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문톡톡

[스피드웨건화] 1화 : "여성 징병제 이슈 털기"

작성자
규문
작성일
2021-06-03 22:16
조회
455


* '스피드웨건화'는 앞으로 4회에 걸쳐 연재될 파일럿 코너입니다.
컨셉은 오직 '참견'과 '설명'. 우리 주변의 따끈따끈한 이슈들을 사사건건 참견하고 시시콜콜 설명합니다!
1화에서는 '여성 징병제 이슈'와 '이십대 남자 현상'을 다뤘고,
다음화에서는 연구실 학인들을 한 동안 멘붕에 빠뜨렸던 푸코의 성착취 논란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많은 관심과 참견(댓글) 부탁드려욧!
자 그럼, "설명을 시작해볼까?"



1화 : 여성 징병제 이슈 털기


글 : 건화



남자만 군대에 가야할 이유는 없다


어째서 남자만 군대에 가야 하는가? 이 유치해 보이는 질문이 최근 들어 또 다시 진지하게 제기되고 있다. ‘여성도 징병 대상에 포함시켜주십시오’라는 청와대 청원은 종료시점까지 293,140명의 참여를 동원했다(답변 기준인 20만 명을 초과달성). 이 낡은 이슈는 왜 또 새롭게 불거지고 있는가? 알다시피 지난 4월 재보궐선거에서 20대 남자 72%가 오세훈 현 서울시장에게 표를 줬고, 이에 반응한 정치인들은 재빠르고도 게으르게 군대 이슈를 꺼내들었다. 그 가운데 박용진 의원의 ‘남녀평등복무제’가 가장 크게 이슈 몰이를 했고, 여성 징병제 청원은 그에 대한 하나의 응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제기된 질문에 답해보자. 남자만 군대에 가야하는 이유는? 헌법은 분명히 “모든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방의 의무를 진다”라고 말한다. 이것만 보면 여자도 군대에 가야 할 것 같지만 병역법은 조금 다른 말을 한다. 대한민국 남성은 병역의무를 성실히 수행해야 하고 여성은 자원에 의해서만 복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왜 모든 국민이 국방의 의무를 진다고 해놓고 그 의무를 남자는 강제로, 여자는 자율적으로 이행하도록 하는가? 헌법재판소의 대답은 ‘안보’다. 2014년 헌법재판소는 남성만의 의무복무를 합헌으로 결정했는데, ‘최적의 전투력’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 그 근거였다. 여성은 남성에 비해 근력이 떨어지는데다가 월경과 임신 등 군사훈련에 부적합한 신체적 조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여성의 생래적 결격사유를 감안하면 징병하지 않는 게 안보에 이로운 결정’이라는 결론”(이상원, <여성 징병제는 왜 ‘재밌는 이슈’가 아닌가>, 시사인)이다.

헌법재판소의 답변은 석연치 않은 데가 있다. ‘여성의 생래적 결격사유’를 지적하는 헌재의 논리는 남녀 간의 임금격차를 정당화하는 구태의연한 편견과 닮아 있지 않은가? 그리고 모르긴 몰라도 현대전에서 ‘전투력’에 병사의 신체능력이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되겠는가? 이미 2,500년 전에 플라톤은 여성들도 남성들과 함께 수호자로 양성되어야 하며 남성들과 똑같이 상의 탈의를 하고(!) 신체단련에 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스라엘, 스웨덴, 덴마크, 볼리비아 등 이미 여성 징병제를 시행하고 있는 나라들도 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20~30대 여성의 과반 이상이 여성 징병에 대해 묻는 설문에 여성도 군대를 가야 한다고 답했다는 점이다(2019년 조사 결과). 물론, 남성들이 여성 징병제를 말하는 맥락과 여성들의 맥락은 조금 다를 수 있다. 여자들은 군복무를 이유로(혹은 핑계로) 취업전선에서 남성들이 부당한 우대를 받고 있다고 여긴다. 그러니 군복무가 차별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된다면 자신들도 정정당당하게 군복무를 하겠다는 것.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종합해보자면 남성들만 군대에 가야 한다는 생각에는 이렇다 할 근거가 없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여성 징병제 도입은 평등하고 공정한 사회로 나아가는 길일지도 모른다. 여성 징병제 청원자는 여성혐오를 조장하기는커녕 성평등을 부르짖고 있다. “여자는 보호해야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나라를 지킬 수 있는 듬직한 전우가 될 수 있습니다.”



군사력의 ‘필요’


그런데, 남자만 군대에 가야 할 별다른 이유가 없다는 것이 곧바로 여자도 군대에 가야 할 이유가 되는가? 당연히 그렇지 않다. 군복무라는 불이익을 여성들도 같이 짊어지게 한다고 해서 남성들이 받는 불이익이 없어지거나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여성들이 똑같이 국방의 의무를 수행한다고 성차별이 사라지리라는 보장도 없다. 의무적인 군복무가 남성들에게 억압과 불이익으로 느껴진다면 여성 징병제 도입이 아니라 징병제 자체를 폐지하는 것이 합리적인 해결책이다. 더 이상 군대 가야 사람 된다는 통념이 작동하지 않고 조국수호의 눈물겨운 신념 같은 것이 누구의 가슴도 뛰게 할 수 없다면, 원하는 사람만 군대에 가도록 하고 충분한 보상을 해주면 된다.

물론, 이렇게 말하면 곧바로 예상 가능한 반박이 제기될 것이다. 출산율 감소와 인구절벽으로 인한 병력의 누수가 우려된다는 것이다. 현재 대한민국 남성의 징집률은 90%에 육박한다. 그럼에도 앞으로 이전과 같은 수준의 병력을 유지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다. 따라서 여성에 대한 징병을 통해 부족한 병력을 충원하자는 이야기다. 그러나 여기에는 의심되고 있지 않은 전제가 있는데, 병력을 반드시 현재와 같은 규모로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한국은 병력 자체도 많고, 인구대비 군인 비율도 매우 높은 편이다. 한국의 인구 대비 군인 수는 1.1% 수준인데, “대다수 국가의 인구 대비 군인 비율은 0.3~0.8% 정도다. 1%를 넘는 경우는 손에 꼽는다.”(이오성, <모병제는 모래성인가>, 시사인) 무리하게 여성 징병제를 도입하면서까지 이렇게 높은 수준의 병력 규모를 유지해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여성 징병제 도입 옹호론자들은 ‘고개를 들어 북쪽을 보라’라고 말할 것이다. 인구 대비 군인 비율이 무려 4%인 북한이 휴전선 너머에 버티고 있으니 평화를 위해서는 대규모의 병력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선은 (앞서 언급했듯) 현대전에서 병력의 규모가 전투력에 차지하는 비중이 어느 정도인지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북한에 대한 공포가 실체가 있는 것인지도 질문해보아야 할 것이다. 한국의 군사력은 세계 6위이고 북한은 28위다. 이러한 실정에서 모병제로 전환하는 데에 따른 병력규모의 감소가 정말로 대한민국의 안보에 치명적인 위협을 가져오게 될 것인가? (물론, 상식적인 대답은 ‘아니오’일 것이다)

문제는 얼마만큼이 ‘적정한’ 병력규모인지에 관한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징병제 전문가인 백승덕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에 따르면 “징집을 담당하는 병무청 관계자조차 동상이몽이다. 어떤 이는 북한을, 어떤 이는 중국을 적국으로 놓고 병력을 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일본을 잠재적 적국으로 봐야 한다는 사람도 있다. 어떤 안보 목표 아래 어느 정도 군인이 필요한지 생각이 다르다.”(이오성, <모병제는 모래성인가>, 시사인, 재인용)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논의는 ‘어떻게 현재규모의 군사력을 유지할 것인가?’가 아니라 ‘우리에게 어느 정도의 군사력이 필요한가?’이다. 담당자들과 전문가들조차도 ‘적정 군사력’에 대한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여성 징병제 논의는 엉뚱한 방식으로 제기되어야 할 질문과 사회적 합의를 차단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어디에서부터 ‘적정 군사력’에 대한 논의를 시작할 수 있을까? 우선 높은 군사력이 평화를 유지시켜준다는 생각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이 모든 현실적인 조건 속에서도 여전히 병력의 규모를 유지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고한 이유는 군대가 평화에 대한 필요와 상상력을 근본적으로 독점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평화가 더욱 강력한 살상무기와 더 많은 병력의 보유를 의미하는 한 우리는 어떤 질문도 제기할 수가 없다. 그러나 이러한 전제는 우리의 믿음에 기초하고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물론 국가는 나라의 수호를 위해 군대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푸코에 따르면 “살아남을 수 있기 위해 죽일 수 있어야 한다는 원리”(미셸 푸코, 《성의 역사 Ⅰ》, 난장, 156쪽), 어느 한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다른 국민을 전반적인 죽음의 위험에 노출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전제는 19세기에 이르러 처음 형성된 것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이 낳은 결과가 바로 역사상 가장 파괴적인 결과를 초래한 1, 2차 세계대전이고, 원자폭탄이다. 이 전제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 평화에 대한 우리의 상상력은 자멸적인 것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우리는 우리에게 얼마만큼의 군사력이 필요한지, 그리고 그것이 왜 필요한지 질문해야 한다. 어쨌든 아무도 그런 질문을 던지고 있지 않은 것 같으니 말이다.





‘이남자’는 누구인가?


물론, 여성 징병제 이슈는 해프닝으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 애초에 ‘20대 남자 달래기’ 용으로 제안된 조잡한 정책이 몰고 온 이슈가 아니었던가. 그러나 여전히 그 미끼를 꽉 물어버린 이십대 남자들의 감수성에 대한 질문은 절실하다. 청원에 참여한 293,140명과 서울시장재보궐선거에서 2번을 뽑은 72.5%의 ‘이남자(이십대 남자)’들. 이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무엇을 겪고 있을까? 나는 이들에게 어떤 말을 건넬 수 있을까?

몇 년 전부터 자기 자신을 사회적 약자로 여기고 ‘역차별’이라는 아젠다를 적극적으로 내세우는 새로운 남성 주체들에 대한 분석이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번 서울시장재보궐선거를 거치면서 ‘이남자’는 본격적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 나도 그 세대의 일원이건만, 이들을 중심으로 형성되는 이슈에 대한 나의 즉각적인 반응은 냉담함이었다. ‘아아, 찌질해도 너무 찌질하다!’ 솔직히 이해가 잘 안 됐다. 살기가 팍팍하다고들 하는데, 그렇다면 어째서 비싼 등록금을 받아쳐먹는 대학이나 병사들을 공짜 노동력으로 여기는 군대나 노동자들을 언제든 갈아 끼울 수 있는 부품으로 여기는 기업과 싸우지 않는가? 어째서 이들은 자신들의 답답함을 페미니즘에 대한 혐오나 여성징병제 청원 같은 쪼잔한 방식으로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걸까? 최근의 박나래 성희롱 논란과 여러 기업들의 남성혐오 이미지 논란을 접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어째서 우리 세대(그 중에서도 특히 남성들)의 정치적 아젠다는 이토록 쩨쩨하고도 몰지각한 권리투쟁에 국한되어버리는 걸까?






이러한 부정적 감정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저들과 나를 최대한 분리시키는 것, 저들과 묶이지 않기 위해 더 강하게 비난하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 ‘이십대 개새끼론’에 동참하고 있었다.

"‘이남자’는, 어떤 점에서는, 즉 72.5%라는 어떤 감정(‘아, 엿 같아!’)이 존재한다는 점에서는 분명 실존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 감정은 변화무쌍하며 이 감정들의 맥락은 통약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이남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여 우리는 (…) 세대프레임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이희경, 《아젠다》 11호, 〈‘이남자’를 아세요?〉 中)


그러다 얼마 전 길드다 《아젠다》에 올라온 문탁 선생님의 글을 읽고 나의 즉각적인 거부반응을 돌이켜보게 되었다. 문탁 선생님은 본인 주위의 이(삼)십대 남성들이 지닌 통약불가능한 차이들에 주목하셨다. 나를 포함하여 내가 알고 있는 이십대 남자들 또한 마찬가지다. 언론과 정치인들은 이남자, 이대남 떠들어대지만 그들이 지닌 상이한 삶의 맥락과 다양한 욕망들을 고작 세대와 성별, 그리고 몇 가지 이슈들에 대한 입장을 가지고 퉁쳐버릴 수 있을까? 그런 식으로 세대를 실체화하는 것은 누구를 비난해야 하고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하는지 알려주려는 정치인과 전문가들이 하는 짓이 아닌가? 나 또한 몇몇 경험들과 기사로 접한 말들과 선거 결과를 종합해서 ‘찌질한 이십대 남자’라는 관념적 실체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분명한 것은 이렇게 이십대 남자를 뭉뚱그리고 그들을 세대 프레임에 가두는 것이 나의 동세대들을 ‘이해’하는 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나는 비난하고 심판하면서 그들을, 그리고 나 자신을 고립시키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설픈 세대론은 정치인들에게 맡기자. 대신에 나는 72.5와 293,140이라는 숫자로 드러난 어떤 감정(‘아, 엿 같아!’)의 결들을 좀더 섬세하게 살펴보고 싶다. 그동안 나는 이러한 분노가 ‘틀렸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자신들을 소외시키는 사회적 구조에 대해 ‘제대로’ 문제를 제기하기는커녕 엉뚱하게 다른 사회적 약자들에게 분풀이를 하고 있다고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진단에는 경제주의적 전제가 작동하고 있었다. 청년들의 ‘분노’와 ‘좌절’은(그런데 그들은 정말로 비장하게 분노하고 처절하게 좌절하고 있는 게 맞기는 한가?) 경제적 불안정에 대한 반응이라는 생각. 청년들의 불행은 괜찮은 일자리와 안정된 미래와 탄탄한 복지시스템의 ‘결여’ 때문이라는 생각. 따라서 이남자들이 진정으로 스스로의 삶을 ‘개선’하고자 한다면 상대적 약자들과 싸울 것이 아니라 기득권들에게 저항해야 한다는 결론. 이러한 판단은 틀렸다기보다는 편협하다. 이는 경제적 조건만 안정되면 불만이 잠잠해질 거라고 믿는다는 점에서 청년들의 삶에 대한 존중을 결여하고 있으며, 그들의 행불행이 외부적 조건에 달려있다고 결론 내린다는 점에서 청년세대들을 무력화하는 논리를 작동시킨다. 그리고 결국에는 경제성장이 이루어져야 일자리를 늘리고 복지를 확충하여 청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될 것이다.



잃어버린 존재감을 찾아서


이남자들의 분노 혹은 불평이 ‘틀렸다’는 판단을 내려놓으면 조금 다른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나는 이들이 ‘존재감’을 회복하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생각해보자. 광복 이래로, 아니 모르긴 몰라도 한반도 역사를 통틀어서 남자만 군대에 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그런데 왜 유독 2020년대의 이십대 남자들만 군복무에 이토록 억울함을 느낄까? 그것은 군복무가 더 이상 사회적 지위와 그에 따른 존재감의 확보로 이어지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은 군에 가지 않은 사람이 취직에 불이익을 받도록 했고, 취업훈련을 시키고 특례를 주는 등 군복무가 경제활동으로 이어지도록 했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 ‘남성이 군인이 되고, 그를 통해 국민이 되는’ 것은 자명한 사실로 받아들여졌다. 군대에 갔다 오면 건실한 노동자가 되고 든든한 가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군대를 다녀와도 여전히 쓸모없는 존재일 뿐이다.

이십대 남자들은 잃어버린 존재감을 찾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이들은 존중받고 있다고 느끼고 싶은 것이 아닐까? 사람들이 자신들의 말을 듣고 노고를 인정해주는 것, 그리하여 스스로를 가치 있는 존재로 느끼게 되는 것. 이것이 그들이 원하는 바가 아닐까? 그래서 이들은 착취보다는 ‘역차별’에 분노하고, 소득의 불평등보다는 경쟁에서의 불공정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들에게 ‘너희들은 틀렸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스스로의 존재감을 느끼는 것은 괜찮은 일자리를 얻거나 훌륭한 복지를 누리는 것만큼이나, 어쩌면 그 이상으로 중요한 일이니까. 물론, 국가가 나서서 이십대 남자들의 잃어버린 자존감을 찾아주어야 한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 반대다. 정치인이, 제도가, 자본이 내가 누구인지를 알려주고 나의 존재감을 되찾게 해줄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버려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국가와 자본이 더 이상 좋은 삶의 비전을 제시해주지 못한다면 우리는 스스로가 원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 누구와 함께 그러한 삶을 만들어가고 싶은지를 진지하게 질문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물론 내게도 이렇다 할 대안은 없다. 솔직히 더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 역시 나름대로 자기 존재감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자존하는 삶을 꿈꾼다. 외부적 조건에 의존하지 않고, 나의 사유와 활동 안에서 나 자신의 존재감 느끼며 살아가고 싶다. 그럴 때 비굴하지 않게, 떳떳하고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욕망으로 책을 읽고 글을 쓴다. 어떻게 해야 다른 누군가를 배제하지 않고, 외부적 조건이나 타인의 인정을 구하지도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잃어버린 자기 존재감을 찾을 수 있을까? 이것이 우리 ‘이남자’들에게 남는 질문인 것 같다. 나는 나의 공부를 통해 이를 고민하고 실험하고 싶다. 그리고 그 속에서 내 동세대(특히 남자!)들에게 말을 건네고 싶다.

전체 7

  • 2021-06-04 06:28
    가볍다! 재미있다! 유익하다!
    훈련소에서 "우리 수색대대는 평생의 술안주거리를 제공한다"는 말에 넘어가서 생고생을 하고 왔지만 어디에 풀어놓을 곳이 없어 빠르게 기억을 지워가던 이남자 중 1인입니다. 21개월이 끔찍하기도 하고 아주 가끔 재밌기도 하고 오지에서 진기명기한 경험을 맞봤던 시간이기도 해서 딱히 아깝다는 생각이 들진 않은 것 같아요. 누구더러 대신하라고 하고 싶은 생각은 더욱 안 들고요. 앗 제게도 선을 긋고 싶은 마음이 강한 것 같네요. 그래도 여성징병제는 반대합니다. 다만 자신의 존재감을 어떻게 남을 끌어내리고 손가락질하는 방식이 아닌 방식으로 찾아갈 수 있을지는 함께 고민해야겠어요.
    고마워요, 스피드웨건(화)!

  • 2021-06-04 07:27
    오, 이런 멋진 연재가 시작되다니, 흥미진진 & 기대 만빵입니다~

    '여성 징병제'의 이슈를 건화샘의 섬세한 시선을 따라 털어가다보니 '이남자의 잃어버린 존재감'에 이르는군요... 그런데 저는 이 '잃어버린 존재감'이라는 게 뭔지 고민하게 됩니다. 이남자, 이여자를 떠나 대체 인간이 원하는 '존재감'이라는 게 뭘까요? 스피드 웨건화님의 말씀대로 "외부적 조건에 의존하지 않고, 나의 사유와 활동 안에서 느끼며 살아가고 싶은" 그 '존재감' 이라는 게 뭘까요..?

  • 2021-06-04 13:47
    차별과 불의에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역차별에 사회적 약자를 향해 분노의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낼 때 오히려 자신의 존재감이 위축되나 봅니다.
    비겁함, 찌질함에서 출발하는 어떤 것도 존재 역량으로 남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한 거 같네요.
    그래서 나로부터 출발하는 삶의 양식만이 기쁨이 될 수 있고, 존재 역량이 될 수 있다는 것인데, 음,... 저에게도 숙제입니다.
    accelerator 쫙 밟으면 스피드웨건화 빨리 볼 수 있나요?? 경쾌한 글 잘 읽었어요. 고마 워요, 스피드웨건(화) ㅋㅋㅋ

  • 2021-06-04 18:00
    기다리다가 목 빠지는 줄 알았잖아요!!! 어휴 이제 나의 긴 유목생활도 끝나려나ㅠ 이남자들의 문제는 늘 노답이라고 생각하면서 일베 같은 유해한 매체의 탓으로 결론짓고 말았는데 존재감의 회복으로 문제 설정을 하니까 같이 고민할 지점이 훨씬 많아지고 달리 접근할 희망도 생기고 또 저의 문제가 되기도 하고 그러네요. 왜 니체가 부정과 단념의 덕을 싫어했는지도 더 와닿고 강자 개념도 떠오르구요. 근데 연재를 하면 쭉 하는 거지 파일럿은 뭔 파일럿이에요. 괜히 몇 번 쓰다가 흥미나 소재 떨어질까봐 안전망 치려는 의도는 아닐 거라 생각하며 그냥 정규로 가기를 추천합니다.

  • 2021-06-05 14:30
    오~ 건화샘도 연재 시작했네요~ 잘 모르거나 관심없던 일들인데 이 글 통해 관심갖게 되네요~ 세상사에 참견이 좀 필요한 제게 유익한 글이네요^^

  • 2021-06-09 21:34
    저도 이 '존재감'이란 게 뭘지 생각해보게 되네요.. 니체가 말하는 '힘이 상승하는 느낌' '충만감' '고양감'과 비슷할까요...?
    스피드웨건이 궁금해서 찾아봤더니... 설명충 스피드웨건!ㅎㅎ '스피드웨건화'의 활약도 기대할게요~ 개인적으로 다음화가 몹~시 기대됩니다!

  • 2021-06-28 10:59
    '이남자'현상에 대해 궁금했었는데, 일목요연하게 집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자존감'이라는 프레임으로 다시 바라보니 정말 이남자들에게 공감되고 저도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드네요.
    유용한 프레임 공유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