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SF절차탁마 6월 13일 공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8-06-09 12:39
조회
151
감각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니체는 철학자들의 특이 성질로 ‘역사적 감각의 결여’와 ‘생성이라는 생각 자체에 대한 증오’를 들고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두 특이성질로부터 ‘개념의 미라들’을 만들어냅니다. 이는 푸코가 중요하게 지적하는 문제이기도 하죠. “어떤 것을 영원이라는 관점에서 탈역사화”하는 것을 비판하는 일. 성, 범죄, 광기 등의 개념들이 역사와 무관하게 ‘주어져 있다’고 믿어버리는 것. 이때 이들은 개념들을 숭배함으로써 그것을 죽여 버립니다. 보편과 영원을 자임하는 개념들은 구체적인 시공간 속에서 활동하고 살아가는 힘을 상실하게 됩니다.

“존재하는 것은 되어가지 않는다 ; 되어가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니체에 따르면 이것이 철학자들을 지배해온 명제입니다. 존재와 되어감을 대립시키기. 그러나 물론 이들이 전제하는 ‘영원불변하는 실재(=존재)’는 결코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이에 철학자들은 감각을 탓하기로 했습니다. 우리가 존재자를 인식할 수 없는 것은 감각의 속임수 때문이라는 거죠.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교훈이 따라 나옵니다. “감각의 사기에서, 생성에서, 역사에서, 허위에서 벗어날 것.” 그리고 “감각에 믿음을 선사하는” 대중들을 부정할 것.

그러나 니체에 따르면 감각은 전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니체가 지극히 존경을 표하는 헤라클레이토스조차 (관념론자들과는 전혀 다른 이유에서) 감각이 거짓말을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감각이 “어떤 것이 지속성과 단일성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나타내 보인다는 이유로” 감각이 제시하는 증거를 버렸죠. 그러나 니체의 생각은 조금 달랐는데, 니체가 생각하기에 조작을 하는 것은 감각이 아니라 이성이었습니다. 에피쿠로스와 루크레티우스도 이렇게 생각했죠. 감각의 증거로부터 우리가 만들어내는 것(단일성, 물성, 실체, 지속)들이 우리를 속인다는 것.

이성의 표상작용과의 싸움. 이는 니체철학의 핵심 중 하나인데요, 흥미로운 것은 니체 동시대에 미술에서는 인상주의가 등장했다는 것입니다. 인상주의는 사물의 윤곽을 실체화하는 사실주의에 맞서 윤곽을 해체하고 가상을 긍정했습니다. 말하자면 니체는 인상주의가 미술에서 행한 것을 철학에서 행한 셈입니다. 니체는 말합니다. “‘가상’ 세계가 유일한 세계이다 : ‘참된 세계’란 단지 가상 세계에 덧붙여져 날조된 것일 뿐이다……”

니체가 추가적으로 지적하는 철학자들의 또 다른 특이성질은 “최후의 것과 최초의 것을 혼동” 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이러한 특이 성질로 인해 철학자들은 ‘신’이라는 기이한 개념을 갖게 됩니다. 이로부터 온갖 본능과 충동 그리고 우연들이 이어져 만들어진 “사실성의 마지막 연기”인 신을 ‘자기원인’으로 설정하고 그것을 모든 것의 시작점에 두는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것이죠.

이성은 자신의 편견의 산물들을 ‘원인’의 자리에 놓습니다. 이로부터 행위와 행위자를 구분하고 행위자의 의지를 행위의 원인으로 믿어버리는 사태가 벌어집니다(이 과정에서 오류의 변호인인 언어가 커다란 역할을 하게 되죠). 사실은 행위 이후에 오는 관념이거나, 언어적 조작의 결과물일 뿐인 ‘의지’가 그 자체로 하나의 능력으로 받아들여지고, 인간들은 ‘자유의지’라는 오류를 숭배하기에 이릅니다. 그로부터 행위와 행위자를 분리시키는, 다시 말해 힘을 그것이 할 수 있는 것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오류들이 생산됩니다. 죄의식, 양심의 가책, ‘다른’ 세계에 대한 관념 등.

니체는 일갈합니다. “삶을 비방하고 왜소화하며 의심하는 본능이 우리에게서 강력하지 않아서라고 전제하면”, “이 세계와는 ‘다른’ 어떤 세계에 관해 허황된 이야기를 지껄이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다시 말해 이성의 편견이 만들어낸 모든 관념들은 삶을 비방하고 왜소화하며 의심하는 본능의 표현 외에 다른 무엇도 아니라는 것.

그렇다면 니체는 ‘참된 세계’라는 이성의 오류를 폭로하고 어디로 가는 걸까요? 아마도 가상세계? 그렇지 않죠. 이 지점에서 그는 인상주의 화가들과도 갈라섭니다. 니체는 참된 세계와 함께 가상 세계도 없애버리고자 합니다. 이 지점이 니체 철학의 가장 흥미로운 부분인 것 같습니다. 니체는 실재/가상의 이분법을 단순히 뒤집어 ‘가상만이 실재이다’라고 말하거나 더 이상의 판단을 포기하고 이분법을 그대로 내버려 둔 채 상대주의에 빠지지 않습니다. 니체는 실재/가상의 대립을 넘어서 다시 그러한 구분 자체를 다시금 가치평가 합니다.

“누가?”

“인식이라는 이상과 참된 것의 발견이라는 목적을 니체는 해석과 가치평가로 대체하고 있다.”(질 들뢰즈, 《들뢰즈의 니체》, 철학과 현실사, p.29)

가상과 실재의 구분을 넘어서, 니체가 행하는 작업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가치평가로서의 철학이란, 가치의 가치를 묻는다는 것은 뭘까요? 들뢰즈에 따르면 그것은 질문의 방식을 바꾸는 것입니다. 《즐거운 학문》 2부 58절에서 니체는 “사물이 무엇인가 하는 것보다 사물이 어떻게 불리고 있는가 하는 것이 말할 수 없을 만큼 더 중요하다”고 말하죠. 즉 니체는 참된 것과 가상의 것의 구분 자체를 초월하자고 말하는 것도 아니고, 그러한 구분의 선을 공정하게 다시 그리자고 주장하는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나눔의 방식에 내포된 힘이 어떤 힘인가 하는 점입니다. 그것이 생을 긍정하게 하는 힘인지, 부정하게 하는 힘인지, 우리를 가볍게 하는 힘인지, 무겁게 만드는 힘인지……. 니체가 58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가상을 파괴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가상을 구성해내야 합니다. 즉 우리가 실재/가상의 날조된 구분에서 풀려나게 되는 것은 그러한 구분에 내포된 힘에 대한 전혀 다른 방식의 평가를 창조해낼 수 있을 때입니다.

들뢰즈의 해석에 따르면 니체는 ‘무엇……?’이라는 소크라테스(플라톤)의 질문방식을 ‘누가……?’라는 방식으로 뒤집어버립니다.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소크라테스는 늘 소피스트들에게 질문하죠. ‘정의로움이란 무엇인가?’,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따위를요. 그에 대해 소피스트들은 젊은 처녀, 암말, 솥 등을 인용하면서 대답합니다. 이들은 아름다움인 것들을 인용할 뿐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에 답하지는 못하기에 늘 소크라테스에게 패합니다. 그러나 니체(들뢰즈)가 보기에 소피스트들은 “사람들이 그에게 ‘무엇?’을 물을 때 ‘누가?’를 대답하는 데 만족하는 어린아이”는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누가?’라는 의문이 최선의 의문이고, 본질을 결정하는 데 가장 적절한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죠. 니체에 따르면 ‘누가?’라는 의문은 “어떤 사물이 고려되었을 때, ‘그것을 탈취하는 힘들이 무엇이고, 그것을 소유하는 의지는 무엇인가’를 ”의미합니다.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누가?’라고 질문할 때에만 사물의 본질로 인도됩니다. 왜냐하면 “본질은 단지 사물의 의미와 가치일 따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물이 무엇인가’가 아니라 ‘사물이 어떻게 불리고 있는가’.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가 아니라 ‘누구의 아름다움인가?’, ‘예술이란 무엇인가?’가 아니라 ‘어떤 힘 의지를 표현하고 있는 예술인가?’를 묻는 것. 니체는 이런 질문방식을 체화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때문에 니체의 책을 읽다보면 자주 혼란에 빠지게 되죠. 예술은 좋은 거야, 나쁜 거야!? 진리가 있다는 거야 없다는 거야!? 따위의 답도 없는 질문을 하게 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또 ‘니체는 민주주의의 적이다’, 라거나 ‘니체는 여성혐오다’라는 식의 오해를 사기도 하죠. 니체를 읽으며 우리 자신의 질문방식을 바꿔보는 것도 재밌을 것 같네요.

인식과 사유 그리고 예술

저는 이번 주 과제에서 인식이란 본질적으로 예술적인 활동이라고 썼었는데, 알고 보니 틀린(?) 말이었습니다. 니체(들뢰즈)는 인식과 사유를 구분하고 있습니다. 들뢰즈에 따르면 니체는 《비극의 탄생》에서부터 “삶에 종속된 단순한 수단인 인식이 목적, 재판관, 최상의 심급임을 자체”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사실 삶이란 인식에 의해 설명되지도 포착되지도 않는 ‘불연속’입니다. 인식은 다만 사후적으로만 삶에 틀을 부여할 수 있을 뿐이죠. 때문에 인식이 숭배될 때 삶은 필연적으로 평가절하 됩니다. 사실 인식은 삶에 대립할 수 없죠. 니체가 지적하는 것처럼 인식은 삶에 종속되어 있으니까요(《즐거운 학문》 1절에서 니체는 삶에 반하는 목적의 교사들이 실은 그들의 설교를 통해 종족본능에 봉사했다고 말하고 있죠). 다만 인식은 반응적인 삶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삶에 반합니다. “인식은 삶에게서 그것이 할 수 있는 것을 분리시키는 법칙들, 그것에게 행동하지 않도록 하며, 그것에게 행동을 금지시키는 법칙들을 제공하고, 그것을 과학적으로 관찰 가능한 반작용들의 협소한 테두리 속에 마치 동물원 우리 속의 짐승처럼” 가둡니다. 삶에 반하는 죽음이 아니라 반응적인 삶입니다.

분명한 것은 니체가 정신과 신체, 인식과 삶의 진부한 이분법 안에서 후자의 손을 들어주었던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들뢰즈에 따르면 니체는 “소크라테스가 삶을 인식에 봉사하도록 했다고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반대로 사유를 삶에 봉사하도록 했다고 비난”합니다. 이게 무슨 말일까 한참 고민했습니다; 사유가 삶에 봉사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라는 질문에 사로잡혔던 것이죠. 아마도 이때 니체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삶’이란 없다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봉사해야 할 것으로서의 삶이란 결국 인식의 틀에 의해 규정된 삶, ‘합리적 삶’에 다름 아닐 것입니다. 들뢰즈는 “합리적 인식이 삶에게 규정하는 것과, 또 합리적 삶이 사유에게 규정하는 것은 동일한 한계들”이라고 말합니다. 채운샘은 사유란 세계를 해석하는 힘이고, 삶의 역량이란 곧 사유의 역량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삶을 긍정한다는 것은 사유로 하여금 삶에 봉사하도록 하는 일이 아니라, 인식의 틀을 넘어서 사유를 실험하는 일이 아닐까요?

“삶이 할 수 있는 거의 끝까지 갈 사유, 삶을 그것이 할 수 있는 것의 끝까지 갈 사유. 삶에 대립하는 인식 대신에 삶을 긍정할 사유. 삶은 사유의 적극적 힘일 것이지만, 사유는 삶의 긍정하는 능력일 것이다.”(질 들뢰즈, 《니체와 철학》, 민음사, p.184)

그렇다면 예술이란 무엇인가? 채운샘은 우리가 우리 인식의 틀을 벗어나는 예술에 대해 느끼는 거부감은 곧 우리가 우리 삶의 예측 불가능성에 대해 느끼는 거부감과 동일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인과로 꿰어지지 않는 영화나 소설, 내러티브를 파괴하고 익숙하고 편안한 이미지를 비틀고, 폭력적으로 우리의 감각을 열어버리는 예술. 어쩌면 예술의 이러한 특성들은 삶 자체에 고유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인과로 꿰어지지 않고 합리적으로 설명되지 않으며, 익숙함에 안주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삶.

“비극적 예술가는 자신의 무엇을 전달하는 것인가? 그가 보여주는 것은 다름 아닌 끔찍한 것과 의문스러운 것 앞에서의 공포 없는 상태가 아닌가?”(프리드리히 니체, 《우상의 황혼》 24절)

예술은 불가해 자체로서의 삶을 긍정합니다. ‘삶’을 위해 봉사함으로써가 아니라 삶의 끝까지 감으로써! 삶을 반응적으로 만드는 인식에 맞서 능동적인 힘을 구성하는 것. 그것은 불가해로써의 삶을 끔찍한 것과 의문스러운 것을 공포 없이 마주하는 일이 아닐까요. 니체에게 예술이란 ‘관조’와는 거리가 먼 활동이었습니다. 예술은 무엇보다 ‘행하고자 하는 힘’을 구성하는 ‘느낌’과 관련된 활동이며 예술적 활동이란 인식을 넘쳐흐르는 힘을 느끼고 표현하는 일입니다. 니체에게 예술가란 새로운 힘을 느끼고 표현하는 자라고 합니다. 실재(혹은 이성)에 도취된 자가 새로운 힘들에 도취된 자.


다음 주 공지 나갑니다.


간식 : 크느샘 & 윤순샘

과제 : 1. 《즐거운 학문》 3부, 유고 《1881년 봄~1882년 여름》 11[10], 11[12], 11[13], 11[19], 11[21], 11[30], 11[31], 11[51], 11[65], 11[69], 11[70], 11[79] (p. 425~459 사이) 읽기/ 2. 읽은 것을 바탕으로 ‘인식과 도덕의 문제’를 주제로 공통과제 쓰기(인식과 도덕이 어떻게 직결되어 있는가?).
전체 2

  • 2018-06-09 17:00
    사유, 삶을 긍정하는 능력! 이 순간의 공부를 되돌하보게 하는 니체였습니다.

  • 2018-06-10 16:33
    예술, 인식, 사유, 감각, 삶 등등에 대한 니체의 도발적이면서 섹시한 말들을 보다 보니 저도 뜨끈뜨근해지는 것 같습니다. 다만 생각하는 걸 끝까지 밀어붙이지 않는 이상 이 뜨근뜨근함은 그냥 도취된 상태겠죠. ㅋㅋ 아직 가까워지기에 먼 거리가 느껴지는 니체지만 일단 그의 매력에 빠지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