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SF절차탁마 5월 23일 공지 (수정)

작성자
황지은
작성일
2018-05-15 12:18
조회
134
4.주체의 형성과 투쟁을 추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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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어서 죄송합니다 흑흑 ㅠㅠㅠㅠㅠ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1. 왜 언표인가?

 다시 언표입니다. 두둥. 이 언표라는 놈은 왜이리 이해하기 힘들까요 ㅠㅠ

 20세기 철학의 주요 화두 중 하나는 바로 언어라고 합니다. 우리는 흔히 언어가 우리의 생각을 지시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최대한 나의 생각을 잘 표현할 수 있는 단어들을 고르곤 하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나의 언어는 상대방에 가닿는 순간 전혀 다른 의미로 변형되기도 합니다. 이런 현상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언어가 사물과 1:1 지시관계를 맺고 있지 않다는 것은 이런 의미인 것 같습니다. 언어는 ‘투명한 매개체'도 아니고,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의미를 전달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언어는 자의적이고 주관적인 것일까요? 하지만 우리는 분명 언어로 소통을 하고, 약속을 하고, 공론의 장을 만듭니다. 언어가 우리의 생각을 지시하는 것 같으면서도 아니고, 주관적인 해석 같으면서도 아니라면... 한 마디로 우리와 ‘썸'을 타는 걸까요? 요녀석…

 니체 또한 언어의 문제를 중요하게 다룹니다. 어떤 공론의 장에서 어떤것이 ‘옳다, 그르다'는 논의가 벌어질 때 우리는 ‘옳은 것'과 ‘그른 것'에 대한 기준을 전제한 채로 그것을 판단합니다. 하지만 니체는 그 전에 우리는 무엇을 옳은 것, 무엇을 그른 것이라고 ‘부르는가’?를 질문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관념들, 이미지들, 진리값이라고 생각하는 전제들은 언어와 결부될 수 밖에 없습니다. 추상적인 이미지를 머릿속에 떠올릴 때에도 모호하게나마 ‘이것은 뭐야'라고 지시하는 나의 목소리가 함께 작동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이것은 뭐야'라고 분절하고 분류하게 하는 ‘해석의 체계’가 결부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중립적이라고 생각하는 언어도 그러한 ‘뉘앙스'를 풍기는 것뿐입니다. 예를 들어 ‘바나나는 노란색이야'라고 말할 때, 이것은 그저 ‘사실'을 말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그것은 바나나가 ‘노란색'이라고 선언함으로써 바나나가 가지고 있는 다른 특성들을 배제하는 것이 아닐까요? 햇빛이 비칠 때 다르고, 그늘이 질 때 색이 다 다를텐데 ‘노란색'이라고 묶어버리는 분류의 체계 또한 일종의 해석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따라서 언어를 문제삼을 때 우리는 우리의 사유체계, 진리체계 전체를 질문하는 것입니다. 니체는 모든 언어는 이미 ‘해석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각 언어가 지니는 독특한 뉘앙스가 ‘해석’이며 ‘힘의지’입니다. 한국어와 영어 사이를 오가다 보면 정말 각 언어의 ‘힘'이 느껴져요. 한국어로 이야기하면 무언가 ‘두루뭉술'하게 이야기를 해도 서로가 다 알아듣는다는 듯 ‘아~~’ 반응을 해주는데, 영어로 이야기하면 ‘정확히’(누가 어디서 어떻게 무엇을 등등) 이야기를 해줘야 그제서야 ‘아, 무슨말인지 알겠어' 하는 느낌입니다. 어쨌든 이런 것도 일종의 힘의지인지...잠깐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니라면 따끔히 댓글 달아주세요 ㅋㅋㅋ

 아무튼 언어는 ‘이미 해석된 힘의지'를 통해서만 발화될 수 밖에 없으며, 따라서 ‘보편적 진리'를 말하기란 불가능합니다. 내가 말하는 모든 모든 언어에는 나도 모르게 ‘난 이렇게 해석하고 싶어'라는 무의식이 작동하며 그 무의식은 내가 속한 시공간의 어떤 담론의 장의 규칙성에 의해 작동한다는 것으로 받아들였는데 맞나요…?ㅎㅎ

 푸코는 ‘언어'를 어떤 방식으로, ‘의미'를 어떤 차원에서 다룰 것인가를 고민하기 위해 ‘언표’라는 개념을 가져옵니다. 텍스트는 의미를 담고 있는가, 아니면 의미는 밖에서 오는가? 언어에 의미가 내재되어 있다면 단어의 뜻을 다 알기만 하면 그 문장의 의미를 알 수 있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외국어를 공부할 때 여실히 드러나는 것 같은데요, 가령 한 영어 문장의 단어들을 다 찾았는데도 여전히 그것이 뜻하는 바가 선명하게 와닿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는 그 나라의 사람들이 그들의 문화권에서 즐겨 쓰는 관용 어구라던지, 주로 그들 사이에서 공유되는 독특한 뉘앙스를 담고 있는 문장들인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텍스트에 그 의미가 내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면, ‘내재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그 의미’는 어디서부터 온 것일까요? 의미가 언어 안에 미리 주어져 있지 않고 발생되는 것이라면 어떻게 그 과정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언어 자체에 의미가 선험적으로 담겨 있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전제를 무너뜨리고 의미 발생의 ‘이전 차원’을 사유하기 위해, 언어를 그저 하나의 기념비로, ‘씌여진 것'으로 다루기 위해 푸코는 언어를 ‘언표'라고 명명합니다.

 

2. 의미는 어떻게 발생하는가?

 들뢰즈는 질문했습니다. 의미란 주어져 있는 것인가? 주어진 것이라면 누가 주는가? 군주 국가 체제에서는 의미를 ‘초월적 군주’ 내지 ‘신’이 부여한다고 여겨졌고, 따라서 그 의미를 해석할 수 있는 집단들이 권력을 차지했습니다. 성경을 독점하고 그 내용을 전파했던 사제 집단, 왕의 명령을 해석하고 배포했던 관료 집단. 이들은 신이나 왕이 뜻하는 바를 옮겨 적을 뿐입니다. 근대 국가는 신이나 군주가 의미를 독점한다는 개념을 거부합니다. 의미는 바로 글을 쓴 장본인, 주체, 저자가 부여한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우리의 상식적인 생각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니체는 이러한 ‘저자’의 개념은 또 다시 의미를 ‘신’과 ‘군주’로 돌리는 것과 똑같다고 말합니다. 언어는 주체에게 종속되어 그가 ‘뜻하는 바’를 말끔하게 전달할 뿐이라는 의식이 깔려있는 것이죠. 결국 ‘신’, ‘군주’, ‘주체’ 모두 그들의 의도, 신념, 요구 등을 ‘투명한 언어’로 전달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즉 의미를 언어 바깥의 어떤 ‘초월자'에 귀속된다고 여겼다는 점에서 ‘신'이나 ‘저자'나 다를게 없습니다.

구조주의는 의미가 언어 바깥에 주어져 있다고 여기는 사유를 비판하며 사물과 마주하는 주체도 그 사물이 놓여있는 시공간의 장 속에 놓여 있다고 지적합니다. 따라서 ‘의미를 파악하는 나’도 사물과 동시에 특정 규칙이 작동하는 시공간의 장 속에서 들어가 있는 것이죠. 이때 주체가 ‘특정 방식'으로 사물과 관계를 맺게 하는 ‘의미의 장’, 시공간의 장이 바로 구조이며 규칙성입니다. 언어는 그러한 의미의 장 속에서 발화하는 것입니다. 주체는 ‘특정 규칙성들'의 장 속에서 언어를 ‘특정 방식’으로 발화하면서 ‘특정 의미’를 생성하며, 그 규칙성에 따라 주체도 ‘특정하게 만들어집니다’.

 그런데 구조주의는 의미를 ‘의미 작용 체계’, 즉 규칙성들로 또 환원시켜버립니다. 하지만 의미는 동일하게 지속되지 않습니다. 사건의 의미화, 해석하는 과정은 균질적이지 않습니다. 의미들은 각기 다른 방식들로 다양하게 발생합니다. 그 의미들 중 하나가 지배적인 것으로 자리잡기는 하지만 여전히 지배적인 의미로 환원되지 않은 채 끊임없이 발생하는 의미들, 힘들이 있습니다.

 

3. 왜 이론이 아닌 담론인가?

 지성사는 이론을 이야기하지만 푸코는 담론을 다룹니다. 이론은 한 정합적 체계 속에서 취해지는 말들의 집합이며 제도적으로 승인을 받은 ‘과학’을 전제로 합니다. 하지만 담론은 그러한 체계를 전제하지 않습니다. 채운샘이 들어주신 예는 ‘돈'에 관한 담론입니다. 경제학자들이 만드는 여러 화폐 ‘이론’들과 다르게 각자가 각자의 자리에서 우글우글대며 만들어내는 돈에 관한 ‘담론’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부모와 자식세대가 돈을 쓰는 영역이 다를 수 있습니다. 부모 세대가 기본 요소들(의식주 등) 이외에 것을 ‘사치'라고 여긴다면, 자식 세대가 음식 등의 기본 요소들에 돈을 아껴 자신의 ‘취향'을 즐길 수 있는 유흥거리에 돈을 아끼지 않는거죠. 동시에 요즘 2, 30대들은 하고싶은 것을 하는 것은 ‘사치'라고 느낍니다. 돈을 버는데에 치중하는 대신 ‘하고싶은 것’을 하는 사람들은 ‘역경을 이겨내는 멋있는 사람’이라고 칭송하거나 ‘금수저’라고 치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하고싶은 것을 하려면 돈이 든다’라는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하고싶은 것’은 돈과 무관한 일이라는 전제도 깔려있는 것 같아요. 어쨌든 무얼 하든 이 ‘돈’과의 연결고리를 피할 수 없다고 느낍니다. 반면 부모님 세대는 ‘하고싶은 일'은 돈과 연결되기 보다는 어떤 사명감 내지 이념과 더 연결되지 않나... 하고 추측합니다(물론 1도 모르고 하는 소리입니다 틀리다면 댓글 달아주세요ㅠㅠ)

 어쨌든 ‘돈'에 관한 담론, ‘하고싶은 일'에 관한 담론 등은 이론처럼 정합적으로 정리되어 존속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형성되고 변이되고 있습니다. 분산되고 이탈하는 담론들. 우리는 현재의 담론의 장 전체를 조망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둘러싼 담론적 형성들이 이전과는 다르다는 것은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전과 다른가를 말하며 우리가 형성하는 담론들이 ‘보편적인 진리값'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아가 우리가 생각해야 할 지점은 ‘실천'입니다. 우리는 담론의 장 속에서 특정 규칙성대로 생각하고 말하는 존재인 동시에 담론을 형성하는 주체이기도 합니다. 채운샘은 능동과 수동의 동시성을 항상 생각해야 한다고 말씀해주셨는데요, 주체가 만들어진다는 것은 수동적인 측면을 함의하고 있지만 그것이 어떤 ‘결정론'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담론의 장이라는 한계 조건을 벗어날 수 없지만 어떤 문제도 단지 선택의 문제로 우리에게 ‘주어져'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놓여 있는 담론의 장에 대해 비판적 거리를 두면서 다른 담론을 어떻게 ‘형성’할 것인가? 푸코는 계급 투쟁은 ‘이원화’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남자와 여자 등 두 개의 장이 ‘주어져' 있어서 우리는 그 중 하나를 택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닙니다. 두 개의 투쟁으로 환원시켜버리는 담론의 장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면서(전제를 의심하면서), 상상할 수 없었던 방식으로 다른 담론을 만들어낼 수 있는 가능성이 만들어집니다.

 

4. 주체의 형성과 투쟁

 우리는 담론적인 형성물 속에서 말하고 생각는 ‘수동적인 주체'임과 동시에 담론을 형성할 수 있는 ‘능동적인 주체'이기도 합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푸코가 말하는 주체는 능동과 수동이 동시적으로 함께 갑니다. 우리는 근대 또는 근대 이후라는 시간 안에서 각자의 세대, 각자의 환경에 따라 각기 다른 담론의 장들 속에서 '형성되는 주체들'입니다. 그래서 ‘돈', ‘사랑', ‘교육' 등에 대해 이야기 할 때 서로 다른 규칙성을 가지고 말합니다. 여기에는 분명 수동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내가 놓인 환경에서는 이러이러하게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전제를 의심하게 될 때 우리는 ‘능동적 주체화' 그리고 '투쟁'으로 한 걸음 나아가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저는 '좋은 대학에 가면 좋은 직업을 얻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라는 전제 속에서 공부를 열심히 했었는데, 막상 대학을 가보니 '학교가 꼭 나의 실력이나 철학을 성장시키는 곳은 아니다'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학교는 학생의 능력을 향상시킨다'는 올드한 전제를 가지고 있었죠. 허허...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당시에는 딱히 할 수 있는게 없었습니다. 대학원에 진학해서 더 실력을 쌓거나(전제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회사에 가서 실력을 쌓거나(역시 같은 전제이죠). 선택지가 딱 두 개 뿐이었어요. ‘다른 길을 만들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대학원이나 회사에 가서 ‘학교나 회사에 의지하지 않고 내가 잘 하면 되겠지'라는 마음이었습니다. 막상 회사에 가서는 또 다시 수동적으로 회사에서 할 일을 하느라 바빴고, 이력서에 쓸 만한 ‘좋은 일'이 주어지지 않아 불안했습니다. 자본주의라는 시공간 속에서 저는 ‘능력 향상'과 ‘미래에 대한 환상'을 꿈꾸는 자본주의적 주체로 형성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수동적 주체화'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면 능동적 주체화란…? 음... 아 어렵네요. ‘나는 왜 ‘미래에 대한 환상'이 없으면 불안하게 느끼는가?’를 질문하며 지금 내가 주체화 되고 있는 장을 사유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미래에 대한 환상' 없이도 지금 이 순간을 불안하지 않게 보낼 수 있는가?’로 바꾸어 질문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아, 이 두 질문 생각하는데도 엄청 시간이 걸리네요…푸코는 ‘어떻게 자기와의 관계를 구축할 것인가'를 질문하며 수행의 문제를 가지고 왔다고 합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자신'으로 환원될 수 없는 자기를 사유하기. 정말 어려운 일인 것 같습니다. 크으... 푸코님...

 

 숙제는 한 학기 동안 ‘푸코에게서 어떤 것을 배웠나?’를 자신의 현재 문제와 엮어서 풀어보시는 것입니다! ㅎㅎ 분량은 A4 1장으로! 흑흑 엄청 어렵겠죠…... 하지만 어렵고 힘든만큼 재밌는거 같아요!(영혼 없는 소리 아닙니다) 그럼 23일에 뵙겠습니다^^ 간식은 저와 호정샘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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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5-16 08:21
    황지님의 후기를 읽으니, 새삼 '나를 의심한다는 것'이 중요해지는군요. 나의 행동, 나의 생각, 무엇보다 나의 말. 좀더 적극적으로 나를 관통하는 힘 의지들을 살펴야겠습니다. 에니웨이, 우리는 다음주 월요일까지 영혼 가득한 에세이를 써야하는구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