을 두지 않고 무언가를 하고, 기대하는 마음 또한 버린다면 삶이 그저 심심하기만 할 것 같다. 우리는 바라고 그것을 이루면서 기뻐하고, 그렇게 살고 있지 않은가…….
공통과제에서도 쓰셨지만 은남 쌤이 비슷한 생각을 하셨지요. 선생님의 노모께서는 하나의 꿈을 위해 무진 애를 쓰셨고 그 꿈이 이루어지고서 삶이 평온해지자마자 병을 얻으셨다는 것, 바라마지 않는 그것을 위해 애쓸 때는 건강하던 분이 이제 아프다는 말씀만 하신다고.

이에 대한 채운 쌤 말씀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불교로는 채 설명되지 않는 인간의 모습이 있으며, 인간 존재가 집착함으로써 살아간다는 사실도 그 중 하나라는.
그 대상이 내가 좋아라 하는 것이든 극도로 미워하는 것이든, 그것에 신경 쓰는 그 힘으로 인간이 살아가기도 한다는 거죠.
<올드 보이>에서 이우진(유지태)이 마지막에 ‘이제부턴 무슨 재미로 살지?’라며 씁쓸하게 웃은 뒤 권총자살을 했던 것, 그리고 그걸 보는 관객들에게 그 결단이 그다지 이해 못 할 게 아니었던 것도 이 때문이겠죠.
어떤 수업에서 채운 쌤께서, 인간은 삶이 평안한 것을 못 견딘다고, 어떻게든 고통을 만들고야 만다고 하셨던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실은 존재하는 모든 것은 克하고 극을 당하는 그런 관계망 안에 있는 법, 고로 고통 없는 세상을 꿈꾸는 것 자체는 자신의 무능력을 증명하는 것이며 죽음을 갈망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불교는 인간의 존재 조건 자체를 무시하는 것인가? 도저히 불가능한 지평을 꿈꾸는 것인가?
— 이에 대해 이렇게 반문할 수 있답니다.
나는 집착하고 기대하고 불안해하는 바로 그 힘으로 산다… 하지만, 하지만 아무리 이를 반복해도, 아무리 계속해도, 계속 기대하고 계속 불안하고 계속 불만족스러운 것 말고 무엇이 더 나를 기다리는가?!(채운 쌤은 이게 조울증 아니냐 하셨지요) 만족과 슬픔 사이를 정신없이 오가는 이 마음 말고 우리 삶에 다른 정서는 정녕 있을 수 없는 것인가?

불교 철학은 바로 이 지점에서, 그토록 지독한 반복의(윤회의) 고리를 끊고자 합니다.
집착한다는 건 무엇인가? 채운 쌤에 따르면 사실 그건 대상에 대한 집착이 아니라 나에 대한 집착이랍니다.
내 마음에 드는 물건이 곁에 있었으면 좋겠고, 내가 아끼는 저 아이가 잘되었으면 좋겠고, 내가 지지하는 의견이 수렴되었으면 좋겠고, 기타 등등.
고로 근본 문제는 집착하는 대상을 버리고 말고의 여부가 아니라(집착 대상은 애쓰지 않아도 계속 버려지고 갱신된다는 것, 우리도 경험으로 잘 알지요) 소유 대상에 투사된 我를 보는 것, 그것을 내려놓는 것에 있게 됩니다.
물론 깨달은 자도 매번 감정을 느끼고 매번 판단을 내리지요. 문제는 그것을 자기와 동일시할 때 — 기대치에 이르렀을 때 자신이 인정받았다는 만족감을 누리고, 그렇지 못했을 때 자신이 훼손당했다고 여기며 번뇌를 생산하는 데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관건은 일희일비하지 않은 채로 능동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역량에 있다는. 상 없이 행하고 기대 없이 주는 사람이 그럴 수 있다는.

지난 수업에서는 금강경 25~28分까지 함께 읽었습니다. 수업은 재미있었는데, 정작 혼자 읽을 때는 묘하게 게을러지고 오만해져서 꽤 힘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제 얼추 익숙해졌고, 얼추 다 알겠다는 생각 때문에 긴장감 없이 책을 읽게 되더군요.
읽지 않은 경전이 훨씬 많은데 벌써부터 이러면 안 될 것 같아요. 채운 쌤의 당부대로, 우리가 현재 공부하고 있는 것, 몰두하고 있는 문제들과 결합해 읽어야 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25. 化無所無分 (교화하되 교화하는 바가 없음)

須菩提 於意云何 汝等 勿謂 如來作是念 我當度衆生 須菩提 莫作是念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너희들은 여래가 이런 생각을 하되 ‘내가 마땅히 중생을 제도한다’고 말하지 말라. 수보리야, 이런 생각은 하지 말지니
何以故 實無有衆生如來度者 왜냐하면 실로는 여래가 제도할 중생이 없음이니,
若有衆生如來度者 如來 卽有我人衆生壽者 만약 여래가 제도할 중생이 있다 하면 여래는 곧 아와 인과 중생과 수자가 있음이니라.
須菩提 如來說有我者 卽非有我 而凡夫之人 以爲有我 須菩提 凡夫者如來說 卽非凡夫 是名凡夫 수보리야, 여래사 설하되 아가 있다는 것은 곧 아가 있음이 아니거늘 범부들이 이를 아가 있다고 여기느니라. 수보리야, 범부라는 것도 여래가 설하되 곧 범부가 아니고 그 이름이 범부니라.

“여래가 제도할 중생이 없다” 이 말이 핵심이죠.
여래와 중생의 구분이 없다, 이 말은 물론 앞서도 되풀이해 들었고, 이제 그냥 그러려니 할 수 있습니다만 막상 설명하려 들면 말문이 좀 막합니다.
게다가 그냥 중생이 따로 없다는 게 아니라, 이번에는 “제도할 중생이 없다”고 말하고 있잖아요.
이에 대한 채운 쌤 설명이 재미있었습니다. — 부처가 구원한 건 중생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다. 그런데 부처가 구원받을 수 있었던 까닭, 그러니까 그의 깨달음의 내용은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모두가 부처라는 사실이다. 내가 부처인 게 아니라 세계 안에 있는 모든 존재가 이미 불성을 가지고 있으며 부처 안에 있고 부처 될 수 있는 이들이라는 것.
때문에 불교에서는 제도할 중생, 교화할 중생이랄 게 없습니다. 만약 한 인간이 깨닫는다면 그것은 타인의 교화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 믿음과 자기 전환 역량에 있답니다. 이를 불성, 선근이라는 말로 표현하는 거죠.
부처는 우리가 믿어야 할 신이 아니고, 보살은 우리를 이끄는 목자가 아닙니다. 그들은 단지 깨달은 바대로 살아내고 있으며, 또 살아내는 바를 이야기할 따름입니다.
붓다는 부처의 삶을 보여준 것뿐이고, 부처의 세계 안의 모든 존재들 또한 그렇게 살 수 있음을 보여준 것뿐이랍니다.

한 가지 더. “여래가 설하되 我가 있다는 것은 곧 아가 있음이 아니거늘”이라는 구절에 대한 육조의 설명을 봅시다.
“여래가 아가 있다고 설한 것은 자성이 청정한 常樂我淨의 我”라는군요. 그러니까 我의 무조건적 부정과 배제가 아니라 다른 종류의 我가, 我相과 구분되는 我가 여기서 사유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我란 어떤 것인가?
채운 쌤 설명에 의하면 자신이 겪는 연기 조건을 하나도 부정하지 않는 그런 아, 그것이 常樂我淨의 아랍니다.
즐거움을 즐거움이라고 분별해 매달리지 않고, 고통을 고통이라고 분별해 배척하지 않는 것, 그것을 그것 자체로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여래가 ‘있다’고 말하는 ‘아’입니다.
나는 물론 모든 일을 겪습니다. 겪는 내가 분명 있습니다. 그런데 이 나란 존재가 항시 분별하고 배척만 일삼는 건 아닙니다.
닥쳐오는 인연들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겪을 수 있는 나는 곧 상 없이 존재하는 나에 다름 아니라는 놀라운 사실. 고로 아와 무아는 다른 것이 아니라는 사실.
고로 여래가 말하는 아란 개체적 존재이기보다는 우주적 존재, 우주를 이해하고 받아들인 존재라 이해해도 될 듯합니다.

26. 法身非相分 (법신은 상이 아님)

須菩提 於意云何 可以三十二相 觀如來不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가히 三十二상으로써 여래를 볼 수 있겠느냐.”
須菩提言 如是如是 以三十二相 觀如來 수보리가 말씀드리되 “그렇습니다. 그렇습니다. 三十二상으로써 여래를 볼 수 있습니다.”
佛言 須菩提 若以 三十二相 觀如來者 轉輪聖王 卽是如來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수보리야, 만약 三十二상으로 여래를 관한다 하면 전륜성왕도 곧 여래이리라.”
須菩提白佛言 世尊 如我解佛所設義 不應以三十二相 觀如來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제가 부처님의 설하신 뜻을 이해하기에는 응당 三十二상으로써 여래를 관할 수 없습니다.”
爾時 世尊 而說偈言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그때 세존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만약 색신으로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써 나를 구하면 이 사람은 사도를 행함이라. 능히 여래를 보지 못하리라.”

수보리가 말을 번복하는 게 재미있죠. 깜빡 졸다 깬 수보리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친근감(^^)도 듭니다.
이야기를 해주면 좀 이해하는 것 같다가도 금세 원래대로 돌아가고, 그러면 스승은 그런 제자를 또 깨워주고… 스승과 제자 사이에 흔하디흔한 일이죠.

색신으로 보거나 음성으로 구하면 사도를 행하는 것이라 했는데, 채운 쌤은 여기서 음성을 언어 내지 사상이라 풀어주셨습니다. 그랬더니 이해가 더 분명해지네요.
붓다를 어떤 이미지에 붙들어두는 것, 그리고 붓다의 말을 듣고 그 말에 집착하고 그것을 도그마화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부처와 가장 먼 것, 사도라 합니다.
채운 쌤 풀이에 의하면 여기서 사도란 붓다와 그의 말씀을 실체화하는 것!

27. 無斷無滅分 (단멸이 없음)

須菩提 汝若作是念 如來不以具足相 故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須菩提 莫作是念 如來 不以具足相 故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수보리야, 네가 만약 이런 생각을 하되 ‘여래는 구족한 상을 쓰지 않는 연고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하느냐. 수보리야, ‘여래는 구족한 상을 쓰지 않는 연고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이런 생각을 하지 말라.
須菩提 汝若作是念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者 說諸法斷滅 莫作是念 수보리야, 네가 만약 이런 생각을 하되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한 사람은 모든 법이 단멸했다고 말하는가’한다면 이런 생각도 하지 말지니.
何以故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者 於法不說斷滅相 무슨 까닭인가 하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한 사람은 법에 있어서 단멸상을 말하지 않느니라.

채운 쌤 질문 — 相에 사로잡히지 않는다는 건 어떤 것인가?
주의해야 할 것은 불교가 말하는 것은 상 짓기를 금지하는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상에 ‘사로잡히지 말라’는 데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루하루 한시한시 살고 관계 맺으면서 도대체 상이 만들어지지 않을 도리가 없지요. 상대에 대해, 세계에 대해, 나의 하루에 대해 우리는 어떤 상을 만들고 그에 따라 일을 꾸려나갑니다. 삶은 헤아릴 수 없는 상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어요. 상이 만들어지는 순간, 내가 상에 들러붙는다는 게 그것입니다.
상이라는 것 자체가 세계와 만난 내 신체 위에 남은 이미지들이니, 결국 그 상에는 내가 투여되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상을 만든 뒤에도 재깍재깍 이것이 내가 만든 상에 불과함을 알고 그 상에 얽매이지 않으면 좋을 텐데, 보통은 그게 안 되지요.
그 상이 진실이라고, 내가 맞게 본 것이라고 고집 피우게 됩니다.
태생적으로 상이란 쉬이 고착되기 마련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내 몸뚱이에 의해 탄생된, 따라서 내가 보기에는 오류 하나 없는 해석, 그게 상이니까요. 그래서 내가 만든 상이 비판 받으면 마치 나 자신이 공격받은 것처럼 발끈하게 되는 거죠.
채운 쌤에 따르면 불교에서는 아예 아무 것도 없다고도, 상을 절대 짓지 말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다만 매번 상을 깨는 것, 그럼으로써 상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 그것이 관건이랍니다.

지금까지 이런저런 공부를 하면서 개인적으로 인상 깊었던, 혁명에 대해 몇 가지 코멘트가 있습니다.
르페브르는 맑스가 생산양식을 논한 것에 덧붙여 혁명이란 공간을 바꾸는 것이라 했습니다. 들뢰즈는 욕망을 바꾸는 것이라 했습니다. 채운 쌤에 따르면 불교적 지평에서는 상을 계속 깨가는 과정, 그것이 혁명이 됩니다.
하나의 상에 고착되지 않는 것, 일련의 상들을 생산하는 매커니즘을 내면화하지 않는 것, 어떤 특정한 상에도 얽매이지 않는 것.
혁명이 하나의 과정이라는 것을 이처럼 불교에서 또 한 번 상기하게 되네요.

28. 不受不貪分 (받지도 않고 탐하지도 않음)

須菩提 若菩薩 以滿恒河沙等世界七寶 持用布施 若復有人 知一切法無我 得成於忍 此菩薩 勝前菩薩所得功德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항하의 모래수와 같은 세계에 가득 찬 칠보를 가지고 보시하더라도 만약 또 어떤 사람은 일체법이 아가 없음을 알아서 인을 얻어 이루면 이 보살은 앞의 보살이 얻은 공덕보다 수승하리라.
何以故 須菩提 以諸菩薩 不受福德故 무슨 까닭인가. 수보리야, 모든 보살은 복덕을 받지 않는 까닭이니라.”
須菩提白佛言 世尊 云何菩薩 不受福德 須菩提 菩薩 所作福德 不應貪着 是故說不受福德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어찌하여 보살이 복덕을 받지 않습니까.” “수보리야, 보살의 지은 바 복덕은 응당 탐착하지 않음이니 이 까닭에 복덕을 받지 않는다고 말하느니라.”

짧게 두 가지 노트.
하나. 위에서 쓰인 忍을 ‘참다’로 새기면 좀 곤란해집니다. 채운 쌤 설명에 따르면 이는 法忍. 마음을 지켜보고 탐심과 진심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 힘을 가리킨답니다.
둘. 항하의 모래 수만큼 많은 칠보로 보시한 자보다 인을 얻은 보살의 공덕이 수승한 이유는 ‘복덕을 받지 않아서’라는군요.
재물 보시는 (보시한 자의 마음 안에서)주고받음이 있으나 보살의 지혜 보시는 그렇지가 않다고 전에 수업 시간에 들었던 것 같은데(…아닌가?) 이와 연관되는 듯합니다.
어째서 보살은 복덕을 받지 않는가? 그건 보살들 자체가 ‘존재가 이미 복덕’임을 깨달은 자들인 탓이라는 게 채운 쌤 설명이었습니다.
세계 안의 모든 것은 서로 주고받음이 있기에 존재할 수 있지요. 이를 연기라고, 공이라고 해야 할 테고, 이를 깨달은 자를 보살이라 말할 수 있을 겁니다.
보살은 그러므로 특별히 뭔가를 주었다거나 받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자,  다음 주는 다시 인지과학입니다. 4부까지 읽어오심 되고, 감사하게도 현옥샘께서 발제를 맡아주셨습니다 >.<
후기는 수엉, 간식은 은남쌤~
그럼 모두들 담주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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