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강좌

주역과 중용 1장 ~ 6장 후기

작성자
박규창
작성일
2017-10-26 13:21
조회
120
중용 강의가 시작됐습니다~ 일단 1장의 천(天)과 성(性), 도(道), 교(敎) 네 글자가 나왔는데, 압도적인 어마어마한 스케일에 기가 질려버렸어요. 인간의 본성을 살피고, 그로부터 나아갈 길을 제시하는데 그 과정에서 우주의 운행원리까지 빈틈없이 연결하는 걸 보고는 이야....... 이건 어떻게 보면 완벽하고 아름다운 세계 같기도 하지만, 한 치의 어긋남도 용인하지 않는 숨 막히는 세계 같기도 합니다. 이거 참, 딴지 걸 수도 없고, 봐버린 이상 따라가야만 할 것 같아요.

놀라운 건 주희가 중용을 편집하기까지 약 30년이 걸렸다고 하더군요. 30년도 못 산 저로서는 이게 뭔지 도저히 상상도 안 되네요. 하지만 ‘주희라면’ 왠지 수긍이 갑니다. 아시다시피 주희는 기존의 텍스트들을 재편집해서 《대학(大學)》 - 《논어(論語)》 - 《맹자(孟子)》 - 《중용(中庸)》에 이르는 학문의 과정을 짰죠. 《대학(大學)》에서 나를 단단히 다지고, 《논어(論語)》에서 붕우로부터 다지고, 《맹자(孟子)》에서 현실 속 정치철학을 익힌 다음에, 《중용(中庸)》에서 ‘나’라는 개체를 우주적으로 확장시킵니다. 하지만 빈틈없는 와꾸주의자 주희에게 《대학(大學)》은 많이 고민이 됐겠죠. “격물치지(格物致知)” 부분이 빠졌으니까요. 그래서 여기저기 손을 좀 보기도 하고 결정적으로 보망장(補亡章)을 넣어서 《예기(禮記)》에 기록된 것과 많이 달라졌습니다. 그러나 《중용(中庸)》은 건드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기존에 있던 걸 33개의 장으로 나누었을 뿐 있는 그대로를 설명했다고 합니다. 신기하네요. 이게 운명적인 만남인가봐요. 어쨌든 분량 자체는 많지 않지만 어마어마한 내용입니다. 우쌤의 설명을 그대로 가져오는 것도 쉽지가 않네요. ^^;;

1. 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脩道之謂敎

하늘이 명한 것을 성()이라 하고, ()을 따르는 것을 도()라 하고, ()를 품절(品節)하는 것을 일러 교()라 한다.

주석을 보면, 성, 즉리(性, 卽理), 성(性)은 곧 리(理)라고 돼있습니다. 유학을 성리학이라고 부르는 것도 여기서 비롯됐다고 하죠. 이로써 본다면, 하늘이 명한 것을 일러 이치라는 것이죠.

하늘이 음양오행(陰陽五行)으로써 만물을 화생(化生)한다고 하는데, 우쌤은 여기서 음양오행을 우주의 기운이라고 하셨습니다.

주석에 건순(健順)이란 표현이 나오는데, 우쌤은 이게 양과 음을 다르게 말한 세련된 표현이라고 하셨습니다.

오상(五常)은 인간이 지켜야 할 다섯 가지로서 오륜(五倫)을 말합니다.

솔(率)은 하늘이 명한 성(性)을 따르는 것입니다.

도(道)는 로(路)라고 하는데, 마땅히 가야 할 길을 가지 않으면 그건 사람이 아니라 짐승이나 금수에 불과하다고 하네요. 여기서 모두 마땅히 가야할 길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 길은 오륜(五倫) 혹은 인륜(人倫)이라 할 수 있을 텐데, 구체적으로 일상에서 어떻게 실행해야할지는 ‘각자’ 생각해봐야겠죠. 각(各)자가 참 많이 나오는 것 같아요.

수(修)를 보통 다스릴 치(治)로 본다고 합니다. 하지만 주희는 수(修)를 도(道)를 품절(品節)한다고 주석을 달았습니다. 가지고 태어난 차이가 있는데, 그 차이 속에서 자기 직분에 맞게 살 나는 것을 수(修)라고 하는 것이죠.

성(性)과 도(道)로 보면 모든 것은 같지만, 타고난 형체의 관점으로 보면 만물이 제각각 다릅니다. 이를 기품(氣稟)이 다르다고 표현합니다. 품(稟)자는 ‘물려받다’라는 뜻으로 각자 물려받은 기(氣)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 구절 덕분에 《중용(中庸)》이 누르하치에 의해 교과서로 채택됐다고 합니다. 당시 중국을 차지했는데도 잘난 척하는 한족들이 재수가 없었는데, 마침 주희의 주석을 보니까 어차피 모든 사람들은 다르게 태어난다고 합니다. 덕분에 주희의 사서가 천 년 동안 교과서로 채택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

道也者 不可須臾離也 可離 非道也 是故君子 戒愼乎其所不睹 恐懼乎其所不聞

()라는 것은 잠시라도 떠날 수 없으니, 떠날 수 있으면 도()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군자는 볼 수 없는 것을 경계하고, 들리지 않는 것에서 두려워한다.

우쌤은 도(道)를 《논어(論語)》에서 얘기하는 인(仁)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수유(須臾)는 ‘잠시라도’란 의미의 표현입니다.

계신(戒愼)과 공구(恐懼)를 합쳐서 계신공구(戒愼恐懼)라는 표현이 있다고 합니다. 신독(愼獨)과 비슷한 개념인 것 같기도 한데,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아도 삼가고 두려워하는 태도입니다.

성지덕이구어심, 무물불유, 무시불연(性之德而具於心, 無物不有, 無時不然). 덕(德)은 ‘작용’입니다. 직역하면, “성(性)의 작용이 마음에 갖춰져, 있지 않은 사물이 없고, 그렇지 않은 때가 없다.”입니다. 무물불유, 무시불연(無物不有, 無時不然)은 주희가 특히 좋아하는 표현법이라고 합니다.

주석을 참고하면, 군자의 마음은 항상 경외(敬畏)가 있다고 하는데, 여기서 경(敬)과 외(畏)를 다르게 표현하면, 계신(戒愼)과 공구(恐懼)입니다.

천리지본연(天理之本然)이란 표현이 있는데, 우쌤은 이걸 노자로 본다면 도(道)라고 하셨습니다. 본래 그런 것인 하늘의 이치. 내가 알든 모르든 운행이 되는 게 우주이고 도(道)죠.

莫見乎隱 幕顯乎微 故君子 愼其獨也

은미한 것보다 보이는 게 없고, 미세한 것보다 드러난 것은 없으니, 따라서 군자는 그 혼자 있는 곳에서 신중히 한다.

 

원문이 살짝 말이 안 됩니다. 하지만 주석을 참고하면, 인소부지이기소독지지지(人所不知而己所獨知之地)란 표현이 있습니다. 직역하면, 남들은 알지 못하나 자신은 홀로 아는 지점입니다. 《대학(大學)》으로 본다면 딱 신독(愼獨)이라 할 수 있죠. 그러니까 기미를 살피는 데 있어서 자신의 마음이 발하는바를 살피는 것이 그 시작이라 하는 것입니다.

 

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 發而皆中節 謂之和 中也者 天下之大本也 和也者 天下之達道也

기쁨과 노여움과 슬픔과 즐거움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일러 중()이라 하고, 그것들이 모두 절도에 맞는 것을 일러 화()라고 한다.

()이라는 것은 천하의 큰 근본이다. ()라는 것은 천하에 두루 통달하는 도()이다.

중(中)은 중용(中庸)의 중(中)입니다. 주석을 참고하면, 희노애락(喜怒哀樂)은 정(情)이고, 그것이 발하지 않은 상태를 성(性)이라 합니다. 그리고 그 성(性)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상태를 중(中)이라 하죠. 중용장구대전에서는 중(中)을 천하의 정도(正道)라고 했는데, 우쌤은 정도(正道)가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그리고 노자에서 얘기하는 담담한 마음과도 연결된다고 하셨습니다. 이건 제 생각이지만, ㅎㅎ 정(情)을 상황에 맞게 발하는 것이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따르는 일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발하지만 그것에 위치에 따라 적절히 들어맞는 것을 화(和)라고 합니다. 우쌤은 이 화(和)를 일상에서의 중(中)의 실천, 시중(時中)이라고 하셨습니다. 주석에서는 벗어나는 바가 없는 것(無所乖戾)을 화(和)라고 했습니다.

우쌤은 중(中)과 화(和)를 치우치지 않은 내면과 적절히 외부로 발한 상태로 설명해주셨습니다.

달도(達道)는 도(道)의 실천으로, 우쌤은 그게 또 솔성(率性)이라고 하셨습니다.

致中和 天地位焉 萬物育焉

()과 화()를 확장하고 지극히 하면, 천지가 안정되고, 만물이 타고난 생을 따르게 된다.

치(致)는 극(極)까지 확장시키는 것입니다.

육(育)은 생(生)을 이루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쌤은 이 생(生)을 이루는 것을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타고난 명을 누리며 잘 사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주석에서는 치중화(致中和)를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것을 지켜나가서 지극히 고요한 상태, 치우침이 없는 상태에 이르고, 그것을 지켜 흔들리지 않으면 중(中)을 다할 수 있어서 천지가 그 마땅한 자리에서 편안히 한다.”고 풀었습니다.

만물육언(萬物育焉)을 풀이한 주석을 보면 근독(謹獨)이 있는데, 신독(愼獨)의 다른 표현입니다. “신독(愼獨)을 정밀하게 해서 사물에 응하는 곳에 이르면 조금의 차이와 오류도 없을 것이고, 어디에 간들 그렇지 않음이 없게 된즉, 그 화(和)를 다하여 만물이 길러진다.”

우쌤은 이 장을 《도덕경(道德經)》 25장의 인법지, 지법천, 천법도, 도법자연(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과 연결해서 설명해주셨습니다. 우쌤은 여기서 사람이 땅을 본받는 것부터 하늘이 자연을 본받는 것까지 단순히 따르는 게 아니라 상호작용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주역(周易)》에서도 천지인(天地人)을 얘기하고 그 사이에 있는 인간도 하나의 에너지로 작용한다고 하는데, 그런 점에서 이 장과 많이 연결된다고 하셨습니다.

아무리 주제문이라곤 하지만 너무 어렵네요. 그러면서도 역시 《중용(中庸)》이란 생각이 듭니다. 이 장을 맺을 때 존양성찰(存養省察)과 반구저신(反求諸身)과 같이 《논어(論語)》, 《맹자(孟子)》에 나온 개념어가 나옵니다. 나중에 《중용(中庸)》을 다 보고 1장을 또 보면 다를 것 같습니다.

2. 仲尼曰 君子中庸 小人反中庸

중니가 말하길, 군자는 중용을 하고, 소인은 중용에 반대로 한다.

 

君子之中庸也 君子而時中 小人之中庸也 小人而無忌憚也

군자가 중용을 하는 것은 군자이면서 때에 맞기 때문이고, 소인이 중용을 하는 것은 소인이면서 거리낌이 없기 때문이다.

주석을 보면, 군자, 위능체지(君子, 爲能體之)라고 돼있습니다. 우쌤은 체(體)가 ‘몸이 저절로 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군자는 중용(中庸)을 의식적으로 행하는 게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몸이 저절로 그렇게 반응하는 것이라 합니다.

시중(時中)이란 표현이 여기서 나옵니다. 시중(時中)은 항상 어떤 상황에 놓이든지 과불급(過不及)이 없도록 중용(中庸)을 행하는 것입니다. 우쌤은 이를 권도(權道)로 볼 수도 있다고 하셨죠. 권도(權道)도 유학에서 중요시하는 개념인데, 권(權)은 무게중심이 움직이는 저울입니다. 상황에 따라 적절히 행동하는 것이죠. 그런데 그건 어디까지나 경도(經道)라는 원칙을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해야 한다고 합니다.

기(忌)와 탄(憚) 둘 다 ‘꺼리다’란 뜻으로, 망동되게 사는 것입니다. 우쌤은 솔성(率性)하지 않고 제멋대로 사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소인지중용야(小人之中庸也)를 소인지반중용야(小人之反中庸也)로 보는 판본도 있습니다.

3. 子曰 中庸 其至矣乎 民鮮能 久矣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중용(中庸)은 지극하구나! 사람들 중에 능한 이가 드문지 오래되었구나.

이 구절은 《논어(論語)》 옹야(雍也)편 27장(子曰 中庸之爲德也 其至矣乎 民鮮久矣)과 비슷합니다.

민(民)은 보통 백성을 가리키는데, 앞에서는 분명 중용(中庸)을 행하는 사람을 군자라고 했습니다. 얼핏 잘못 쓴 것 같지만,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성(性)을 보존하고 기르면 모두 중용(中庸)을 행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민(民)을 써도 딱히 틀린 말이 아니라는 것이죠.

4. 子曰 道之不行也 我知之矣 知者過之 愚者不及也 道之不明也 我知之矣 賢者過之 不肖者不及也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가 행해지지 않는 이유를 나는 알겠다. 안다고 여기는 자를 도()를 우습게 여기고, 어리석은 자는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가 밝혀지지 않는 이유도 나는 알겠다. 현명한 자는 도()를 지나치고, 어리석은 자는 그것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人莫不飮食也 鮮能知味也

사람들이 마시고 먹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능히 그 맛을 아는 이는 드물다.

도(道)는 1장을 참고하면, 솔성(率性)입니다.

아지지의(我知之矣)는 “나는 그 이유를 알겠다.”입니다.

지자(知者)는 “스스로를 현명하다고 여기는 사람”입니다. 과지(過之)는 도(道)를 지나치는 것으로, 도(道)를 우습게 알면서 소홀히 하는 것입니다. 중용(中庸)을 행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지자(知者)나 우자(愚者)는 똑같습니다.

우쌤은 인막불음식야, 선능지미야(人莫不飮食也, 鮮能知味也) 이 구절이 사람들이 매일 마시고 먹지만 그 맛을 모르듯, 도(道)와 함께 살지만 그 이치를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5. 子曰 道其不行矣夫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가 행해지지 않는구나!

주석을 보면, “불명(不明)하기 때문에 행해지지 않는다.”고 돼있습니다. 이 장에서 우쌤은 선지후행(先知後行), 먼저 알아야 행할 수 있음을 얘기하셨습니다.

6. 子曰 舜 其大知也與 舜 好問而好察邇言 隱惡而揚善 執其兩端 用其中於民 其斯以爲舜乎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순임금은 큰 지혜를 가졌구나! 순임금은 묻기를 좋아하고 일상적인 말을 살피길 좋아하셨고, 악을 숨기고 선을 들추어내니 그 양 끝을 가지고 백성에게 알맞게 썼으니, 이로써 순임금이 되신 것이구나!

순임금은 주로 효(孝)의 대명사로 불렸습니다만, 여기서는 대지(大知)란 표현을 쓰면서 앎의 모범으로 등장하네요. 주석에서는 순임금의 대지(大知)를 자용(自用)하지 않는 것과 취저인(取諸人)으로 풀었습니다. 우쌤은 자용(自用)이 곧 자대(自大), 스스로를 크다고 여기는 태도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취저인(取諸人)은 ‘남에게서 장점을 취하는 것’입니다.

이언(邇言)은 일상에서의 대화입니다.

은악이양선(隱惡而揚善) 이 구절에서 선을 드러내는 건 이해가 돼도 악을 숨긴다는 게 이상했는데요. 악을 일부로 들춰내지 않는 것도 선을 행하는 것 중 하나입니다.

양단(兩端)을 흔히 선과 악과 같이 양 극단으로 생각하는데, 우쌤은 선을 행하는 여러 선택들이 양단(兩端)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행동을 행하기 위해서 여러 방법을 고려한다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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