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문톡톡

[청.장.만] 5화 "조탁복박(雕琢復朴), 일상 속에서의 글쓰기"

작성자
규문
작성일
2021-06-12 20:19
조회
470

조탁복박(雕琢復朴), 일상 속에서의 글쓰기


 

글 / 규창


1.글을 쓰고 싶다!

공부하면서 나타난 가장 큰 변화는 글쓰기에 대한 욕망이 생겼다는 것이다. 여전히 한 문장 쓰는 데 끙끙대고 있지만, 글을 씀으로써 내가 겪는 문제를 구체화하고 겪는 힘을 조금씩 기르고 있다. 이제는 내가 겪는 거의 모든 문제의 원인을 돈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세상사는 매우 복잡한지라 우리가 겪는 문제의 원인을 콕 집어서 단정할 수 없다. 모든 문제는 복합적이다. 공부는 내가 겪는 문제들이 얼마나 복합적인지를 알아가는 과정이고, 글쓰기는 그 과정 중에서도 강도 높은 활동이다. 좌충우돌 글을 써오며 나는 내가 의식하는 것 이상으로 많은 것들과 연관되어 있음을 어렴풋이 알게 됐다. 틈을 낼 길은 생각보다 많았다. 어렴풋한 자각만으로도 묘한 해방감을 느낄 수 있었는데, 좀 더 뚜렷하게 알게 된다면 어떨까? 어렸을 때는 누군가가 평생 꼭 해야 할 일을 하나 꼽으라고 물을 때마다 난감했는데, 이제는 당당히 글쓰기라고 말하고 싶다.

그러나 당찬 포부가 무색하게 글을 못 쓰고 있다. 단순히 글이 잘 안 써진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나의 문제를 직면하고 풀어내는 글을 못 쓰고 있다는 의미에서다. 어느 순간부터 내 글쓰기 주제는 거의 비슷했다. ‘돈이 문제가 아니다!’라는 것을 이해하거나 초학자로서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글을 반복하고 있었다. 지난 4화를 두 달 동안 올리지 못한 것도 계속해서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겨우 주제와 구절을 바꾸고 나서야 올릴 수 있었는데, 여전히 같은 어려움에 봉착한 상태다.



왜 새로운 문제들로 글을 못 쓰는 걸까? 매번 똑같은 일상을 보내기 때문일까? 그러나 우리가 사는 일상은 동일한 상태로 주어지지 않는다. 모든 사물과 사건은 재생과 해체, 합치와 나뉨을 반복하고 있다. 우리의 몸도 매순간 외부와의 교통 속에서 기(氣)가 모였다가 흩어지는 것을 반복한 결과다. 편견으로 가득한 의식을 걷어내면, 일상은 도(道)가 끊임없이 유전하는 역동적인 현장이다. 따라서 똑같은 일상이 문제가 아니라 매번 똑같은 일상으로 인식하는 ‘나’라는 의식이 문제다.

장자는 어떻게 일상을 보냈을까? 그가 끊임없이 화(化)하여 비상하는 곤(鯤)과 붕(鵬), 어떤 재해에도 해를 입지 않는 신인(神人)들과 어떤 신비한 도술을 쓰는 것보다 더 자유로운 지인(至人) 등 자유를 연상시키는 여러 에피소드를 생각한 것은 누구보다 역동적으로 사유했다는 증거다. 그러나 도를 깨달은 열자의 일상을 통해 유추해 보면, 장자의 일상 역시 평범한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 같다. “아내를 위해 밥을 짓고 돼지 먹이기를 사람을 먹이듯” 하다가 친구를 만나기도 하고 가끔 식량이 떨어지면 곡식을 빌리러 다녔을 것이다. 그 역시 나처럼 한정된 일상을 살았을 텐데, 어떻게 그는 자유롭게 자신의 사유를 실험할 수 있었을까?

 

2.“특출난 재능? 기구한 삶? 난 무엇도 없다!”

일상 자체를 새롭게 할 수는 없어도 새로운 문제들로 일상을 겪는 힘을 조금씩 기를 수는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새로운 문제들을 찾아다녔다. 특히 또래들의 글을 자주 찾아 읽었다. 그들이 겪고 있는 문제들을 살피다 보면 내가 무엇을 놓치고 있었는지 복기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물론 또래라고 해서 다 비슷한 문제들을 겪는 것은 아니었다. ‘나이’를 빼면 하나로 묶을 수 없을 만큼 ‘우리’는 다종다양한 문제들을 겪고 있었다. 나는 경제적 결핍 문제가 우리 세대가 겪는 공통적인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다른 많은 또래들은 ‘건강’, ‘거주’, ‘성’ 등 다양한 문제로 실존을 고민하고 있었다. ‘청년’이란 정체성만 지우면 비슷한 시공간을 살아간다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다.

그런데 아무래도 그들의 문제와 나의 문제는 연결되지 않았다. 또래들의 문제를 이어받아 글을 쓰려 할수록 몸에 맞지 않는 느낌만 받았다. 글이 안 써질수록 내가 그들처럼 글을 쓸 수 없는 이유에 집착하게 됐다. 가령, 장애와 정상, 질병과 건강의 기준을 질문할 수 있는 것은 그 경계에 서도록 내몰려진 자만의 특권인 것일까? 혹은 똑같은 것을 경험해도 남다르게 통찰할 수 있는 재능이 없어서일까? 이유에 집착할수록 또래들과 나를 비교하게 되었고, 그들처럼 느끼지 못하는 나 자신에게 좌절하게 됐다. 심지어 나의 건강을 질병의 결여로 보기도 했었다.

아마 열자(列子)가 일상 밖에서 도(道)를 찾는 데 집착한 것도 이런 답답함과 연관이 있으리라. 열자는 세속에서 추구하는 복에 집착하지 않고, 바람을 타고 돌아다니는 나름 능력 있는 인물이다. 그러나 이런 열자도 도는 쉽게 터득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는 여기저기를 떠돌다 호자(壺子)라는 사람을 스승으로 섬기게 됐지만, 도를 터득하기란 요원했다. 그러다 어느 날, 정나라에 사람의 운명을 정확하게 맞추는 계함(季咸)이란 무당의 소문을 듣고 바로 달려간다. 그리고 계함의 전지한 능력이야말로 진정한 도라고 생각한 열자는 돌아와서 스승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처음에 저는 선생님의 도를 최고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선생님보다 더 뛰어난 사람이 있습니다.”(〈응제왕〉)

아무리 애써도 나아지지 않을 때면 어김없이 조급해진다. 나는 똑같은 글을 반복하고 있음을 자각했을 때 조급해졌다. 내 자신이 한심하기도 했고, 그동안 공부한 것이 헛수고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아마 열자도 비슷한 걸 느끼지 않았을까? 세속에서 추구하는 복도 포기하고 여기저기를 떠돌다 스승을 섬기고 배웠는데도 도를 깨닫지 못했다. 열자도 이때 자신이 포기한 모든 것이 떠오르며 엄청난 자의식에 휩싸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포기하지 않고 도를 계속 깨닫고자 한다. 계함이란 무당의 소문을 들었을 때 뛰쳐나간 것은 열자가 얼마나 간절하게 도를 깨닫고자 했는지를 보여준다. 사이비 도에 빠진 제자를 위해 호자는 계함과 신통력 배틀을 펼친다. “나는 너를 위해 껍데기(文)는 모두 전수했지만, 아직 실질은 다 전수하지 않았다. 그런데 너는 참으로 도를 터득했다고 여기는 것이냐? 암컷이 아무리 많아도 수컷이 없으면 또 어찌 알을 낳겠느냐? 너는 도를 가지고 세상 사람들과 겨루어서 믿음을 얻으려 하는구나. 그 때문에 남에게 너의 관상을 쉽게 알아맞히게 한 것이다. 시험 삼아 그를 데리고 와서 나에게 보이거라.”(〈응제왕〉)

계함은 호자의 관상을 통해 그의 운명을 예측하지만, 호자는 번번이 계함의 예측을 벗어난다. 계함은 호자의 관상을 읽고 10일도 살 수 없을 것이라 예측하다가, 다른 날에는 완전히 살아났다고 열자를 위로한다. 열자는 계함의 예측에 따라 옷깃이 젖도록 울다가 기뻐한다. 하지만 호자의 관상이 계속해서 바뀌자 계함은 ‘관상이 일정하지 않아(不濟)’ 볼 수가 없다고 포기한다. 끝내 호자의 관상을 읽어낼 수 없었던 계함이 얼이 빠져 달아나는 것으로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계함이 호자의 관상을 읽어내지 못한 것은 인간의 앎으로 삶을 예측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호자가 계함에게 보여준 연못의 ‘일정하지 않음(不濟)’은 도의 진실된 모습이다. 연못은 젖은 재처럼 고요하다가도, 막힌 것이 풀려나는 것처럼 거세게 흐르고, 얕은 것 같아도 깊고, 멈춰있는 듯하면서도 격렬한 소용돌이를 품고 있다. 이 다이내믹함이야말로(不濟) 연못의 모습이다. 삶도 마찬가지다. 언제 누가 일상에 개입할지, 기운이 어떻게 다르게 배치될지 누구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똑같은 삶을 산다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삶은 여러 국면으로 변화무쌍하게 이어진다. 특정한 모습만이 연못이라 할 수 없는 것처럼, 특정한 국면만을 삶이라고 콕 집을 수 없다. 모든 것을 모든 것으로 되게 하는 것이 곧 도다!

그런데 열자는 계속해서 ‘어딘가에 있을 도’를 찾아다녔다. 하지만 아무리 애써도 도를 외부에서 찾는 사람은 여기저기 정처 없이 의지하게 될 뿐이다. 열자는 바람을 타고 돌아다니고, 도를 깨달은 사람이 있다고 생각되면 찾아가 그를 스승으로 섬겼다. 그러나 도가 있을 것이라 기대하고 찾아간 계함은 그처럼 도를 보고 놀라는 또 다른 무지한 사람일 뿐이었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놀람은 이질적인 관념들을 접속·연관 짓는 사유 역량이 저하될 때 나타나는 반응이다. 사유는 관념들을 조립하고 분해하는 방식으로 활동한다. 똑같은 대상을 보더라도 다르게 인식하는 것은 각자가 관념을 조립하고 분해하는 경로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놀람은 대상을 실체화함으로써 관념이 다른 관념을 만나는 경로를 차단한다. 열자가 계함을 보고 놀란 것도 그에게 다른 사람들에게 없는 특별한 무엇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처럼 놀람에 중독될수록 사유는 점점 무뎌지고, 무뎌진 사유는 점점 더 쉽게 놀라게 된다.

재능이 있든 특별한 삶을 살든 간에 자기 삶에서 문제를 포착하고 풀어내는 사람은 삶이나 문제를 특정한 것으로 규정하지 않는 유연한 시야를 가졌다고 할 수 있다. 또래들의 재능이나 삶에 놀라는 동안, 그들이 어떤 과정을 겪으며 자기 문제를 소화했는지는 가려진다. 글을 쓰는 그들의 상태를 특권화할수록 나의 사유 역량이 점점 더 작아지고, 글을 쓰지 못하게 되는 것은 당연했다.

타고난 재능을 소유하거나 특별한 삶을 살아야만 새로운 글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한 것과, 진정한 도가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고 집착하는 것 모두 놀람에 중독된 무능력의 다른 표현이다. 놀람에 중독되는 한 역량은 발휘될 수 없다. 반대로 역량을 발휘하는 사람은 평범하게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도 독특한 해석을 보여준다. 그는 동일한 것도 동일하지 않은 방식으로 지각하는 예민한 감각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열자가 집으로 돌아가 3년 동안 집밖을 나오지 않은 것처럼, 어딘가에 스스로를 가두고 감각이 예민해질 때까지 기약 없는 수련을 해야 할까?

 

3.수련으로서의 글쓰기

 
“이후에 열자는 스스로 애초부터 배우지 못했다고 여기고 집으로 돌아갔다. 3년간 밖을 나가지 않고서 그 아내를 위해 밥을 짓고 돼지 먹이기를 사람을 먹이듯 하여, 매사에 친소(親疏)를 두지 않았다. 수행해서 자연으로 복귀하여, 우두커니 홀로 그 모습으로 서 있고 어지러이 뒤섞이되, 오로지 이렇게 하여 생을 마쳤다.”(然後列子自以爲未始學而歸 三年不出 爲其妻爨 食豕如食人 於事無與親 雕琢復朴 塊然獨以其形立 紛而封哉 一以是終) - 《장자(莊子)》 〈응제왕(應帝王)〉

 

바람을 타고 여기저기를 떠돌며 여러 스승을 전전하던 열자는 마침내 일상으로 돌아와 도를 깨닫는다. 얼이 빠져서 도망친 계함의 뒷모습을 보면서 열자는 자신이 생각한 도란 없음을 알게 된 것 같다. 동시에 그동안 자신이 무시해왔던 너무나도 평범하고 지루하고 별것 없는 일상에 도가 담겨 있음을 깨달았을 것이다. 열자의 치열한 구도의 종착지가 일상이라는 것은 다소 싱거운 결말이다. 이 지점에서 장자는 당대의 다른 은둔자들과 길을 달리한다. 그는 수련하기 위해 일상을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사람이 두려워해야 하는 곳은 이부자리 위의 일과 마시고 먹는 사이에 있다. 이것을 경계할 줄 모른다면 수련을 잘못한 것이다(〈달생(達生)〉).”

일상은 익숙하면서도 낯선 영역이다. 일상을 일상적으로 보내려면 매사에 진심으로 임할 만큼 밀도가 높아야 한다. 아직 열자처럼 매사에 친소(親疏)를 두지 않을 만큼이라고 자신할 수는 없지만, 공부하면서 조금씩 밀도가 높아지고 있음을 경험하고 있다. 가령, 나는 어제와 거의 비슷한 시간에 일어나서 씻고, 집을 나서서 연구실에 도착한다. 그리고 어제와 비슷하게 밥을 먹고, 공부하고, 잡담을 떨다가 아침에 온 길을 걸어서 집으로 돌아간다. 이 리듬을 거의 일년 내내 반복한다. 그런데 이런 일상이 지루하지는 않다. 일상을 산다는 건 지루할 새가 없을 만큼 바빠서라기보다는 내 마음을 외부에 여는 것을 연습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연구실 생활은 비근하게는 연구실에 오시는 선생님들의 마음을 받는 것과, 추상적으로는 지구적이고 우주적인 차원에서 내가 어떻게 살아왔고 살아가게 될 것인지를 계속해서 생각하게 만든다. 공부를 하다 보면 음식을 먹고, 전기를 쓰고, 읽고 쓰는 것 등등 사소한 일상적 행위들이 사소하게만 느껴지지 않게 된다. 가끔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하면서 무거워지는 것이 문제지만, 어쨌든 똑같은 행위들이 조금씩 다르게 느껴지고 있다. 물론 여전히 문제는 많다. 서둘러 세미나를 준비하거나 글을 써야 할 때는 그릇 정리나 식사 준비, 설거지 등의 일상에 소홀해진다. 인기척이 느껴지거나 가끔 택배가 온 소리가 들려도 모른 척 외면한다. 그럴 때마다 공부와 일상, 나와 세계 사이에 큰 괴리가 있음을 느낀다. 그리고 계함처럼 공부고 일상이고 뭐고 내팽개치고 도망치고 싶어진다. 그러나 최소한 1년을 지루하지 않게 보내고 있다는 것은 내가 일상을 사는 밀도가 조금씩 높아지고 있다는 증거 아닐까? 곧 점점 더 예민한 신체가 되고 있다는 신호로 봐도 좋지 않을까?

게다가 글쓰기라는 활동은 특성상 밀도 있는 일상을 수련하기에 매우 적합하다. 글쓰기는 그 자체로 일상의 밀도를 높이고 감각을 예민하게 벼리는 실천이자 수련이다. 글을 고민하는 동안에는 평소보다 더 말에 귀를 기울이고, 붙잡는 텍스트마다 문제의식과 연관짓는다. 덕분에 글 한 편 마무리해서 문제를 넘어가거나 달라졌다고 자신할 수는 없어도, 적어도 글 한 편을 쓰는 동안에는 이전에 없던 집중력을 발휘하고 있음은 자신할 수 있다. 평소라면 지나쳤을 사소한 사건들도 새롭게 느껴지기도 한다. 글쓰기의 장애가 아니라 일상은 글쓰기가 탄생하는 모태다.

글 한 편을 쓰기 위해 애쓰는 과정은 일상을 사는 과정과 많은 부분 비슷하다. 일상을 사는 도(道)에 따로 왕도가 없듯이, 글 한 편을 쓰는 데에도 왕도가 없다. 열자가 보여준 것처럼 일상의 달인은 아내를 위해 밥을 짓는 일과 돼지를 먹이는 일 모든 것에 성실하게 임한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접속사, 부사 같은 기본기부터 시작해서 모두가 아는 글자를 독특하게 표현하는 것까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야 한 편의 글이 나온다. 이는 재능이나 소재와 무관한 영역이다.

장자는 도를 깨달은 열자의 일상을 조탁복박(雕琢復朴)이라고 표현한다. 박(朴)이란 ‘다듬어지지 않은 통나무’를 뜻하는 글자다. 모든 박은 그 자체로 고유한 색, 강도와 밀도 등을 갖고 있고, 그런 점에서 고유하다. 장자가 생각하는 박이란 모든 사물에 내재된 깨달을 수 있는 잠재적 역량이다. 그는 누구나 자신에게 내재된 박을 회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박을 가리는 인위적 관념들을 제거하는 과정을 겪어야 한다(雕琢).

그동안 숱하게 재능에 기대지 않겠다고 다짐해왔다. 하지만 재능예찬을 그만두고 나니 소재주의로 전향하게 된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그동안 내가 밟아왔던 글을 붙잡고 고심하고, 고치고, 애를 쓰는 과정에서 나의 일상의 밀도와 감각의 예민함이 조금씩 벼려졌듯이, 일상 속에서 나의 글도 조금씩 다듬어질 것이다. 그것을 믿으며 나는 다시 이 지난한 글쓰기를 기쁘게 맞이할 것이다.

전체 5

  • 2021-06-12 22:48
    규창샘의 고민은 공부하는 사람들의 공통된 고민 중 하나인 듯하네요.. 이것과 연결된 조탁복박 .... 많은 생각이 왔다갔다 합니다.
    조탁복박을 하려면 먼저 조탁할 수 있는 능력? 내지는 방도?를 가지고 있어야하지 않을까하는 억측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조탁을 먼저 만들어가고 그 다음 복박이 아닐지 하는 .... 주제넘은... 발상을 하게 되네요.^^!
    규창샘의 글은 항상 생각을 촉발시키는 지점을 주네요. 그러므로 다음 글을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기대합니다.~~~

  • 2021-06-13 09:43
    "수행해서 자연으로 복귀하여, 우두커니 홀로 그 모습으로 서 있고 어지러이 뒤섞이되, 오로지 이렇게 하여 생을 마쳤다.” 이 말이 묵직하게 다가옵니다. 어떤 대단한 목적을 위해서 혹은 지금이 아닌 다른 때를 위해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나에게 주어지는 그 모든 것을 기꺼이 긍정하고 따르기 위해서 공부하고 성찰한다는 점 마음에 새겨야겠습니다.

  • 2021-06-13 14:41
    저에게도 와닿는 글이네요~ 솔직함이 주는 힘??^^ 일상을 다르게 만나고 소통하는 신체가 되고자하는 노력이 고스란히 느껴집니당~ 규창샘 화이팅! 아 그리고 놀람이 이질적인 것과 접속하는 사유역량의 부족으로 나타난다는 것도 새로 배웠네요.. 그럼 화냄 같은 반응도 마찬가지가 아닐까하는... 마음이 고요하다는것은 이질적인 것들과의 접속역량이겠군요.. 잘 읽었습니다~

  • 2021-06-14 13:18
    글쓰기의 지난함.. 그러나 그것에서 얻는것이 있다는 걸 알기에 그것에서 삶의 중심을 찾고 싶어서 힘들지만 시도하고 노력하는 거 같습니다. 계함과 열자얘기에서 뭔가 특별한 것이 있을 거 같다는 환상을 쫒아 살지만 평범한 것에서 특별함을 찾을 수 있는 방법으로 나아가야 할거 같습니다. 머리로는 알겠는데 이것이 가슴으로 내려오기가 왜이리 힘이 드는지... 힘이 든다는건 어쩌면 평범함을 지속하게 할 수 있는 힘이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드네요.. 샘의 깊어지는 사유만큼 청문회 장자세미나도 기대됩니다~^^

  • 2021-06-22 23:12
    청문회 2번째 숙제를 작성해야 하는데 특별히 관심 가는 부분보다는 글을 읽으면서 계속 ' 그래서 어떻게하라는 것인가?' 하는 궁금증만 맴돌았는데 규창샘의 글에서 답(?)을 쉽게(?) 찾게 됐네요 . ㅎㅎㅎ
    일상이라 어찌보면 별것 아닌것에 답이 있다는 말씀 같은데....문제는 그 별것아닌 것같은 것이 어렵다는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