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n

이번 학기 수업 쫑!

작성자
수경
작성일
2016-07-23 13:53
조회
400
 

7월 18일, 드디어 이번 시즌 불교n 끝났습니다. 돌아오는 25일 한 주는 에세이 준비에 박차를 가하시고, 그 다음, 8월 1일에 에세이 들고 만나요.
다들 한 학기 수고하셨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달라이라마의 <반야심경>의 남은 절반을 읽고 함께 이야기 나누었지요. 마지막 시간이니만큼 다시 한 번 空, 無我, 業 등의 개념을 정리해볼 수 있었습니다. 살짜쿵 정리해볼까요.

空 : <반야심경>이 말하는 바는 공과 색이 서로 다르지 않다는 것, 공은 늘 형상으로 드러나는 것, 형상과 함께 드러나는 것이라는 사실이지요.
지금 감각되는 모든 형상들은 그 자체의 본질의 발현이 아니라 특정 시공간 안의 인과에 의해 일시적으로 빚어진 것인바, 기대고 있던 어느 하나만 변모해도 금세 그 모습이 흐트러지죠.
태어났던 아기가 늙고, 건강했던 청년이 불구가 되고, 손에 끼고 있던 반지가 사라집니다.
우리는 이에 대해 분노하거나 슬퍼하지만, 불교에서는 이것이 곧 세계의 실상이라고 말하지요.
형상은 존재합니다. 단, 그것은 공의 현현인바, 절대 단독적으로 실존할 수 없습니다.

無明 : 이와 같은 세계의 실상을 알지 못하는 근본 무지가 무명입니다.
대개의 인간은 생멸하는 형상들을 보며 相을 만들고 그 상들로 자기 세계를 채워나가 그것을 믿습니다.
그러니 그 믿음체계가 훼손되는 것을 견디지 못해 고통 받지요. 달라이라마의 말씀 중 인상적인 이야기가 있었지요.
이 같은 중생의 근본적 무지는 단지 ‘알지 못함’의 상태가 아니랍니다. 이런 경우는 차라리 쉽지요. 그렇담 알면 해결될 테니까요.
문제는, 중생이 처한 것이 적극적 무지라는 데 있습니다. 중생은 ‘잘못 알고’ 있습니다. A는 A이고, B는 B라고, 언제까지나 그렇다고 고집합니다. 이를 ‘아는 것’이라 생각하니 버리기도 어려운 거지요.
불교는 결코 지성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채운 쌤 말씀이 인상적이었지요.
인간이 공부해야 하는 이유, 그것은 하나의 해석 체계를 고집하지 않기 위해서, 무한히 변하는 세계를 무한하게 인식할 수 있기 위해서랍니다.
이 같은 공부와 더불어 지관 등의 수행을 해나가면서 지혜를 얻고 마침내는 그 지혜마저 넘어설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때 인간은 세계의 참다운 얼굴을 ‘느낄’ 수 있다고 해요.

輪廻 : 아직 깨닫지 못한 중생이 무지의 상태에서 상을 계속 만들어내는 것, 상으로 또 다른 상을 거푸 낳는 것, 이것이 業이 됩니다.
업의 연쇄, 이를 윤회라 일컫고요.
고로 업이 모두 소멸되면 열반해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 하는데, 이는 철저하게 공성을 깨달은 경지를 말한답니다.
어디 다른 세계에서 신선놀음 하는 게 아니라 이 세계에서 중생과 함께 있되 공성 위에서 더불어 살고 행하는 것, 이것이 보살의 삶이라지요.

慈悲 : 채운 쌤 말씀대로 깨달은 자가 행하는 자비한 그저 ‘잘 대해주는 것’과는 아주 다르지요.
철저한 깨달음 위에서, 그 깨달음에 중생이 함께 이르고, 중생과 더불어 해방되기 위한 모든 말과 행동들, 이 모두가 보살의 자비가 됩니다.
그러므로 이미 자비는 이타/이기의 이분법 너머의 것이 될 텐데, 왜냐하면 佛法 안에서는 自他의 구별이 없기 때문입니다.
보살은 바로 이를 깨달은 사람으로서, 이와 같은 ‘복음’을 중생에게 전하는 사람이지요.

모두 기억하고 계시겠지만 이번 에세이 주제는 ‘보살행’입니다.
보살이라고 하면 아직 책에서 읽고 수업 중에 들은 언어로 단 몇 줄밖에 쓰지 못하는 우리지만(^^;) 지금까지 공부해온 것을 정리할 겸 한 주 동안 정진해봅시다.
식상한 말이지만, 유종의 미!!

그럼 월요일 1시에 만나요. 간식은 각자 알아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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