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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나 사이] 나카자와 신이치의 "극락론(極樂論)"[2]
작성자
규문
작성일
2021-06-07 18:32
조회
450
나카자와 신이치의 <티베트의 모차르트(チベットのモーツァルト)>에 수록된 [극락론] 번역문입니다. 매주 월요일 연재됩니다^^

 

극락론(極樂論) (2)


 

3. 천국의 음악



지옥의 타천사 루시퍼는 얼굴이 세 개이고 몸은 여러가지 생물의 융합체다. 이 남성과 여성이 융합된 신체를 한 괴물을 양성구유(androgynos)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천국의 천사들이 양성구유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의미로 루시퍼를 그렇게 칭한다면, 이는 오용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천사들도 신체를 갖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남성체일까. 여성체일까. 어느 쪽도 아니라면 거세된 남성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남성기를 가진 여성이라고 해야 할까. 아마도 천사는 이것들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양성구유일 것이다. 천사가 두 가지 성을 겸비한다고, 혹은 두 가지 성이 융합된 존재라고 생각한다면 착각이다. 천사를 무성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실제로 신체를 가진 천사를 단순히 무성이라고 말해버리면 천사를 헛되이 관념화 해버리고 마는 것이리라.
신체로 존재한다는 것은 어느 쪽이건 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유방을 가진 남자, 남성기를 가진 여자, 거세된 소년 등 두 가지의 성이 융합된 양성구유는 ‘존재’의 영역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두 가지 성이 융합한 신체는 가벼운 현기증만 나도 금세 두 가지 성을 가진 신체의 존재가 또렷하게 부각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천사와 같은 의미의 양성구유는 존재도 비존재도 아닌, 전혀 다른 영역에 속하게 된다. 천사는 존재한다. 신체를 갖고 나타나니까. 하지만 천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천사의 신체는 남성체도 여성체도 아니며, 두 성의 신체를 융합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천사의 존재양식은 ‘웃음의 에크리튀르’, 눈부신 원무, 천상의 음악 등과 함께 천국이라고 하는 장(場)의 특성을 이룬다. 존재하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닌, 그것들의 ‘사이’에 걸쳐 있으며 존재와 무(無)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천사의 상태는 천국을 이루고 있는 가볍고 화려한 시니피앙의 홍수 상태와 깊은 관련이 있다. 천사는 ‘말하는 것을 그만두지 않는 장’(솔레르스)을 만드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천사는 의미의 형성성(形成性)이 일어나려 하는 순간의 운동성을 가리키는 장이며, 이 운동성은 존재나 의미세계의 구조성에 파악되는 것이 아닌 ‘사이’이기 때문이다. 천사의 ‘공-간’에서는 존재와 의미의 동일성을 만들어내는 반복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차이는 차이인 채로 자유롭게 노닐 수 있다. 때문에 천사들은 끊임없는 운동성 안에서 커다란 원무를 그리며, 한 순간도 동일성의 반복에 떨어지는 일 없이 미세한 차이를 자아낸다. 천사는. 그리고 천국은 차이의 유토피아다. 그것은 끊임없이 ‘존재’를 피해 무한을 향하기에, 초월적 무(無)에 흡수되어 버리지도 않는 운동성 그 자체로서, 결코 ‘말하는 것을 그만두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미 다른 글*에서 말한 것처럼, 의미의 형성성이 막 일어나려는 천사의 ‘공-간’은, 동시에 원초적인 ‘다른 웃음’(크리스테바)이 흘러넘치는 곳에도 존재한다. ‘다른 웃음’은 의미세계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오는 게 아니라 무(無)의 연속체에 불연속점이 부딪쳐 의미의 형성성이 생겨나는 순간 무산되어버리는, 역설적이며 순수한 웃음이다. 이 ‘다른 웃음’은 연속의 과정이 막히고 불연속의 단락이 삽입되는 원초적 분절의 장에서 터져 나오는 것으로, 의미에도 존재에도 속하지 않고, 비존재의 연속체에서 미세하면서도 결정적인 도약을 일으킨다. 그 지점에서 ‘다른 웃음’은 존재와 비존재, 연속과 비연속, 의미와 무의미의 ‘사이’로 빠져나가며 부드럽게 웃는 것이다. 다시 말해 천사의 ‘공-간’은 결코 ‘웃고 떠드는 것을 그만두지 않는’ 것이다. 원래부터 그 웃음은 의미화의 한계점이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천국은 가볍고 부드러운 ‘웃음의 에크리튀르’로 뒤덮여 있다. 천국에 있는 것은 홍소도 파안대소도 조소도 아닌, 마치 흐드러지게 핀 꽃 같고 미풍의 산들거림 같은 웃음이다. 그리스도교나 이슬람의 천사론(論)은 그저 신학상의 상징론이 아니다. 천사를 존재와 의미의 영역에 동여매고 한정짓는 표상 체계에서 해방시킬 때, 그러한 천사론 안에서 우리는 의미 형성성의 과정을 둘러싼 지극히 심원한 비전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나카자와 신이치, 「티베트의 모차르트」



불교의 극락정토 마찬가지다. 가령 우리는 겐신(源信)*의 『주생요집(往生要集)』을 읽으며 지옥도(地獄道)·아귀도(餓鬼道)·축생도(畜生道)·아수라도(阿修羅道)·인간도(人間道)·천상도(天上道) 즉 윤회가 이루어지는 육도세계**를 그려낸, 점성으로 끈적한 에크리튀르의 ‘염리예토(厭離穢土)’*** 문장을 지나 극락정토의 모습을 그린 ‘흔구정토(欣求浄土)’**** 문장에 이르면 거기서 넘쳐나는 빛의 반짝임, 보석장식의 광휘, 미풍의 산들거림을 보고 그 에크리튀르의 홍수에 휩쓸린다.


*겐신(源信, 942~1017) : 헤이안 시대 천태종 승려 - 역자
**6도(六道) : 전통적인 관점에서는, 불교에서 중생이 깨달음을 증득하지 못하고 윤회할 때 자신이 지은 업(業)에 따라 태어나는 세계를 6가지로 나눈 것으로, 지옥도(地獄道) · 아귀도(餓鬼道) · 축생도(畜生道) · 아수라도(阿修羅道) · 인간도(人間道) · 천상도(天上道)를 말한다. '나아가는 세계 또는 장소'라는 뜻의 취(趣)을 써서, 6취(六趣)라고도 한다. - 역자
***염리 예토, 더러워진 세상이 싫어서 떠남을 뜻하는 불교 용어 - 역자
****극락정토에 왕생할 것을 바라는 일을 뜻하는 불교 용어 - 역자




마음의 세계(극락)를 살펴보니
삼계(이승)의 도(道)보다 나아
필경 공허한듯 하면서도
광대무변하여

보화 천만 가지가

널리 연못과 강과 호수를 뒤덮고
미풍이 꽃잎을 흔들며
빛은 얼기설기 어지러이 움직이니

궁궐과 누각들은

어느 방향으로든 얼마든지 살필 수 있고
나무들은 색색깔로 빛나고
보석 난간은 빠짐없이 둘러싸고 있어

보석이 무수히 쌓이고

망라되며 허공에 펼쳐지고

가지각색의 방울이 울려 퍼지며

오묘한 법음(法音)*을 설파하네

중생들은 원하는 것

일체 모두 만족하니
따라서 자신이
아미타불의 나라에서 태어나기를 바란다**


*불교 설법하거나 독경하는 소리 - 역자
**바수반두(세친) 『정토론(淨土論』 5세기, 겐신(源信) 『왕생요집(往生要集)』 10세기.




이 극락정토에는 가벼움(미풍이 꽃잎을 흔들며), 끊임없는 빛의 운동성(빛은 얼기설기 어지럽게 움직이니), 색채의 열락(나무들은 색색깔로 빛나고), 완전성(궁궐과 누각들은 어느 방향으로든 얼마든지 살필 수 있고)으로 채워져 있으며, 미세한 운동성이 끊임없는 변화와 차이를 자아낸다.
물론 불교의 정토에 천사는 없다. 하지만 단테가 걸어 들어간 그리스도교의 천국을 존재도 비존재도 아닌 영묘한 그 ‘사이’로 만드는 역할을 천사가 한다면, 극락정토에서 그러한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은 아마도 ‘음(音)’일 것이다. 극락정토에서는 절묘한 ‘음’이 자아내진다. 그러한 ‘음’들은 결코 멜로디나 화성으로 구성되는 ‘음악’이 아니다. 하지만 정토종 텍스트에서는 극락정토에서 흐르는 ‘음’이 여느 ‘음악’ 못지않다고 한다. 가령 『대무량수경(大無量壽經)』상(上)권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대개 인간 왕이 다스리는 나라에는 백 개, 천 개 정도의 음악이 있다. 그러나 왕 중의 왕인 전륜성왕(轉輪聖王)의 음악은 물론, 수미산의 제육천인 타화천(他化天)*의 음악을 모아도 무량수불(無量壽佛)이 사는 극락정토의 보석 나무에 부는 바람이 연주하는 하나의 ‘음(音)’을 따라가지 못한다. 또 극락정토에는 엄청난 종류의 자연 발생적 음악이라고 할법한 것으로 가득 차있는데, 그 음악은 모두 불법(佛法)의 음이다. 그 ‘음’은 맑고, 명랑한 음색과 슬픈 음색이 어우러져 미세하고 부드럽고 우아한 향기가 감돈다. 모든 세계의 음 중에서도 극락정토의 ‘음’이야말로 최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의 준말. 육욕천의 여섯째 하늘. 욕계(欲界)에서 가장 높은 하늘로 마왕이 살며, 여기에 태어난 이는 다른 이의 즐거움을 자유로이 자신의 즐거움으로 만들어 즐길 수 있다고 한다. - 역자




극락정토에 흐르는 음은 대개 ‘타음(打音)’이다. 정토의 연못 근처에는 일곱 가지 보석으로 된 나뭇가지와 잎사귀와 꽃과 열매로 장식된 전단(栴檀)나무가 나란히 서 있고 이 나무에 미풍이 스치는 음은 묘하기 이를 데 없다. 또 드넓은 천공은 다양한 보석을 아로새긴 그물이 크게 펼쳐져 있는데 그 그물에는 보석으로 만든 방울이 걸려 있고, 거기에서 끊임없이 지고의 음이 연주된다. 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악기가 아득한 허공 저편에 걸려 있어, 치는 사람도 없는데 스스로 타음을 낸다. 천국이 미세한 변화로 채워진 빛의 원무로 뒤덮인 곳이라면, 극락정토 공간은 정숙함을 어렴풋이 ‘치는’, 어렴풋이 문지르는 미묘한 음의 변화로 채워진 곳이다.
극락정토에는 이 ‘타음’을 조직하는 조성체계가 없다(인간과 신의 세계의 음악을 만드는 조성체계와 대조적이다). 대신 롤랑 바르트가 ‘울림의 체계’라고 말한, 음의 세계의 관능성 전체가 이행중이다. 바르트는 ‘타음’이야말로 음악의 의미 형성성의 기저에 있다고 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음향성(音響性)’(울림의 색채 그물)은 신체가 ‘타음’의 모든 풍성함(치링치링 하는 음, 미끄러지는 음, 충돌하는 음, 반짝이는 음, 텅 빈 음, 분산되는 음 등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보증한다. 그 결과 ‘타음’, 이 한결같을 뿐만 아니라 음악 텍스트의 구조가 되는 요소야말로 음악의 초역사적 연속체를 구성한다.*


*롤랑 바르트, 『슈만의 ‘크라이슬레이아나(Kreisleriana)’』




정토교 텍스트는 수사(修辭)에 한계가 있다고 보고, ‘타음’의 풍성함에서 극락정토를 찾는다. 미풍이 부는 가운데 작은 보석들이 가볍게 충돌하고, 복잡한 차이를 낳으면서 울리는 치링치링 하는 음. 천공에 펼쳐진 레이스의 그물코에 걸린 방울 하나에서 일어난 진동이 전 공간으로 파급되어 부트스트랩(Bootstrapping)*으로 울려, 누구도 치지 않았는데 아득한 천공 저편에 걸린 타악기가 자연발생적으로 연주하는 타음을 울린다. 이러한 ‘타음’들의 울림 때문에, 정토의 ‘음’은 조성체계를 갖는 모든 ‘음악’을 초월한다.
조성체계가 없는 ‘타음’의 울림 체계가 정토의 음에 어울린다고 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르트가 말한 것처럼 조성조직 전체가 환영(Māyā)의 베일이며 언어(랑그)이기 때문이다.


*그 자체의 동작에 의해서 어떤 소정의 상태로 이행하도록 설정되어 있는 방법. - 역자




이 언어(랑그)는 그 자체의 타음(그 자체가 갖는 단층)에 속한 것이 아니며, 주체에서 어떤 착란의 가능성도 없이 이미 알려진 장치를 따라 신체를 분절하도록 정해져 있다. 그러나 모순을 함축하는 -즉 변정법적- 조성은, 타음에 숙련된 연주자가 되어 전혀 다른 차원에서 타음을 따르려고 하는 것이다.*


*『슈만의 ‘크라이슬레이아나(Kreisleriana)’』




요컨대 ‘타음’은 천사다. 천사는 신의 빛의 바다에 신체를 담그는 동시에 거기서 가볍게 날아오르는 빛의 미립자다. 하지만 이 미립자는 양성구유(androgynos)이기에 어떠한 존재나 의미라는 환영의 베일에 포획되지 않는다. 만약 천사가 존재나 의미에 자신을 양도한다면, 그 천사가 지닌 자기 안에 끊임없이 미세한 차이를 생산하면서, 흔들리고 반짝거리는 영묘함은 사라지고, 거칠고 엉성한 언어(랑그)와 조밀한 물질성에 포획되는 슬픈 모습만 남는다. 천사는 타천사가 되는 것이다.
‘타음’도 그렇다. ‘타음’은 음과 음악의 의미 형성성의 역설적 장에서 날아오르는 음의 미립자다. 여기서 이 입자는 날아오른다. 정토교의 텍스트가 말하는 것처럼, 이 공간은 무한의 천공이며 터무니없이 먼 공간, 즉 미발(未發)의 진동을 내장한 비존재의 ‘장’, 공간의 양식에도 시간의 양식에도 맞지 않는 철저히 ‘다른 세계’다. 여기서 날아오른 ‘타음’은 스스로를 치는 미세한 차이를 끊임없이 생산하면서 다른 ‘타음’들과 교차하여, 어떠한 조성의 체계나 어떠한 음계의 체계, 어떠한 화음과 리듬의 체계에서도 이탈하는 울림의 그물코를 짠다. 이 극락정토의 ‘타음’이 조성의 체계에, 즉 윤회하는 세계인 환영의 베일에 사로잡힐 때 그것은 확실히 아름다운 ‘음악’이 되어 흘러나오겠으나, 그때는 더 이상 ‘타음’이 가진 천상의 광휘는 없다. ‘음악’은 ‘타음’의 타천사다. 극락정토를 그리는 정토교 경전은 의미 형성성에 대한 텍스트인 동시에 그 자신이 관능과 언어의 다층영역을 횡단하는 의미 형성성으로서의 텍스트 그 자체다.



번역/혜원

전체 1

  • 2021-06-11 22:34
    어떤 체계에 포획되는 순간 음(악)도, 천사도, 다른 것이 되어버리네요... 천사를 '존재와 비존재의 사이', '의미가 형성되려는 순간의 운동성의 장'으로 설명하는 나카자와의 천사론.. 흥미롭습니다!
    천국의 천사와 같은 역할을 하는 극락정토의 '음'에 대한 묘사도 아름답네요. 잘 모르겠으면서도 또 알 것도 같은... 그러면서 멋있는... 이번에도 우리 들뢰즈님이 떠오르네요ㅎㅎ
    잘 읽었습니다! 다음화에선 또 어떤 천국 얘기를 들려주실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