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세미나

11.12 셈나 공지

작성자
수경
작성일
2015-11-06 11:16
조회
595
<율리시즈> 1권을 읽고 모인 아침, 한 분씩 들어오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생각보단 재미있는데, 이걸로 무슨 얘길 하지? 딱히 스토리도 없고 이입될 만한 게 없던데. 낯설어서 초반에는 글자만 읽었어.

1920년대에 나온 소설이지만, 어쩌면 <율리시즈>는 소설의 '끝' 같은 게 아닐까 싶습니다.
이 작품 후에도 물론 아주 많은 소설들이, 현재까지도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만, 이 소설은 뒤이어 나온 모든 소설들보다 훨씬 앞서 소설의 끝에 가 있었던 게 아닐까요.
독자를 주목시키는 서사가 사라지고, 같은 말이지만 하나의 내러티브로 독자를 끌고 가는 나래이터가 사라지거나 축소되고, 문학/언어/글쓰기 그 자체에 대해 묻게 하는 소설.
그런 의미에서라면 세미나 참가자들 모두 정확히 읽으신 것 같아요.
네, 낯선 소설, 독자가 의지하거나 이입할 만한 구석을 허용하지 않는 그런 소설입니다.
이를 다르게 표현하자면, <율리시즈>는 독자의 능동성이 수반되지 않고서는 읽힐 수 없는 그런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문학 공부를 하지 않으셨어도 '의식의 흐름' 기법에 대해서는 왕왕 들어보셨을 텐데요... 이번에 세미나를 하면서 느낀 것은, 의식의 흐름 기법은 등장인물의 의식 내 운동 그 자체, 의식 생성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겁니다.
의식의 '내용' 자체를 '해석'하는 데 주안점이 있기보다는, 매번 주변 환경(자연풍광, 들리는 소음, 그의 지성을 이룬 담론들, 역사적 상황 등)과 등장인물의 생체 조건 등에 따라 민첩하고 변화무쌍하게 움직이는 의식을 직접 보고자 하는 것이라는 거죠.
비평 방법론 중 정신분석학적으로 작품에 접근하는 게 한참 유행했습니다만, 조이스의 이 소설이야말로 그런 방법이 참 무용하게 느껴지는 작품 아닌가 싶습니다.
조이스가 파헤치고 싶은 건 아무리 봐도도 블룸의 말과 기억에 담긴 속뜻, 그의 내면 같은 게 아닌 것 같거든요.
<율리시즈>의 독자는 내래이터가 편집하고 전달하는 블룸의 말과 행동이 아니라 블룸의 의식과 직접 접속합니다.(그러길 요구받습니다)
작품은 낯선 구두점들, 단어 형태로 끝나버린 문장, 알 수 없는 문장들의 끝없는 나열만 펼쳐놓고 있지요.
나래이터가 전달하는 해석에 기대어 소설을 읽는 데 익숙해진 독자라면 이 앞에서 그만 마음의 문을 닫아(-_-)버릴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거꾸로 생각해보면 소설을 읽기 위해 독자가 어떤 배움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 어떤 지성이 요구되는지 보여주는 아주 훌륭한 예 아닌가요?
진희쌤도 공통과제에서 이렇게 쓰셨네요.
"하나의 작품이 문학이 되는 지점은 우리의 의식을 지배함으로써 삶까지 지배하는 단단하고 고정된 틀을 흔드는 바로 거기에 있다고 할 것이다.
헷갈리게 만들고, 이해하지 못하게 만드는 작품, 거기서부터 더듬더듬 새롭게 구성되는 나름의 문학.
<율리시즈>는 단단한 서사적 구조가 부재하는 것으로서의 작품, 문학을 생산하는 작품이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우리, 다음 주에는 더더욱  전의를 불태우며 달려들어보자구요 ㅋㅋ

혜원이는 "등장인물들의 의식은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에 비견될 만한 풍성함을 보여준다"고 했는데 전적으로 동감입니다.
미영쌤 말씀대로 아무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 소설임에도 이토록 풍성(친절하지는 않지만;)할 수 있다는 게 놀랍지요.
그동안 우리가 읽은 소설들, 우리가 소설에 기대하던 것들, 우리가 소설을 읽는 방식들 모든 곳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는 작품 같습니다.

"서구인들과 같은 문화, 역사적 환경에서 살고 있지도 않은 우리가, 한국어로 번역된 <율리시즈>를 읽고, 문체나 기법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무슨 의미를 갖나?"
현옥쌤의 질문입니다.
생각해보면 이런 어려운 소설일수록 소위 '전문가'의 독해 방식에 기대어 읽다보니 오히려 의존적이고 기계적인 방식을 취하게 되는 것 같기도 하네요.
그리고 저 자신, 셰익스피어를 연상케 하는 대목마다 더 큰 재미를 실제로 느꼈던 만큼, 서구인과 한국인 사이에 <율리시즈> 독해의 기쁨과 어려움의 정도도 분명 다를 것 같긴 합니다.
헌데 또 한편으로  드는 생각은, 번역, 특히 문학의 번역이란 그 자체로 불가능한 시도로서 하나의 온전한 문학 행위이며, 율리시즈 번역은 그것을 통해 한국어의 지평을 넓힌다는 데 그 의미가 있다는 겁니다.
혜원이가 전에 지나가듯 얘기했는데, 번역행위 자체에 대한 책을 읽고 함께 공부해봐도 재미있을 듯해요.

자, 다음 주에는 <율리시즈> 2권까지 읽어오심 되고요. 공통과제는 문정 / 소현쌤 부탁드립니다. 간식은 연실쌤.
오전에 문학셈나 하고 오후에는 연실쌤, 미영쌤, 현옥쌤, 혜원, 문정, 저 이렇게 많은 멤버가 다시 모여 원일쌤의 음악강좌를 신나게 듣고 있습니다.
목요일 하루는 정말 호사스런 날이네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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