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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책들] "지구는 인간을 어떻게 생각할까?"

작성자
규문
작성일
2021-06-12 20:03
조회
359
[The 책들]은 생태와 인류학은 공부하는 혜원이 세미나에서 읽은 책을 리뷰하고, 생태적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것인지 고민하는 코너입니다. "인생 세미나" 시즌이 끝날 때마다 업로드 됩니다!

“지구는 인간을 어떻게 생각할까?”



글/혜원



인생 세미나 시즌 1의 테마는 ‘지구의 관점에서 생각하기’다.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나야 한다’는 말은 많이 듣지만, 정작 ‘인간’이란 무엇인지, ‘자연’이라든가 ‘지구’는 어떻게 주체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하기에는 내 상상력이 너무 빈약하다. 상상도 일종의 훈련인 것이다. 이번에 읽은 책들은 그 훈련을 도와주는 좋은 길잡이 역할을 해주었다. 우리는 ‘환경을 걱정한다’고 하지만, 그 걱정이란 정말 지구나 환경에 도움이 되는 걸까? 실은 인간의 입장을 정당화 하는 것에 불과하지 않을까? 아니, 그런 걱정을 할 자격이 우리 인간에게 있을까? 지구는 인간을 어떻게 생각할까?






1. 토마스 베리, <지구의 꿈> : 생태문제의 핵심, 가부장제

자연 세계에서는 물건을 따로 처리할 필요가 없다. 한 생명의 배설물은 다른 생명의 자양분이 된다. 반면 우리는 우주적인 폐기물과 최대한의 엔트로피 세계를 만들어내고 있다. 엘리자베스 도드슨 그레이의 지적처럼 쓰레기를 처리하지 못하는 이 무능력은 우리 사회의 남성들이 저지른 전형적인 실패다. 청소 작업은 시종일관 여성의 몫으로 남겨져왔다. 남성은 그들의 생물학적 자녀와 관련하여 무엇을 치우는 일을 거의 분담하지 않으며, 그들의 산업적 자녀들과 관련된 청소 작업을 수행하지 못하는 무능력과 관심의 결여마저 드러내고 있다. 그 결과 지질학적 참화와 생물학적 참화,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재앙이 초래될 것이다. (토마스 베리, <지구의 꿈>, p.238)

<지구의 꿈>은 ‘천년왕국’이라는 신화가 인간을 사로잡고 있는 이상 인간이 ‘지구’라고 하는 통합시스템에서 올바른 역할을 하기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천년왕국’이란 인간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고 제어할 수 있는, 인간이 만능으로 군림할 수 있는 세상을 말한다. 이는 단순한 기독교 신화가 아니다. 산업사회의 인간은 알게 모르게 이 신화를 꿈꾸며 영원한 ‘왕국’을 이룩할 수 있다고 믿는다. 설령 자본주의를 비판하더라도 우리의 행동양식은 성장을 향해 달려가는 산업사회의 천년왕국 신화에 사로잡혀 있다.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각종 일회용품과 쓰레기, 자연으로 다시 환원되어 순환되지 않는 인공물들. 이것들이 계속해서 만들어지고 사용되고 버려지는 이유는 인간이 이 폐기물마저 모두 해결할 수 있는 막강한 힘을 가진 존재라고 굳건히 믿기 때문이다.
이 책은 인간의 삶에 녹아있는 천년왕국 신화를 다각도로 조명하는데, 그중에서도 흥미로운 관점이 바로 ‘가부장제’다. 환경오염은 가부장제의 문제다. 생태와 가부장제라고? 가부장제는 내게 차별과 봉건의 상징이며 억압적인 사회구조를 의미할 뿐 나 자신이 가부장제와 관련이 있다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이는 자기위안적인 생각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 역시 지구에서 전형적인 가부장적 횡포를 부리고 있는 인간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가부장적 남성을 떠올려보라. 그들은 자신이 낳은 것들에 대해 극도의 무관심으로 일관한다. 스스로 지배자이며 개척자라고 뻐기지만 정작 자신이 양산한 온갖 것들의 유지와 보수와 관리에 대해서는 무능력한 그들에게는 돌봄과 양육과 공존의 기술이 없다. 저자는 가부장적 인물 유형을 인간들 사이의 관계에서뿐만 아니라 지구의 관점에서 생각해보라고 한다. 인간이 양산한 온갖 쓰레기와 오염물질들, 치솟는 기온과 이산화탄소 농도, 이에 대해 어떤 뾰족한 대책도 없으면서 계속해서 생산되는 일회용 상품들... 돌아보면 인류는 지구라는 공동체에서 폭력적인 가부장으로 군림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지구는 기본적으로 계속해서 생성하고 유지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지구의 청소부’ 미생물의 작용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미생물이 분해하지 못하는 유일한 소재가 바로 플라스틱이다. 인간의 가장 가부장적인 면모 중 하나는 이 플라스틱의 대량생산과 소비가 아닐까? 이 사실을 알고 나는 플라스틱 소비를 줄이려고 노력 중이지만, 여전히 플라스틱을 소비하는 속도가 플라스틱 대체품을 찾는 속도보다 월등하다. 이 넘을 수 없는 격차가 계속 지속되는 이유는 플라스틱이 주는 편리함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떤 일이든 한 번에 처리할 수 있는 편리함에의 매혹은, 무엇이든 양화하고 차이를 없애고 마음대로 부리려는, 지배의 힘에 기반한다. 뭔가를 끊임없이 만들고 거기서 고양감과 만족감을 느끼는 것에 비례해 지구는 계속해서 ‘쓰레기집’이 되어간다.
가부장의 반대편에 있는 ‘여성적인 활동’은 여러모로 성가시다. 아이를 양육하고, 어질러진 것을 치우고, 혹시 어떤 문제가 발생하진 않았는지 늘 배려하고 보살펴야 하는 일들은 품이 많이 들어가는 노동이다. 게다가 가치 있는 일이라고 인정받지도 못한다. 그러다보니 이런 일에 신경 쓰는 것보다는 다른 일을 효율적으로 해내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올라온다. 이런 마음은 생산만이 가치 있는 노동이라는 가부장적 관념으로 이어진다. 편리한 기계, 서비스, 무한히 생산되는 상품! 그러나 지구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들은 순환의 고리에서 벗어난, 어떤 뒷처리도 하지 않는 가부장제의 일면이다.
저자는 인간이 가부장제의 문제를 느끼지 못하는 것을 ‘무능’이라고 한다. 그의 말은 지탄이 아니라 한탄이다. 특별히 못된 마음을 먹지 않아도, 인간은 지배하는 감각에 취하고 그것이 가장 합리적이라고 하는 이야기에 ‘홀려’ 가부장적이게 되는 것이다. 가부장제의 신화 중 하나는 모든 것을 양적으로 환원해서 사고하는 것, 우리가 열광하는 이른바 ‘합리주의’다. 합리주의에서 풀려나기 위해 필요한 건 더 정확한 데이터와 발달된 기술이 아니다. 저자는 지구에 대한 새로운 감각을 우리에게 부여할 것을 제안한다. 요컨대 새로운 지구의 신화의 고안, 지구의 눈으로 보는 감수성의 함양이다. 우리는 어떻게 ‘모든 것을 지배하는 인간’이라는 신화에서 멀어질 수 있을 것인가.
우리에게 필요한 건 타자를 지배하는 가부장적 활동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지구라는 거대한 공동체의 일원으로 느끼는 것이다. 공동체의 유지와 윤택함이 자신의 생존과 연관되어 있음을 느끼고, 공동체를 돌보고 보살피는 ‘여성적인 활동’ 회복하기. 이를 위해 필요한 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아니라 절제의 태도다.





2. 사이먼 L. 루이스,마크 A. 매슬린, <사피엔스가 장악한 행성> : 인류세와 기본소득

철학적인 관점에서, 인류세를 받아들이면 우리가 자연과 분리된 채 무언가 작용을 가한다는 개념이 막을 내린다. 이런 사고방식은 적어도 지난 2세기 동안 서구를 지배했다. 또 우리가 새로운 인류시대에 살고 있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한 과학자들은 우주 속 인간을 바라보는 방식에 혁명적인 영향을 끼친다. 우리는 광활한 은하 속 어떤 한 행성에 사는 사소한 동물이 아니라 전 우주적으로 알려진 모든 생명의 관리인이다. 이처럼 인류세에 대한 공식적인 인정이 중요하다는 점은 과학과 정치가 폭발할 듯 격렬하게 혼합되어 있다는 점을 알려 준다. 어쩌면 그렇게 놀라운 사실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사이먼 L. 루이스,마크 A. 매슬린, <사피엔스가 장악한 행성>, p.276)

이름만 보면 ‘인류세’는 인간중심적이고 오만한 개념 같다. 지구의 시간을 24시간으로 환원하면 인간은 고작 다음날로 넘어가기 4초 전에 태어났는데, ‘인류세’는 그런 인간이 지구의 역사에 유의미한 흔적을 남길 것이며 그럴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지질학이라는 학문을 너무 단순하게 보는 시각이다. ‘인류세’라는 개념을 마치 그간의 데이터와 경험을 통해 도출한 결론처럼 취급하기에는, 여기에 얽힌 무수한 맥락이 있다. <사피엔스가 장악한 행성>은 ‘인류세’라는 개념이 처한 맥락, 그리고 ‘인류세’라는 개념이 우리에게 얼마나 실천적인 문제를 던지는지를 설명해 주는 책이다. 등장부터 드라마틱했던 ‘인류세’는 왜 이렇게 핫한 개념이 되었을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지질학적 ‘세(世, epoch)’를 ‘홀로세’라고 한다. ‘홀로세’는 ‘가장 새로운 시대’라는 뜻으로, 1만 650년 전 일어난 가장 최근의 간빙기를 지칭한다. 하지만 간빙기는 일종의 수사고, 사실 이 ‘세’의 기점은 인류 출현 시기와 겹친다. 즉 ‘홀로세’라는 개념에는 인간이 지구에 갓 등장한, 다른 동물과는 구별되는 특별한 존재라는 의식이 깔려 있다. '홀로세' 서사에 따르면 지구는 40억 년간 인류를 위한 터전을 마련해 왔고, 인류는 자신에게 딱 맞게 설계된 지구에서 신처럼 군림하면서 그 자원을 이용할 수 있다. 이 믿음은 견고하게 유지되어, 다른 종의 멸종, 오염, 이산화탄소 증가, 생태계 교란과 같은 이상현상에도 불구하고 인류가 이 행성을 장악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인류세’는 이 ‘홀로세’를 비판하고 보완하기 위한 개념이다. 인류가 마음껏 활약할 수 있는 편리한 무대인 지구? 그런 게 존재할 리 없다. 지구가 인간에게 장악된 행성이라면, 이 행성에는 그간 인간이 행한 온갖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을 것이다. ‘인류세’는 인간의 역사를 지질학적으로 고찰하고 직시하기 위한 개념이자 일종의 성적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성적표에 따르면 지금 이 시대는 인간이 지구를 장악해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시대가 아니라, 인간이 돌이키기 어려운 수준으로 환경 안전성을 훼손시켜온 시대다. 물론 그 거기에는 인간 자신도 포함된다.
어쩌면 ‘인류세’란 인간이 지구에 통합될 수 있을지의 여부를 실험하는 시기일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결론이자 저자가 제시하는 대안이라 할 수 있는 ‘기본소득 수령’은 다소 생뚱맞은 것 같으면서도 ‘인류세’를 맞은 인간이 시도할 만한 실험이라는 생각이 든다. 기본소득은 모든 사람에게 일정한 금액을 나눠주어 최소한의 생활수준을 유지하기 위한 제도다. 최근 이와 비슷한 제도가 시행된 사례로는 ‘코로나19 재난지원금’이 있다. 지역에 따라 다르지만 이 제도의 기조는 원하는 사람이 일정한 금액을 국가로부터 수령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모두에게 공정하게 배분되는 일정한 소득! 이것이 ‘인류세’와 무슨 상관일까?
저자들은 기본소득 수령이란 “환경에 피해를 줄 의무가 없음”(p.397)을 모두가 깨닫는 창구라고 말한다. 이 말은 우리의 성장과 만능에 가까운 힘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되돌아보게 한다. 인간이 지구의 신처럼 군림하게 된 이유는 정말 신이 점지한 것도 아니고 지구가 인정했기 때문도 아니다. 태양과 지구의 무상증여가 있어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증여를 마치 자기 힘으로 일구어 온 것처럼, 그렇게 하는 것이 마치 자신의 임무인 것처럼 살았다. 기본소득이란 그 증여의 차원을 인간 사이에 도입하는 실험이라 할 수 있다. 기본소득은 인간이 성장, 노동의 대가로서의 소비를 핑계로 환경을 파괴하는 것을 멈추는 제방 역할을 할 수 있다. 또한 타인과 환경을 착취하는 것을 멈추고 마치 자연이 그러하듯 가진 것을 함께 나누고 누리는 활동을 인간 차원에서 실현할 수 있는 기반이 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환경에 피해를 주는 임무에서 놓여나 자연의 일원이 되어 그 운동에 동참할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
인류의 역사를 보면 사피엔스 종의 가장 큰 특징은 자기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서사를 부여할 수 있는 자의식이 아닐까 싶다. 자의식을 가진 생명체로서 인간은 그동안 지구의 지배자로, 지구의 모든 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것처럼 행동했고 그런 서사를 스스로에게 부여했다. 이야기의 힘은 무척 강력하다. 가령 우리는 ‘인류세’가, 최근 한 지질학자의 선언으로 역사의 무대에 나타났다고 알고 있지만 사실 인류 역사상 ‘인류세’에 버금가는 개념과 우려는 계속해서 있어왔다. 다만 인간은 더 열심히 일하고 그로 인해 풍요로움을 누리는 것이 더 편하기 때문에 선택적으로 망각해왔을 뿐이다. ‘인류세’는 망각의 골짜기를 넘어 인간의 역할을 되묻는 개념이다. 그리고 기본소득 도입은 그 질문의 답을 찾아가는 노력이자 인간이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었음을 말해주는 첫걸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3. 앨런 와이즈먼, <인간 없는 세상> : 인류의 멸종이야말로 진정한 친환경일까?

"인류는 결국 멸종할 겁니다. 지금까지 모든 것이 그래왔어요. 그것은 죽음과도 같은 일입니다. 우리는 다르다는 생각을 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지만 생명은 지속될 거예요. 처음에는 미생물의 형태일지 모릅니다. 아니면 뛰어다니는 지네 같은 것일지도 모르지요. 어쨌든 생명은 우리가 여기 있든 없든 계속 발전해 갈 겁니다. 우리가 지금 여기 있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에요. 마찬가지로 저는 우리 뒤에 다른 생명이 올 것에 대해 언짢아하지 않을 겁니다." (앨런 와이즈먼, <인간 없는 세상>, p. 391)

<인간 없는 세상>은 인간이 ‘갑자기’ 사라진다는 기발한 발상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정교한 시뮬레이션을 통해 인간이 얼마나 지구의 순환 시스템과 동떨어져 있는지를 보여준다. 인간들이 지구상에서 사라진다면, 뉴욕 지하철은 사흘만에 물에 잠길 것이며, 고압전류를 내뿜는 전선이 작동을 멈추면서 새들이 돌아올 것이다. 인간이 애지중지하던 반려견들은 야생에서 살아남지 못해 어쩌면 멸종의 길을 걸을 수도 있고, 자랑스러운 랜드마크는 철골 구조물만 겨우 남은 채 곧 식물에 자리를 내줄 것이다. 좋은 소식이라면 인간의 난방시설에 기생하며 살아가던 바퀴벌레의 멸종 정도일까? 이렇게 지구는 인간이 지나간 자리를 하나하나 지워나가는 ‘청소’를 즉시 시작할 것이다. 어쩌면 바다에 그득한 플라스틱을 분해할 미생물이 진화하여 그것마저 없앨지도 모른다. ‘인류세’라는 말이 무색하게, 인간은 이 지구에서 어떤 역할도 못하고 사라질지 모른다.
이런 시뮬레이션을 접하면 인간의 문명이란 얼마나 허약하고, 오로지 인간만을 위해 설계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도대체 인간은 지구에서 뭘 하는 존재일까? 차라리 빨리 사라지는 게 낫지 않을까? 이 책에서는 ‘자발적 인류 멸종’을 추진하는 조직을 소개하기도 한다. 그들은 전인류의 출산 중단을 주장한다. 그러면 인간은 자원을 둘러싸고 소모적인 전쟁을 일으킬 필요도 없고, 이미 남아 있는 아이들을 잘 양육할 수 있으며, 아이들이 안정적이고 평온한 노년을 보낼 수 있도록 총력을 기울일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인구는 점점 늘어나서 끔찍한 분쟁과 착취가 끊이지 않을 것이다. 허황된 이야기 같지만, 그만큼 인간의 폐해가 다른 종에게나 그리고 우리 종 자신에게나 심각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터넷에 떠도는 밈의 표현처럼 “인간이 죽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친환경”인 수준까지 온 것이다.
그런데 기묘하게도 이 책은 인류 멸종 서사에 흔히 동반되는 스릴과 공포, 그로 인한 고양감 같은 것을 주지 않는다. 인류의 멸망과 존속에 달린 서스펜스는 히어로물에서 히어로와 빌런이 결전을 앞두고 내뱉는 대사에나 있는 것이다. 인간끼리 머리 터지게 고민하고 싸우지 않아도 ‘인간 없는 세상’은 이미 지구 곳곳에 만들어지고 있다. 그것도 역설적으로 인간의 패악이 가장 심하게 일어난 지역부터. 한반도의 DMZ나 키프로스 섬의 휴전지대 같은 곳이 그렇고 체르노빌이 그렇다. 지구의 구성원들은 인간이 없다면 차라리 지뢰와 방사능이 천지인 곳이라도 가서 살겠다는 의지를 직접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들을 보고 우리가 느껴야 하는 것은 부끄러움, 그리고 이 지구에 소속되지 못했다는 소외감이 아닐까? ‘지구를 구한다’ 같은 사명감이나 ‘인류 멸망이야말로 친환경’ 같은 허무감이 아니라. 지구의 운명이 인간 손에 달렸다는 자신감은 지금까지 인간을 추동하여 문명을 세우고, 다른 종을 몰아내거나 절멸시켜왔다. 인류 멸종을 생각할 때조차 그런 사치를 부릴 수는 없지 않은가.
종의 차원에서 보면 어떤 종이든 사라지게 되어 있다. 지금은 70억에 육박하는 인구를 자랑하고 있지만 인간 역시 결국은 사라진다. 그런데 나는 이 자명한 사실을 받아들일 훈련은 되어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적어도 내 세대에는 망하지 않을 것 같고, 만약 그런 위기가 나타날 때 즈음에는 해결책이 나올 것 같다. 하지만 ‘망하지 않는다’고 전제할 때와 ‘곧 망할지도 모른다’고 할 때의 행동윤리는 다르다. 후자에는 적어도 인간이 사라진 자리에 대한 상상력과 책임감이 동반된다. 그것은 인간이 사라진다는 공포가 아닌, 앞으로도 지속될 무수한 생명에 대한 예의, 그리고 어쩌면 다시 인간이 돌아올지도 모르는 고향 지구에 대한 애정을 포함한다. 우리는 어떤 흔적을 남기고 떠날 것인가.






4. 안드리 스나이어 마그나손, <시간과 물에 대하여> : 손에 잡히는 ‘시간’을 위하여

“상상해보렴. 262년이야. 그게 네가 연결된 시간의 길이란다. 넌 이 시간에 걸쳐 있는 사람들을 알고 있는 거야. 너의 시간은 네가 알고 사랑하고 너를 빚는 누군가의 시간이야. 네가 알게 될, 네가 사랑할, 네가 빚어낼 누군가의 시간이기도 하고, 너의 맨손으로 262년을 만질 수 있어. 할머니가 네게 가르친 것을 너는 손녀에게 가르칠 거야. 2186년의 미래에 직접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안드리 스나이어 마그나손, <시간과 물에 대하여>, p.28)

우리는 ‘나’의 시간을 어디까지라고 생각할까? 십대 때 친구들로부터 ‘마흔이 되기 전에 죽을래’ 라는 말들을 심심찮게 들었다. 그 친구들이 특별히 감상적이어서는 아닐 것이다. 마흔이 된 자신을 도저히 상상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때 그 친구들은 지금 40대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데 다행히 죽을 생각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여전히 미래에 대한 감각은 애매하기 짝이 없다. 나 자신의 시간에 대해서도 이렇게 막연한데 지구의 시간을 생각하면 더욱 알 길이 없다. 최근 50년 후 지구에 봄이나 가을은 없어지고 긴 여름과 긴 겨울만 번갈아 온다고 하는 기사를 보았을 때, ‘올 게 왔다’는 생각이 드는 한편 ‘50년’이라는 시간이 너무 먼 훗날 같아서 체감이 되지 않았다. 50년 후? 그때가 나랑 뭔 상관이란 말인가. 정말 내가 체험할 수 있는 시간이기는 한 걸까?
<시간과 물에 대하여>는 지금 인간이 미래의 시간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는 책이다. 저자는 지구온난화나 해수산성화를 표현할 때면 ‘글문이 막힌다’고 말한다. ‘위기’라는 말은 이것을 설명하기에 너무 협소하고, 어떤 체감도 할 수 없게 만든다. 필요한 것은 이 위기를 우리 스스로 체험할 수 있는 언어와 서사를 발명하는 것이다. 이 책은 그 체감을 표현하기 위해 지금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 즉 자신의 조부모를 인터뷰하며 ‘지금’이라는 시간의 깊이를 서사화한다. 조부모가 겪었던 지구, 빙하, 인간의 역사, 읽었던 책, 그것이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지를 가장 생생한 언어로 가져오기. 이 시도는 기후위기를 막연히 ‘미래’로 소급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효과를 야기한다. 우리가 가장 막연하게 생각하는 시간, 즉 노년의 시간을 생생하게 사유할 수 있게 한 것이다.
‘미래의 지구’를 생각하는 것이 계속해서 막연한 이유는 그것을 표현할 단어나 정서가 미흡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늘 미래를 말하지만, 그것은 지금 당장의 젊고, 가능성 있는 시간을 지속시키기 위해서다. 지금, ‘가장 젊은’ 시기가 지나고 나면, 무력하고 어떤 가능성도 없는 시기가 지속될 것만 같다. 하지만 이는 인간에 대한 가장 협소한 감각이다. 늙어서도 나는 계속 살아갈 것이고, 지구 환경의 영향을 받을 것이다. 그런데 그때의 시간은 막연하고, 지금의 시간과 욕망만 소중하다 할 수 있겠는가? 왜 우리는 우리 생을 둘러싼 다양한 면을 적극적으로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걸까?
이 책의 또 다른 키워드는 ‘물’이다. 이 가장 단순하면서도 필수적인 물질은 사실 지난 200년 사이에 급속도로 산성화되어 왔다. 하지만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바다와 물에 대한 교육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우리는 그 생리를 조금도 알지 못한다. 지구의 물이 산성화된다는 것은 인간이 산호초를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바다 속 숲을 절멸시킨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우리는 그 의미를 제대로 실감하지 못한 채 하던 것을 계속할 뿐이다. 우리의 관심은 오로지 미래, 그것도 매우 한정되고 환상적인 자원을 두고 싸우는 미래를 향해 있다. 경제성장에는 온통 신경이 곤두서 있지만, 바다 속 생물들이 굶어죽는 것에는 전혀 마음을 쓰지 않는다. 우리가 누구와 어떤 시간을 살고 있는지 전혀 실감하지 못하는 것이다.
저자는 ‘빙하가 녹는다’ 대신 ‘빙하가 멸종한다’라는 표현을 쓴다. 빙하는 우연히 온도가 낮은 지대에 형성된 얼음이 아니라 물질세계의 토대가 되는 모든 물을 조절하는 하나의 신성한 생물로 표현할 수 있다. 저자는 이 빙하의 이미지를 ‘아우둠라’라는 신화적 동물에서 찾는다.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 될 젖을 제공하는 이 신성한 소는 그 자체로 빙하를 상징한다. 빙하는 온도가 낮은 곳에 맺힌 얼음덩어리가 아니라 인간의 운명을 좌우하는 생명의 원천인 것이다. 저자의 조부모, 그리고 그들의 조부모들도 빙하의 보살핌 아래 살면서 ‘시간’을 이어왔다.
“빙하의 멸종”은 하나의 ‘시간’이 무너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저자가 인터뷰한 조부모들이 형성해오고 지금까지 이어져온 시간은 오로지 빙하가 존재할 때만 가능하다. 그야말로 빙하는 지금 인간이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시간”이다. 빙하의 멸종은 것은 강의 유속과 양을 조절하는 기능이 사라져 가뭄이나 홍수가 일어난다는 것을 의미하고, 해수가 산성화되어 그동안 지구의 이산화탄소를 30% 흡수하며 기후를 조절하는 능력을 상실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해수 산성화로 산호와 굴과 플랑크톤과 향유고래가 죽는 ‘홀로코스트’를 의미한다. 결국에는 빙하가 녹아버린 시간은 그 빙하와 관계를 맺어온 인간의 멸종에 이른다.
강물, 바다, 그리고 물 자체와 무관한 인간의 삶이 있던가? 자발적 멸종을 자처하지 않아도, 인간은 이미 대멸종 시기를 맞았는지도 모른다. 산업화가 시작되고 200년만이다. 아이슬란드에서 사람이 정착한 시기부터 세어도 1100년만이다. 저자는 아이슬란드의 역사를 “여자 열두 명의 이야기를 이어붙인 것”(p.275)이라고 표현한다. 우리나라는 나름 ‘반만년 역사’라고 하니까 ‘예순 명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까? 그래도 채 백 명이 안 된다. 인간의 역사는 사실 빙하로 대표되는 지구라는 든든한 상대와 함께 교류하며 형성해온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이 조촐한 열두 명, 혹은 예순 명의 시간을 어떻게든 이어보려고 하는 노력하는 것이 아닐까?


전체 2

  • 2021-06-19 06:28
    자신의 쓰레기조차 처리하지 못하는 무능력한 가부장적 존재, 태양과 지구의 무상증여로 가능했던 모든 것을 자기 힘으로 한 것이라고 착각하는 무지와 오만으로 똘똘 뭉친 존재, 바다 속의 '숲'과 빙하가 '멸종'되어 가는 것에 무감각한 존재..... 이 글을 읽고 조금만 생각해 봐도 인간인 저 자신, 그리고 이 모든 것에 대한 대책없음에 마음이 너무나 무겁고 부끄러워집니다. ㅠㅠ

    우리는 어떤 실천을 할 수 있는 걸까요? 우리가 지구라는 공동체의 일원임을 자각하고 지구안의 모든 것이 서로 함께 공존한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 에서 출발해야 될 것 같습니다만.... 저 자신을 돌아보고 제 마음장에서 일어나는 욕심과 무지를 살펴야 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 마음이 무겁습니다.

  • 2021-08-27 13:04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아무 것도 안하는 것 보다는, 한걸음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해 봅시다. 나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