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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인류학] 10.27 후기

작성자
이응
작성일
2017-10-27 17:17
조회
100
<바리데기>, <심청>, <신바닥이 이야기>, <가믄장 아기>, <대부>, <황금새>, <세 개의 깃털>, <별별털복숭이>



# 편집증적 아버지

이번주 키워드는 ‘아버지’입니다. 동화 속에 등장하는 ‘아버지’는 그 역할이 아주 미미합니다. 특히 ‘엄마’의 동선과 변화를 함께 대조해서 보면 더욱 그렇지요. 엄마는 계모로 변신하거나(백설공주), 호랑이가 되거나(해와 달이 된 오누이), 죽거나(장화홍련) 하면서 역할과 배치를 계속 바꾸어내는데 반해, 아버지에게 변화란 늘 자기가 아는 세계에서 그치고 말아요. 변화라고 할만한 건, 전처가 죽어서 후처를 구하거나(별별털복숭이), 아들들을 시켜 자신이 사는 곳으로 뭔가를 가져오게 하는 것(세 개의 깃털)이 전부지요. 명령하거나, 붙들거나, 보이는 것에 집착하는 아버지들..!

이번에 읽은 동화를 보면서 흐르지 못하는 아버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어요. <심청전>의 어머니는 죽는 순간까지 집안 살림이며, 자기가 죽은 후에는 어떻게 대처하라는 등등 삶의 구체적인 면면을 일러주고 죽으며, 죽은 이후에는 선녀가 되어 자기 능력을 펼치며 사는식으로 삶의 동선이 다채롭고 변화무쌍하다는 느낌을 주는데요. 이에 반해 심봉사는 권씨 마누라 죽고 나니 딸 청이를 정신적 마누라로 삼고, 청이가 죽고나니 뺑덕어멈을, 그 다음엔 안씨 부인을 마누라 바꿔가며 옆 자리를 누군가로 대체하는 것이 전부지요.

<별별털복숭이>에서 보이는 아버지도 욕망이 한 방향으로 흐르긴 마찬가지. 왕비가 죽자 왕비와 꼭 닮은 딸을 탐하는 아버지. 이에 대한 현정샘의 해석이 참 흥미로웠는데요. 아버지가 딸에게 격렬한 사랑을 느낀건 엄마와 꼭 같은 ‘황금색 머리털’을 가졌기 때문이란 것. 들뢰즈는 욕망기계가 ‘부분대상들에 의해 생산된다’고 했지요. 아버지가 딸을 원하는 것은 의식적 층위에서 보면 경악할만한 일이지만, 무의식적 층위에서 보면 욕망은 인칭을 모릅니다. 아버지가 애초에 왕비를 사랑한 것은 그녀의 전부가 아니라, 부분적으로 절단된 면들, 가령 ‘황금색 머리털’을 절단·채취하여 섹스기계와 연결시킨 것이죠. ‘황금색 머리털’에 대한 편집증적 집착이 급기야 딸과의 결혼도 서슴치 않게 만듭니다.


# 딸들이 만들어내는 도주선

딸은 이런 아버지로부터 도망쳐 나오면서 별별털로 몸을 둘러 털복숭이가 됩니다. 아버지가 집착했던 한가지—‘황금색 머리털’을 온갖 색색의 털들과 뒤섞어버림으로써 아버지의 고착된 욕망에서 탈주선을 만들어낸 것이죠. 헌데 그렇데 도주해서 찾아간 곳은 또 다른 ‘왕’이 있는 곳입니다. 아버지를 떠나 또 다른 아버지에게로 귀속되는 공주. 이 부분은 아버지에 대한 저항이 한 번의 시도로 끝난건 아닌지 질문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그에 비하면 심청이는 스케일이 남다릅니다. 청이는 어려서부터 여러 아낙들에게서 젖을 먹으며 자란 존재예요. 한 엄마에게서 자란게 아니라 이 엄마, 저 엄마 품을 돌아다니며 자랐으니 기본적으로 한 부모에게 속해지지 않는 아이지요. 근본이 없는 존재! 부잣집 장승댁 부인이 심청을 양녀 삼고싶어 한들 심청의 욕망은 거기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심청은 그보다 바다의 제물이 되기로 마음먹어요. 표면적으로 보면 이는 아버지에 대한 효심으로 보이지요.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심청이 죽고나면 남겨진 아버지는 고생길에 놓일 것이 훤합니다. 게다가 딸을 죽이면서까지 눈을 떠야할 이유가 뭐 있겠어요. 오히려 심청이 그런 이유로 죽는다면 남은 아버지에게 들이닥치는 심리적 죄책감은 또 어떻구요. 그런점에서 심청의 결단은 극단적으로 보여지기도 합니다. 공양미 삼백석은 장승댁에 부탁하여 충분히 구할 수 있을 것을. 딱히 죽을 이유가 없었는데도 심청이 바닷물에 뛰어든건 왜일까요. 세미나에서 나온 이야기를 모아보면 아버지도, 청이를 길러준 이 동네도 청이의 스케일에 맞지 않아서라죠ㅋ

바닷물에 빠짐으로써 심청은 죽었다 다시 태어납니다. 그리고 역량이 증폭되지요. 다시 인간세로 돌아온 심청은 자신이 살던 고향으로 돌아가 아버지를 만나지 않고 황궁에 자리를 잡죠. 한 나라의 황녀가 된 심청은 전국의 모든 맹인들을 불러모읍니다. 마치 자신이 여러 사람들의 은덕으로 자란 것을 베풀기라도 하듯, 이제는 청이가 많은 사람들을 먹이는 존재가 되지요. 아버지는? 그 많은 사람 중에 동승하는 한 사람 정도이겠지요. 자식이란 자고로 부모에게 속해지지 않는 존재. 실로 심청이 보여주는 것은 아버지가 보지 못한 세상 혹은 아버지가 보는 것보다 훨씬 더 넓은 세상입니다. 그 덕에 아버지도 서울까지 제 발로 걸어나와 지금까지 보지 못한 세상 구경도 하고 눈을 뜨지요.


# 목표도 중심도 없는, 과정과 접속 뿐인 여행

동화는 쉽게 보수적으로 읽히기도 하는데, 이렇게 꼼꼼히 뜯어가며 읽어보니 질서에 대한 아주 강력한 저항이 들어있는걸 실감합니다. 실로 동화는 질서에는 관심이 없지요. 그래서 질서를 지향하는 아버지란 존재는 동화 속에서 별 역할이 없기도 하구요. 같은 모습이 반복 재생산 되는 것에 대한 극도의 거부. 때문에 동화속 주인공들은 언제나 길을 떠나지요. 부모 밑에 있는 것은 홈패인 공간에 고여버린 것, 더이상 새로운 욕망을 생성해내지 못하니까요.

그런점에서 <바리데기>의 일곱번째 딸 바리가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것은 어쩌면 큰 행운이라 할 수 있어요. 아들을 원했던 아버지는 일곱째로 태어난 바리데기마저 딸이란걸 알고 상심하여 버리라고 명령합니다. 그런데 막상 아버지가 병에 들자 여섯 언니들은 아무도 아버지 약을 구하러 갈 생각을 하지 않아요. 그들은 언제나 부모 밑에서, 홈 패인 공간에 욕망을 고여두고 살았기 때문에 흐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지요. 반면 태어날 때부터 물에 흘려보내진 바리데기는 태생 자체가 여행을 타고난 몸입니다. 자신을 버린 아버지가 병에 들었다는 것을 알고 서슴없이 주어진 운명을 수용하지요.

그런데 여행하는 바리데기의 모습을 보고있자면 아버지 살리는 약물을 구할 ‘목표’로 가는 것이 아닌거 같아요. 길 가다 밭 매는 할배 있으면 도와주고, 개울가에서 빨래하는 할매 있으면 도와주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접속하는 것들마다 접점을 만들어내지요. 아버지를 구하는 것이 정말 바리데기의 목표였나 싶을만큼, 남의 빨래 도와주고, 얼결에 남편도 생기고, 삼형제도 낳고. 중심을 여기 저기에 두면서 예상치 못한 사건을 완전 수용하고 이야기는 분열증적으로 뻗어나가지요.

약속대로 3년 후 남편이 사라지자 바리데기는 아무런 미련 없이 약을 챙겨 집으로 돌아옵니다. 바리데기에게 남편이란 자신을 고정시켜 두는 지점이 아니라 수많은 경유하는 지점 중의 하나란 점이 유쾌하게 다가왔어요. 그렇게 풍부한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니 병 걸렸던 아버지 뿐만 아니라 어머니도 진즉에 돌아가셨지요. 구해온 약초로 부모님을 살려드리고, 이후에 바리데기는 모든 잘못된 죽음을 왕생극락으로 인도하는 오구신이 됩니다.


다음 시간에는 <안티오이디푸스>를 읽고 궁금했던 점을 정리해옵니다.

에세이 기간이 슬슬 다가오고 있어요. 다음시간에 선민샘께서 다시 설명해주시겠지만, 에세이는 강의에서 배운 내용을 통해 동화를 분석하고, 거기에서 새로 배운 지점을 잘 정리하시면 되어요. 분량은 A4 2-3쪽.

다음주 간식과 후기는 지은.

쌀쌀한 날 감기 조심하시구요, 다음주에 만나요~

전체 2

  • 2017-10-27 18:59
    (채운) 오오! 댓글을 달지 아니할 수 없는 후기로군요! 학인분들의 더욱 잔혹한 동심파괴, 기대기대해 봅니다~~

  • 2017-10-27 21:12
    특히 오늘은 '딸바보'와 '삼촌팬' 담론의 상관관계에 대한 분석으로 토론을 시작했지요. 우리 일상의, 습속의, 넘쳐나는 말 속을 흐르는 '욕망하는 기계'의 모습을 뜯어볼 수 있었습니다.
    먹이고 살리는 심청이의 능력이 증폭, 또 증폭했던 것처럼 동화를 읽는 우리의 힘도 쑤욱쑤욱 커져가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