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SF절차탁마 5월 9일 공지

작성자
호정
작성일
2018-05-06 01:48
조회
156
벌써 지식의 고고학을 마무리하는 시간이 왔네요.

오늘도 모지리들의 중구난방 좌충우돌 토론과 그 스승님(모지리들의 스승님을 어떻게 칭해야 할지? ㅎㅎ)의 깔끔쌈빡한 정리강의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많은 것들이 이해 안 되지만, 반복되는 학습 속에서 용어에 대해 조금씩 익숙해지고, 개념에 대해 감만 잡아가고 있습니다. 저 멀리로 푸코의 윤곽만 어슴푸레하게 보이는 가운데, 흐릿한 연기 속에서.

특히, 초험적 장이라는 개념이 잘 이해가 안 됐었는데, 모지리들과 스승님의 문답을 통해 핵심을 캐치한 스승님은 우리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푸코가 왜 초험적 장이라는 말을 했을까? 그걸 통해 뭘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책을 읽을 때 저자의 모든 의도를 다 이해하려고 하는 쓸 데 없는 노력으로 지레 지치지 말고, 저자가 뭐에 대해 어떤 식으로 질문을 던지는가를 잡아내야 한다고요. 어떤 것을 새롭게 질문하나? 이 개념이 우리에게 갖는 효용성을 알아야 한다고요.(성질 급한 분들을 위하여 미리 스포 한 자락 깔아 놓습니다. 푸코는 초험적 장이라는 개념을 통해 생성과 발생의 차원을 얘기하고 싶었다네요.)

앎이란 앎에의 의지

푸코는 도대체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했습니다. 인식, 지식이란 뭘까? 이것은 인식행위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고, 앎 자체에 대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또한 이는 니체적인 질문이기도 합니다. 니체는 가치의 가치를 묻는 철학자입니다. 가치의 가치를 묻는 계보학은 기원을 파고들어갑니다. 만들어진 가치로부터 무엇이 옳은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그 가치의 체계들이 어떻게 만들어졌나를 묻습니다.

앎이란 앎에의 의지입니다. 앎에의 의지란 앎을 목적으로 삼는 의지가 아닙니다. 이는 오히려, 니체의 권력의지와 상통하는 것으로 모든 진리, 모든 힘은 중립적이지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리에의 의지에는 이미 어떤 것을 진리로 상정하는 가치평가가 담겨 있습니다. 니체와 푸코에게 진리는 앎들을 구성하는 다양한 힘관계들의 투쟁의 결과로 나타난 것입니다. 니체의 힘의지, 푸코의 진리에의 의지는 모두 의지에 내재되어 있는 힘의 질이 긍정성인지, 부정성인지를 묻고 있습니다.

푸코가 과학에 대비해서 지식이라는 개념을 쓴 이유는 지식의 실천성 때문입니다. 과학과 지식은 대립이나 참거짓의 관계가 아닙니다. 권력관계 속에서 여러 투쟁하는 지식 중에 어떤 투쟁하는 하나가 과학으로 현실화됩니다. 언제든 과학으로 현실화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에서 지식은 그 자체로 실천적입니다. 어떤 지식이 진리로 판별 받으려면 최소한, 진위를 판별 받을 수 있는 과학의 장에 들어가야 합니다. 과학이 먼저 있고, 그것에서 배제된 것이 미신이 아니라, 어떤 것이 과학으로 만들어지는 과정 자체가 특정한 것을 미신으로 배제하는 과정을 동시에 함축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리는 그런 배제의 과정에 의해 진리로 획득된 것일 뿐입니다. 진리의 장에 들어오지도 않은 여러 차원. 과학의 차원으로 승격되지 못 한 지식의 차원은 과학의 차원으로 승격한 앎들과 외부에서 끊임없이 투쟁을 벌이는 것으로 여전히 항존합니다.

초험적 장의 유용성

자, 그럼 애초의 질문으로 돌아가서, 푸코는 왜 초험적 장이라는 말을 했을까요? 초험적 장 없이는 생성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꽃을 보고 냄새 맡고 만져볼 수 있지만, 지금 이 꽃을 이 꽃으로 존재하게 한 바람과 빛, 토양 등 꽃을 형성한 조건은 직접 경험할 수 없습니다. 이 경험의 조건들을 초험적 장이라고 합니다. 이 조건들은 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꽃과 무관한 것도 아닙니다. 꽃이라는 사건을 일어나게 하는 조건은 꽃과 다른 초월적 지평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매번 구성됩니다. 이렇게 구성된다는 것은 다른 조건 속에서는 다르게 구성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지금 이렇게 살고 있지만, 조건이 달라지면 다르게 살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초험적 장이라는 개념의 유용성입니다.

죽음을 예로 들어볼까요? 모든 시대가 죽음에 대해 모든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죽음에 대한 우리 시대의 담론은 중세의 죽음 담론과는 다릅니다. 우리 시대를 관통하고 있는, 죽음을 둘러싼 담론적이고 비담론적인 여러 실천과 담론들. 그 희박한 담론 속에서 죽음에 대한 우리의 의식, 느낌이 형성됩니다. 죽음은 그러한 담론들, 제도들로 현실화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담론이나 제도로 아직 현실화되지 못 한 죽음에 대한 또 다른 담론들이 있습니다. 그것들은 우리 시대의 굵직한 담론적 형성물로 우뚝 솟지 못 했지만, 죽음에 대한 개별적인 담론들로 여전히 우글대며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 장이 바로 초험적 장입니다.

그것이 특정한 방식으로 현실화되지 않았지만, 이 장이 필요한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언제든 변환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참이라고 알고 있는 것들은 절대적으로 참인 것이 아니라, 특정한 배치 속에서 진리값을 갖는 것처럼 현실화된 것일 뿐입니다.

우리는 모든 걸 인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인식하도록 하는 특정한 조건 아래서만 인식할 수 있습니다. 푸코와 들뢰즈는 이 특정한 조건, 즉 시공간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형성되었다고 했습니다. 푸코는 시공간을 실증적(경험적) 차원과 연결해 설명하려 하였고, 들뢰즈는 발생이라는 측면과 연관시켜 사유하려고 하였습니다. 둘 다 시간이라는 문제를 발생과 생성의 개념에 입각해 물었지만, 들뢰즈에게는 생성과 차이가, 푸코에게는 역사가 더 중요했지요.

푸코의 초험적 차원은 경험적 차원, 실증성의 지평과 다른 얘기가 아닙니다. 그는 초험성을 역사성과 결합시켜 설명하고자 하였습니다. 정신분석학이 과학으로 승인되는 지점에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아동살해라는 역사적 사건이 있었습니다. 정신의학자들이 아동살해의 원인을 범죄본능, 살해충동으로 설명하였고 이것이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면서 정신의학은 정신분석학이라는 과학의 지위를 얻었습니다. 새로운 담론은 우발적으로 일어난 역사적 사건에 의해 힘관계가 바뀐 결과로 형성된 것이지, 특별한 개인에 의해 형성된 것이 아닙니다. 역사적 지평 속에서 그런 사건과 계기를 분석하는 것이 실증적 연구입니다. 정신의학은 헛소리였다가 인간의 알 수 없는 행위를 설명하는 중요한 문턱을 넘어가는 순간 실증성의 문턱을 넘어간 것입니다.

담론적 실천

담론의 형성이란 기존의 담론들과의 투쟁입니다. 이 투쟁을 통해서 어떤 특정한 대상과 더불어 대상에 대한 앎이 형성됩니다. 이러한 담론적 실천을 통해 대상 자체가 실현됩니다. 형성되어 있는 담론들에 대한 문제 제기 없이 새로운 담론은 나오지 않습니다. 지배적으로 작동하는 담론에 대한 문제 제기로서 출몰하고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아주 많은 담론적 형성의 장들이 있고, 그 중 일부만이 과학, 제도가 됩니다. 그러나 이는 고정된 것이 아니고 어떤 계기만 주어지면 언제든 바뀔 수 있습니다.

진리의 포섭과 배제의 과정을 분석해보면 앎 자체에 내재한 이데올로기, 즉 권력의 문제를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지식이 어떤 이데올로기로 작동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어떤 것을 과학으로 지키고자 하는 것 속에는, 이미 그것만을 과학으로 지키고자 하는 힘의지가 있습니다. 그것이 이데올로기입니다. 모든 지식은 그 안에 이미 이데올로기적인 지평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고고학이란 하나의 지식이 어떤 배치 속에서, 어떤 배제의 과정을 거쳐 과학으로 승인되었는지를 묻습니다. 우리가 뭔가를 알고 있다고 할 때 우린 이미 우리를 알게 해준 담론적, 비담론적 형성물 위에 놓여 있습니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선택적으로 뭔가를 얘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담론도, 주체도 희박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현실화해서 섬처럼 과학으로 떠오른 것이 아니라, 그렇게 떠오르기 이전의 차원. 과학과 과학 아닌 것의 투쟁, 역동적인 배치의 장입니다. 실천은 바로 그 지점에서 나옵니다. 과학적인 위치를 얻은 담론들과 끊임없이 대항하는 담론들을 만들어내는 것. 이것이 바로 담론적 실천입니다.

고고학은 현재의 진단학

구조주의는 사유의 역사를 초험적 예속으로부터 해방시켰지만, 역사를 부정했기 때문에 구조를 역사와 무관하게 주어진 구조에 가두고 말았습니다. 푸코의 관심은 시원으로의 회귀나 과거의 복원이 아니라 현재적 실천에 있습니다. 현재의 문제를 어떻게 진단할 것인가? 즉 나는 지금 무엇이 문제라고 느끼나? 나는 무엇을 참을 수 없나? 어떻게 권력관계가 나를 완전히 규정하도록 놔두지 않을 것인가? 푸코는 내가 이렇게 만들어졌다는 것에서 내가 이렇게 만들어지지 않을 수도 있음을 읽어냅니다. 이런 식으로 주체화되지 않겠다는 실천적 지점들이 이미 내가 이렇게 만들어져 왔다는 것 안에 이미 포함되어 있습니다.

철학이란 의사의 진단과도 같은 것입니다. 니체는 현대적 힘에 대한 포착이 진단이라고 합니다. 문제를 어떻게 판단하느냐에 따라 치료도 달라집니다. 고고학은 실현의 조건을 정의하는 것입니다. 어떤 담론이 실현되느냐의 여부는 권력관계에 의해 결정됩니다. 담론 형성의 규칙성은 권력관계입니다. 권력관계는 선험적으로 권력을 가진 자에게 있지 않습니다. 담론적 형성물과 비담론적 형성물들의 배치와 상관관계를 분석한 결과로 권력관계가 도출되는 것입니다. 담론이 형성되었다는 것, 즉 담론이 이런 방식으로 현실화되었다는 것 자체가 이미 그 한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조건이 곧 한계입니다. 따라서, 다르게 만들 수 있는 가능성 또한 조건 안에 있습니다.

구성되는 주체로서 우리는 이런 식으로 구성된다는 것으로부터 이렇게 구성되지 않는 가능성을 모색해야 합니다. 주체주의의 오류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구조주의의 문제의식에 갇히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 이것이 바로 푸코가 역사를 통해 말하고자 한 것입니다.

후기 쓴 김에 공지까지 걍 제 마음대로 합니다. (지은아 고맙지? ^^)

다음 시간 숙제는

첫째, 담론의 질서 1부 중 초험적 주체의 철학들~감사의 말(35~54쪽) 읽고,

담론 형성의 과정 / 비판과 계보학 정리해서 쓸 것 (나눠준 프린트물 참고해도 됨)

둘째, 푸코의 니체, 계보학, 역사 (프린트물) 읽기입니다.
전체 2

  • 2018-05-07 07:30
    모지람이 하나도 없는 후기! 지난 강의가 콸콸 쏟아지나이다! @.@

  • 2018-05-08 09:47
    호정샘 ㅠㅠ~~ 넘 감사합니다!!!ㅎㅎㅎㅎㅎ
    무엇을 참을 수 없는가?라는 질문 자체가 벌써 신체적/실증적인것 같아요 ㅋㅋ 나의 신체가 무엇을 답답해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