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SF절차탁마 5월 30일 공지

작성자
황지은
작성일
2018-05-25 19:06
조회
150
채운샘이 말씀하신 니체의 글 아카이브 사이트입니다
http://www.nietzschesource.org/

푸코와 함께 한 <지식의 고고학> 1학기가 끝나고 니체로 들어가는 2학기의 시작에 앞서 ‘푸코를 통해 무엇을 배웠는가?’에 대해 서로 이야기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저는 아직도 주체에 대한 개념이 명확히 와닿지 않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았죠... ㅜㅜ 그래서 1학기를 마무리 할겸, 채운샘과 함께 다시 한 번 명확히 와닿지 않는 개념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주체의 수동성/능동성


 채운샘은 스피노자의 신체 변용을 가지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변용이라는 개념에는 변용 ‘하는 것’과 ‘되는 것’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고요. 니체가 말하는 힘의 작용 또한 능동과 수동이 동시적입니다. 예를 들어 야구공이 굴러가는데 큰 바위에 부딪힌 후와 탱탱볼과 부딪힌 후의 각각의 운동은 매우 다를 것입니다. 큰 바위에 부딪힌다면 야구공만 튕겨져 나가겠지만 탱탱볼과 부딪힌다면 야구공과 탱탱볼 둘다 운동방향과 가속도가 바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큰 바위는 아무런 영향을 안받은 것이 아니죠. 미세하게 위치가 바뀔 수도 있고 분자의 움직임에도 충격이 가해집니다. 따라서 야구공, 바위, 탱탱볼 모두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능동) 받습니다(수동). 좀 더 확장시켜 보면 물질 세계에는 A와 B 또는 A와 C 같은 두 가지 힘만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셀 수 없이 많은 수의 분자들이 서로 마구 부딪히면서 작용 반작용합니다. 영향을 받기만 하는 수동도 없고, 영향을 주기만 하는 능동도 없습니다.

 주체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정보를 다 다르게 받아들입니다. ‘트럼프의 북미정상회담 취소’라는 사실을 두고서도 우리는 수많은 해석을 합니다. 여당이냐 야당이냐에 따라 다를 것이고, 또 개개인마다 달리 해석을 할 것이고 따라서 향후 예측 또한 다 다릅니다. 이것은 우리가 놓인 지평과 생각의 구도가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말을 들어도 그것을 해석하는 우리의 방식은 상이합니다. 각자의 번역 및 해석의 과정 자체가 ‘나의 힘으로 변이’시키는 능동성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다만 주체는 주체가 구성되는 장의 바깥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주체가 의지를 발휘할 때조차도 그것은 관계 속의 누군가에게 또는 주체가 겪는 경험 속에서 어떤 자극이 주체에게 작용을 가한 결과입니다. 그런 것 없이 관계의 바깥에 존재하는 순수한 의지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즉 행위와 의지는 분리되지 않는 것이죠. 따라서 ‘우발적 범죄’같이 주체는 그럴 의지가 없었는데 결과적으로 일이 그렇게 되었다고 말하는 경우는 주체의 자유의지를 전제한 논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체는 수많은 인연의 장 속에 놓여있습니다. ‘나는 그럴 의도가 전혀 없었다’는 논리가 성립될 수 없는 이유는 신체에 작용된 힘에 반작용하는 것에도 주체의 의지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100프로 능동 또는 100프로 수동은 없으니까요. 정리하면, 의지가 ‘있었는데’ 행위를 못했다는 것이나 의지가 ‘없었는데’ 행위를 하게 되었다는 것은 없습니다. 주체는 주체가 그렇게 구성되는 장 속에서 능동성을 발휘합니다. 수동적으로 ‘길들여지는’, 작용을 받기만 하는 100프로 수동인 주체는 없습니다. 스피노자는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자연 안에 있으며 자연 안에 있다고 말합니다. 다른 개체들과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존재하는 역동적인 생산의 장이 바로 자연입니다.

 주체의 ‘구성’이란 따라서 우리가 놓여있는 사회, 그 사회가 신체를 규정하는 방식, 신체들이 연결되는 매커니즘, 물질적/비물질적으로 짜여져 있는 문화 속에서 특정 품행과 사고방식을 가지게 되는 과정을 말합니다. 이것은 완전하게 수동적인 과정이 아니라 나의 방식으로 ‘번역’하는 능동적 과정을 함축합니다. 주체는 구성되는 동시에 능동적으로 자신을 규정합니다. 한국인으로 ‘구성되는’ 동시에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것을 ‘자각’(자기규정/정립)하는 것이죠. 이 주체화 과정 속에서 푸코가 고민한 것은 기존의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주체화 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였습니다. 내가 그것을 받아들이는 방식을 바꿀 수 있다면 다른 주체로 구성되는 것 또한 가능하기 때문이죠. ‘나는 이런 식으로 품행이 인도되고 있는데 어떻게 그런 방식으로 인도되지 않을 수 있을까?’

 사회에 의해 강요되는 행위 양식이나 무의식적으로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전제들이 있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내 신체성을 바꿔놓고 있지?’ ‘내가 진리와의 관계를 어떻게 구성할 수 있지?’ 이러한 질문들과 같이 나의 행동/사유 양식을 특정 방식으로 성립되게 하는 그 지점에 우리가 질문을 던질 수 있다면, 힘들에 의해 구성되고 있는 가운데 힘들과 다른 관계를 형성하여 다른 주체로 형성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체가 ‘있다’고 이야기할 수도, ‘없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시공간의 장으로부터 자유로운 탈관계적인 주체는 없으며, 구성중인 주체가 있습니다.


희박화


 헷갈렸던 두 번째 개념은 바로 ‘희박화’입니다. 폴 벤느는 이를 두고 ‘성글다’(촘촘하지 않다)고 표현했습니다. 어떤 시대도 모든 것을 알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인권’에 대한 개념에 대해 말하자면, 고대에는 인권에 대한 인식이 전무하다가 현대 사회로까지 시간이 흐르면서 그 인식이 촘촘하게 메워지는 식으로 발전하지 않습니다. 결국 시대마다 그 시대가 지식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모두 ‘희박’하고 ‘성글’ 뿐 시간이 지남으로서 이에 대한 인식이 촘촘히 메워지면서 완성된 형태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옛날보다 더 많이 알아가는 축적의 개념이 아닌 것이죠. 우리에게 지식의 대상으로 나타나는 것은 매번 달라지고 분산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현재 담론의 지평이 이전보다 더 완전하고 발전되었다고, 미래의 담론은 현재보다 더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어떤 완전한 진리가 있다고 상정하는 것 아닐까요? 그 진리에 이르면 우리는 더 이상 논쟁할 필요가 없어지는 것일까요? 우리는 달라진 조건 속에서 한계를 가지고 말하고 인식하고, 구성됩니다. 인식의 역사는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우리가 ‘동일한 한계’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으로부터 점점 더 많이 벗어나는 과정의 역사가 아닌 매번 달라지는 조건들 속에서 다르게 구성되는 지식의 역사입니다.


비판이란 무엇인가


 푸코는 자신이 하는 것은 철학이 아닌 비판이라고 칭합니다. 니체의 철학적 태도 또한 비판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이는 크게 말해서 ‘관계로부터 파생되는 태도’라고 합니다. 음... 이게 무슨말인지… 15세기 이후에 서양에서 전개된 권력은 바로 ‘사목 권력’이라고 합니다. 사제가 우리의 품행 및 욕망을 관리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이 권력은 나아가 ‘어린이, 가난한 자, 가족, 군대’ 등의 다양한 집단/도시/국가를 어떻게 통치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로 그 범위가 확장되었습니다. 동시에 함께 가는 질문은 바로 ‘어떻게 통치받지 않을 것인가?’입니다.

 푸코는 통치 권력 바깥에 가서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를 질문하는 대신 그 권력의 장 속에서 어떻게 하면 ‘그런 식으로 통치당하지 않을 것인가’를 고민했습니다. 이것이 그의 비판적 태도인데요, 비판은 완전한 반대(anti-)가 아닌 대항(counter-)의 의미에 더 가깝습니다. ‘상대방인 동시에 적대자’로서 앞의 상대가 누구인지에 따라 나의 반응 또한 달라집니다. 이런 의미에서 비판은 ‘관계로부터 파생’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한 진리에 대항하는 다른 진리의 영역을 만드는 것이 아닌, 하나의 진리가 어떻게 구성되고 있는지에 대한 사유입니다. ‘진리’의 가치를 묻는 것. 통치의 기원에 대해 묻는 대신 통치권이 어디까지 가능한지, 통치권의 근거가 무언지 그 가치를 묻는 작업. 계보학적 작업이 바로 비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푸코의 관심은 ‘주체가 어떻게 권력 속에서 진실과 관계 맺는가’였습니다. 특정 권력이 작동할 때에는 특정한 진리값을 생산합니다. 예를 들어 최근 이슈로 떠오르는 낙태죄 위헌소송에 대해 법무부는 합헌이라고 주장하며 “태아의 생명권 보호는 국가의 책무이고, 매우 중요한 가치를 가진다고 생각한다"고 입장을 발표했습니다. 그러니까 낙태죄를 시행하는 권력이 작동하는 동시에 '태아는 생명을 유지할 권리가 있다', '그 권리는 국가가 보호해야 하는 의무이다' 이 두 명제에 ‘참’이라는 가치가 부여되며 진리값이 파생됩니다.

 비판은 그 권력이 생산하는 진리담론을 문제삼을 수 있는 권리를 획득하는 활동입니다. 낙태죄에 찬성 또는 반대하는 사람들 모두 그 법이 파생하는 진리와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이 법으로부터 ‘숙고된 불순종’을 하려면 이 법이 생산하는 진리값을 신중하게 검토해야 합니다. ‘태아의 생명권 보호’라는 진리값은 어떤 권력 효과 속에서 구성된 것인가를 숙고하고 그것으로부터 어떻게 벗어날 것인지 자신의 행동 양식을 정하는 것이죠. 이것은 푸코 식으로 말하자면 탈예속화, 들뢰즈 식으로 말하면 도주로의 발명입니다. 흠. 그런데 저에게는 아직 ‘신중하게 도주로를 발명’하는게 어떤건지 잘 모르겠어요. 낙태죄를 둘러싼 논란에는 의학, 종교, 가부장적 질서 등의 제도/권력이 엮여있는 것 같습니다. 이들로부터 ‘나의 자궁’에 대한 선택권을 지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건지는 잘 모르겠네요... 시위 말고 다른 방법이 있을까요?

 채운샘은 마오쩌둥이 이끈 문화대혁명의 구호였던 ‘조반유리造反有理’(반역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와 스피노자적 문구인 ‘우선 인식하라sed intelligere’를 비교하셨습니다. 제가 이해하기로는 ‘저항에는 다 이유가 있겠지’라는 태도는 미숙함의 일종인 것 같았어요. 칸트는 ‘내가 어떤 지점까지 알 수 있는지', ‘나에게 작동하는 권위/권력이 어떤 한계를 가지고 있는지’를 질문하지 않는 것이 미숙함이라고 말했습니다. 자신의 인식의 조건/한계를 되물음으로써 자기 스스로의 이성을 정립하는 것, 그것이 타인(권력, 제도)에 복종하지 않고 자기 스스로 판단하고 행위할 수 있는 자율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와우, 적고보니깐 엄청나네요. 아무나 자율적이 될 수 없을 것 같아요 ㅋㅋㅋㅋ ㅜㅜ 자신의 진리와 관계를 맺을 때 자율적이 된다. 따라서 비판은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 파생되는 태도인 것 같습니다!


ㅎㅎ 말이 길어졌습니다. 어쨌든 푸코의 비판에는 ‘권력, 지식, 주체’가 핵심입니다! 따라서 숙제는 1) 푸코가 말하는 비판은 무엇인지 정리하는 것과 2) 그의 비판으로서의 철학 개념에 입각해서 <즐거운 학문>의 1부 단편 중 하나를 정리/해석하는 것입니다.


간식은 정수샘과 봉선샘입니다^^ 담주에 뵈어요~~
전체 2

  • 2018-05-25 23:04
    (과제와 관련해서) 단편 하나 아니고 여럿이어도 좋습니다! / 진리와 주체의 문제를 지은이가 잘 이해한 걸까요?^^ 요거, 우리가 공부할 핵심입니다. 두고두고 매시간 얘기해보죠.

  • 2018-05-26 07:16
    주체의 '번역함'에 대해 많이 생각해보게 됩니다. 결국 진리와 어떻게 관계맺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우리의 화두로구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