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n

0718 수업공지

작성자
수경
작성일
2016-07-16 16:10
조회
430

아고, 공지가 또 늦었습니다>.< 죄송하고 죄송합니다.


지난 시간과 돌아오는 월요일에는 이어서 달라이라마의 <반야심경>을 읽기로 했죠.
지난 시간에는 책 전반부를 함께 봤는데, 달라이라마는 불교의 전반적 이해를 쉬운 언어로, 압축적으로 설명해놓았습니다. 덕분에 쉬운 이야기라고 ‘착각’하기 쉽다는 게 함정.
불교는 언뜻 들으면 그냥 그러려니, 좋은 말씀이로다 하기 쉽지만, 실상 다시 이를 설명하려 하면 쉽게 입이 안 떼어집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그냥 空이라고, 苦라고 하는 이 말을 21세기 대한민국에 사는 내가 어떻게 풀어야 할지.
에세이를 쓸 때도 결국 관건은 이런 게 아닌가 합니다. 뜬구름 잡는 이야기 말고, 구체적 삶의 풍경 안에서 우리는 어떻게 고통과 깨달음을 사유할 수 있는가, 이 시대에 보살이란 어떤 존재일 수 있는가……


그런 점에서, 개인적으로 지난 주 채운 쌤 말씀 중 가장 인상 깊게 남아 있는 게 ‘보살 맑스’(^^;)였어요. 이, 이거슨 놀라운 믹스매치!


달라이라마에 따르면 우리가 겪는 번뇌들은 모두 우리의 지성 때문에 만들어진 거라지요.
요동치는 마음을 잘 다스리는 지성이란 게 어디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지성이 곧 마음의 문제래요.
왜냐하면 인간은 지성을 통해 자기 相을 짓고 그것을 통해 세계를 재단하고 그러면서 남의 相을 비판하니까요.
기억하고 예측하고 기대하는 것, 그런 와중에 희망으로 가득 찼다가 그 마음이 다 무너지는 것, 이게 다 그 놈의 지성 때문이라는군요.
자, 불교에서는 바로 이런 중생의 상태를 가리켜 無明이라 칭합니다.
자신이 들뜨고 기쁘고 환호작약하는 것의 근저에 있는 것이 결국 자기 손으로 지은 상들에 의한 것임을 알지 못해, 살아가는 내내 이리저리 상을 바꾸기만 할 뿐 상 짓는 것 자체에 대해 묻고 사유하지 못하는 것, 이게 우리의 근본적 어리석음이라는 거죠.
인간의 지성, 그것은 곧 인간의 어리석음!


채운 쌤은 이를 ‘마비’라 표현하셨어요. 자기가 만든 상에 고착되어 있으나 그에 대해서도 인지하지 못하는 상태, 무감각하지만 무감각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그런 상태, 그게 곧 마비입니다.
불교 철학에서는 인간의 마비 상태를 푸는 것을 깨달음과 자유라고 말합니다.
자, 여기서 깨달음이란 그럼 무엇인가?
채운 쌤은 종교적이고 신비적이고 우리 일상과 동떨어진 데에서 이를 찾지 말 것을 거듭 당부해 오셨는데, 지난 시간에는 위대한 철학이 보여준 것이 모두 그것이라 하셨습니다.


우리는 아Q처럼 끊임없이 새로운 상을 만들고 상과 상 사이를 떠돌면서 고통을 해소하고자 하지만 그것으로는 고통이 해소될 턱이 없지요.
그렇게 해봤자 결국 우리는 자신이 만든 상에 놀아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럼 무엇을 할까? 니체가 아주 좋은 모델이 되어줍니다.
그가 사랑한 ‘망치 든 철학자’ 이미지를 떠올려봅시다. 철학자는 망치를 들어야 합니다.
그때 망치의 타격점은, 그의 생각과 상반되는 이념/주장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이런저런 생각들이 만들어지는 토대입니다.
그가 서 있는 지반, 그 존재감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로 자연스러운 바로 그 장소, 그것을 의문에 부쳐야 한다고 니체는 생각했지요.
바로 거기에서 위대한 철학자와 대중의 결정적 차이가 드러납니다.
대중은 전제를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연스레’ 그 위에 있으면서 반복해 상을 만들고 있을 따름입니다. 그게 옳다고 믿어 의심치 않으면서요.


소위 ‘진보’를 주장하는 많은 분들은 열심히 자신의 삶의 방식을 고민하고 있지요.
먹거리, 건강, 교육, 주거 문제 등등을 자신의 정치적 신념과 연결해 고민하고 실제로 실험하는 이들이 점점 늘고 있는 추세입니다.
그런데 니체 식으로라면 우리는 우리가 믿고 있는 그 ‘진보적임’ 자체를 질문해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시 ‘나는 진보적이야’ 내지 ‘진보적인 삶이 좋은 삶이지’라는 전제 위에서 수많은 상들만 만들며 아상을 키우고 있는 건 아닌지, 애착하는 것들을 자기 삶에서 무수히 늘어놓으며 살고 있는 건 아닌지 말이죠.
진보의 이름으로 자녀들에게 이런저런 양질의 교육을 제공하고, 진보의 이름으로 몸에 좋은 화장품을 사 쓰고 몸에 좋은 먹거리를 마련하고, 이건 붓다의 삶의 방식과 멀어도 한참 먼 것이라 느끼는 게 비단 저뿐일까요? -_-


채운 쌤 말씀대로, 이래서야 일시적으로 눈앞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야 있겠으나 죽을 때까지 비슷비슷한 상황들과 반복적으로 마주칠 수밖에 없겠지요.
그러니 관건이 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전제를 부수는 것, 가치의 가치를 문제 삼는 것, 질문을 질문하는 것!
니체와 맑스의 사유가 보여준 것이 바로 이것이랍니다. 하여, 우리 시대의 보살은 니체이고 맑스이고 푸코일 수 있다는 이 놀라운 결론 ^^; 게다가 이렇게 자신의 전제를 의심하고자 하는 우리들, 공부하는 사람들이 곧 깨달음을 구하는 사람들이라는 결론까지.


그런 의미에서, 마지막 수업 <반야심경>은 그야말로 초발심을 가지고 함께 읽어보아요.
가슴 따뜻해지는 감동 같은 거야 필요 없지만 각자 충격적인(응?) 공통과제 가지고 만나면 아주 좋겠지요.
그날은 종강이니만큼 간단하게라도 뒷풀이 합시다~
간식은 은하쌤께 부탁드렸습니다. 후기는 명!애!쌤!
다음 주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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