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SF절차탁마 6월 20일 공지

작성자
박규창
작성일
2018-06-15 19:40
조회
132
어느 새 니체의 《즐거운 학문》도 절반을 읽었네요. 하지만 읽을수록 점점 더 모르겠어요! 단순히 인식, 이성, 도덕은 나쁜 것이고, 신체, 감각, 충동은 좋은 것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로는 이해할 수가 없군요. 분명 비판의 지점이 있지만 동시에 니체는 삶의 조건으로서 도덕, 이성을 사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읽으면서 도덕이나 이성 같은 것들이 우리에게 어떻게 작용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관계 맺어야 하는지 등등 생각할 지점이 한둘이 아니더군요.;; 채운쌤은 니체의 구절들을 분해해서 대충 때려 맞추지 말고 적극적으로 해석하라고 하셨는데, 아마 생각해야 될 지점에서 생각을 멈췄기 때문이겠죠.

공지 먼저 하겠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4부와 이번 시간에 나눠드린 프린트물 “진리의 개념”을 읽으시면 됩니다. 공통과제는 진리란 무엇이고, 진리는 어떻게 발생하며, 나에게 진리가 어떻게 작용하는지 등등의 질문을 통해 ‘진리의 계보학’을 작성하시면 됩니다. 머리 아프지만 그만큼 재밌는 니체와의 만남이 되길 응원합니다. ^_^ 간식은 호정쌤과 영님쌤께 부탁드릴게요~

이번 시간 채운쌤이 내주신 과제의 주제는 ‘도덕과 인식의 관계’를 정리하는 것이었죠. 과제의 주제를 정리하는 걸 중점으로 후기를 써보겠습니다.

1.세계는 카오스다

흔히 도덕과 인식은 분리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행위규범으로서의 도덕이 따로 있고, 그것을 우리가 인식해야 한다고 말이죠. 이에 따르면, 도덕적인 사람은 도덕을 알기 때문에 도덕적인 것을 행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도덕을 아는 것은 누군가 도덕이라고 규정한 것을 받아드려야 합니다. 이렇게 이성을 우위에 두게 되면 우리는 외부의 정보를 그저 받아들이고 따르는 도덕주의자가 될 수밖에 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니체에 따르면, 세계는 부분이 전체를 위해 봉사하는 하나의 유기체도 아니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작동하는 기계가 아닙니다. “이 세계의 전체적 성격은 영원한 카오스”(184쪽, 109번 〈경계하자〉)입니다. 이때 니체가 말하는 카오스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질서가 결여된 것으로서의 카오스가 아닙니다. 채운쌤은 니체가 말하는 카오스는 규정되기 이전의 상태, 헤시오도스가 말하는 카오스와 비슷하다고 하셨습니다.

《신들의 계보》에서 헤시오도스는 우주의 생성과정을 얘기할 때 맨 처음 카오스가 있었다고 말합니다. 이때 카오스란 규정이나 분별이 일어나기 전 하나의 덩어리와 같은 상태입니다. 가이아의 출산이 우주에 질서를 세우고, 규정하는 행위를 뜻한다면, 카오스는 그러한 출산을 가능케 하는 규정 이전에 존재하는 근본적인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세계를 카오스로 파악한다는 말은 세계가 규정된 법칙에 의거하여 운동하지 않음, 인간적 가치관으로 세계를 대상화하지 않음을 뜻합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생물의 진화입니다. 모든 생물은 생존을 목적으로 각자의 조건 속에서 신체를 변화시키며 적응 과정을 가집니다. 만약 그 적응 결과가 환경에 적합하다면 생존하게 되고, 그렇지 않으면 도태됩니다. 즉, 생물의 진화는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우연한 변화일 뿐 특정 상태를 위한 의도적인 발생이 아닙니다. 세계에 절대적 진리, 고정불변의 법칙이 없기 때문에 인식은 진리와 관련된 행위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합리적으로 세상을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은 무엇이 유용한지 선험적으로 알 수 없음을 뜻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인식은 합리성에 의해 작동하지 않습니다. 니체에 따르면, 우리가 진리라 믿는 것은 우리의 종족 보존에 유용한 오류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결과적으로 유용한 오류를 시간이 지나면서 마치 원래 그렇게 되기 위한 목적으로 착각합니다. 니체는 이러한 결과와 목적의 혼동을 구별해내고, 우리의 인식은 삶의 유용성에 비추어 무엇을 알고자 하는 충동임을 밝힙니다. 즉, 인식은 진리가 아니라 오류(충동)과 관련된 활동입니다.

2. 느낌으로서의 도덕

인식을 포함한 인간의 모든 행위가 충동으로부터 비롯된다면 도덕이란 무엇일까요? 니체는 “인식은 도덕의 마지막 단계”(431쪽, 유고 11[19])라고 말하면서 인식에 이미 도덕이 포함되어 있음을 지적합니다. 이때 니체가 말하는 도덕은 행위규범으로서의 도덕이 아니라 느낌, 감정 자체로서의 도덕입니다. 니체에서 가장 재밌는 점은 바로 충동이나 느낌, 감정으로부터 철학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니체에 따르면, 우리가 선하거나 악하다고 판단하는 것은 그에 대한 우리의 좋음과 나쁨이라는 느낌의 결과입니다. 즉, 선과 악이 선험적으로 존재하고 어떤 행위가 선과 악으로 판단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좋게 혹은 나쁘게 느낌에 따라 그것을 선하거나 나쁘다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도덕을 받아들이는 것은 단지 나의 사회적 생활을 보다 용이하게 하는 차원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내가 세상을 어떤 방식으로 판단하고 해석하는 차원과도 관련됩니다.

재밌는 것은 우리가 도덕이라고 말하는 것도 우리의 느낌으로부터 비롯됐다는 사실입니다. 니체는 유대교가 번개가 자주 치는 흐릿하다가 가끔 햇빛이 내리비치는 유대적 풍토와 관련되었다고 말합니다. 풍토뿐만 아니라 식습관이 사고와 감정에 큰 연관이 있다고 말하며(145번 〈채식주의자의 위험〉) 섭생이 매우 중요한 요소임을 보여줍니다.

고귀한 자는 고귀한 행동을 하기 때문에 고귀한 자이고, 비속한 자는 비속한 행동을 하기 때문에 비속한 자입니다. 그리고 고귀함과 비속함을 가르는 것은 충동과 감정 그 자체가 아니라 충동과 감정을 느끼는 방식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느낀다는 것은 이미 어떤 관계를 맺고 있음을 뜻하고, 모든 관계는 동일하지 않은 힘들의 만남입니다. 이때 동일하지 않은 힘들에 대한 느낌이 힘의지입니다. 아직 힘의지가 두루뭉술합니다만 ^_^;; 만약 이성우월주의자들처럼 진리를 추구하며 습관화된 인식에 만족한다면 비속한 자일 것이나, 니체처럼 익숙한 것으로부터 고통을 느끼며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면 고귀한 자이겠지요.

3. 목적 없는 삶에 대한 긍정

니체는 자연을 대상화하지 않고 어떻게 자신이 카오스 그 자체인 자연에 속해 있음을 인식하고 긍정할 수 있는지를 고민합니다. 니체는 “자연의 필연성”을 말하는데, 이때 그가 말한 필연성이란 개체의 입장에서는 우연이지만 전체의 연쇄과정에서는 필연으로서의 필연성입니다. 채운쌤은 니체의 철학을 설명할 때 우연이나 필연을 얘기해도 되지만, 어디까지나 목적과 반대된 의미에서 사용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목적 없이 살아가는 삶을 어떻게 긍정해야 할까요? 이 고민은 나중에 인간의 유한한 실존에 대한 긍정인 디오니소스적 긍정과 연결됩니다. 목적 없는 삶에 대한 긍정은 동양철학을 읽으면서도 많이 고민이 되는 지점인데, 이번에 니체를 통해 다르게 생각해봐야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니체에게 영향을 끼친 고대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와 파르메니데스를 간단하게 정리하고 후기를 마무리하겠습니다.

생성(Becoming)과 존재(Being)은 철학적으로 따지면 같은 지평에 놓기 어려운 개념이라고 합니다. 왜냐면 생성이란 어떤 상태로 되어가는 것이고, 존재란 어떤 상태로 계속 있는 것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헤라클레이토스와 파르메니데스는 각각 생성과 존재를 중심으로 철학을 전개했다는 점에서 다르지만, 로고스를 사용함으로써 삶을 긍정하고 일대다의 관계를 사유했다는 점에서 공통됩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세계를 대립적인 것들의 지속적인 투쟁으로 파악했습니다. 이때 투쟁은 역동적 균형상태로, 하나가 제3의 것으로 바뀌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대립물로 바뀌는 것을 말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건강과 병입니다. 이 둘은 대립적인 것처럼 보여도 서로가 서로를 인식하게 만들어줍니다. 돌이켜보면, 우리가 건강을 가장 의식하는 순간은 병에 걸렸을 때입니다. 신체가 잘 움직이지 못할 때, 아플 때 부자유한 자신의 신체를 인식함과 동시에 건강한 상태를 떠올리게 되죠. 병이 건강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듯이, 헤라클레이토스는 존재 역시 자신과 대립되는 것을 내포함으로써만 존재의 동일성을 유지한다고 말합니다. 이때 모든 존재가 생성을 기반으로 한다는 점에서 만물은 하나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를 알 수 없는 것은 감각이 우리를 속이기 때문입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감각에 따른 경험을 통찰이라 생각하며 우왕좌왕 살아간다고 말합니다. 개체는 자신의 동일성을 유지하기 위해 동일성을 해치는 것을 내포합니다. 다시 말해, 생은 죽음을 내포해야만 생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이러한 실존적 비극을 헤라클레이토스는 로고스를 통해 우리의 감각의 속임수를 간파하고, “운명적 필연성”을 인식함으로써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파르메니데스는 기본적으로 생성을 환상이라 생각하며 ‘있는 것’에서 사유를 시작합니다. 생성은 A가 되기 위해 A가 아닌 상태, A로 되어가는 상태를 필요로 합니다. 하지만 논리적으로 따졌을 때, A가 아닌 것에서 A는 생겨날 수 없습니다. 헤라클레이토스처럼 파르메니데스도 감각이 우리를 속인다고 생각했지만 그 양상은 조금 다릅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현실과 진리를 대립시키지 않았습니다. 비록 감각은 다양한 것들을 지각하게 만듦으로써 속이지만, 헤라클레이토스는 로고스를 통해 존재와 생성의 관계를 알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반면에 파르메니데스는 생성은 ‘있지 않음’이고, ‘감각은 환상’이라 말하며 철저한 논리를 통해 진리에 이르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진리는 원래부터 그러한 상태로 변하지 않는 영원불변의 일자(一者)로, 감각이 지배하는 현실에서는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논리적으로 알 수 있다는 것은 곧 그것이 있음을 뜻합니다. 모든 있는 것은 과거부터 지금, 미래에 까지 계속 그 상태로 변하지 않습니다. 파르메니데스는 감각을 배제한 철저한 논리를 통해 세계를 파악함으로써 근원적 일자에 이를 수 있고 한다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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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6-16 21:22
    복종도 예속도 모르는 자연의 필여성. 자연은 도덕을 모른다! 카오스를 긍정한다는 것, 인간을 자연화한다는 것, 중요한 화두를 안고 가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