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좌 후기

[죽음을 철학하다] 첫 시간 후기입니다 !

작성자
윤영
작성일
2018-02-21 09:00
조회
127
안녕하세요! 어제 [죽음을 철학하다]에서 강의를 듣고 함께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번 공부에서 '죽음'에 대해서, 혼자서라면 쉽게 가지지 못 했을 새로운 생각과 느낌을 얻어서 정말 좋았습니다. 그 중 몇 가지 생각 및 질문을 후기를 쓰는 겸 공유하고자 합니다! :D

1)

우선은 제가 수업 시간 이전에 먼저 이반 일리히의 책을 보고 느낀 점이었습니다.

"중세에 영원이란 신의 존재와 함께 역사에 내재해 온 것이었다. 이제 죽음은 직선의 시계 시침이 멈추는 때이고 영원이 인간과 만나는 때가 되었다. 세계는 이 존재를 성스럽게 하는 것이 아니게 되었고 루터(...)와 함께 이 세계는 신이 구원하여야 할 부패의 장이 되었다. 시계가 증가했다고 하는 것은 이러한 의식의 변화를 상징한다. 연속하는 시간이 지배적이됨에 따라 그 정확한 계측과 몇 가지 사건의 동시성의 인식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고 개인의 동일성의 인식을 위한 새로운 구조가 고안되었다. 개인의 동일성은 개인의 일생의 완전함 속에서가 아니라 사건의 연속과 관련되어 찾아지게 되었다. 죽음은 전체의 끝인 것을 그만 두고 연속하는 중단이 되었다." - 이반 일리히, <병원이 병을 만든다>, p.198

"새로운 기계, 곧 시간을 같은 길이로 구분하여 밤낮을 정할 있는 기계는 또한 모든 사람들을 같은 법칙하에 두었다." - 이반 일리히, <병원이 병을 만든다>, p.199

흔히들 요절하면 어린 나이에 안타깝다, 혹은 그 아이 몫까지 살아야 한다, 식으로 말합니다. 이전에도 이런 말을 들었을 때 무언가 찝찝한 기분이 들었는데 그 이유를 정확히 집어낼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위 구절을 읽었을 때, 그 이유를 드디어 찾은 듯 했습니다.

우리는 어느새 개인을 넘어 큰 사회의 흐름 속에서 개인들을 마치 공장에서 찍어낸 부품들 마냥 동일하게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우리는 같을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아니 같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냥 완전 따로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회에서 주어진 '개인의 동일성'이라는 개념을 믿고 억지로 서로 이해하려고 할 때, 우리는 '허무'를 느끼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너무나도 다르기 때문에, 아무런 감정도 정신도 피부 바깥으로는 도저히 공유할 수 없기 때문에, '오해'를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즉, 개인의 동일성은 오해의 필연성 앞에서 우리에게 허무를 가져다 줄 뿐입니다.

반대로, 개인의 이질성이라고 표현을 해야 할까요. 이 입장에서 개개인은 완전히 다르고, 그러므로 '개인' 그 자체의 입장에서 그의 삶은 언제나 완성됩니다. 요절같은 건 없습니다. A가 90살까지 살아도 본인 몫 다 산 것이고, B가 12살에 죽었어도 스스로를 완전하게 살다 간 것입니다. 여기서 어떤 죽음에 대한 상대적인 안타까움은 소멸합니다. 다만 죽음 그 자체가 가져다주는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지극한 슬픔은 아직 무시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2)

Q. '탄생'을 초점으로 봤을 때 사람은 날이 갈 수록 늙어간다고 말한다. 하지만 '죽음'의 입장에서는, 사실 사람은 시간이 흐를수록 오히려 젊어지는 것 아닐까?

어제 세미나 시간 때, '치매가 오히려 자연스러운 과정일 수 있다.'라는 말을 듣고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이 떠올랐습니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은 노인에서 태어나 시간이 갈 수록 아이가 되는데, 치매 또한 어떻게 보면 연륜의 지식이 없는 아이가 된 상태라고도 여길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이렇게 늙음과 젊음이 혼재된 상태에서 다시 생각해보니, 위 질문이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죽음'을 조금 더 많이 말하고 이와 친해진다면, 노인을 아기천사만큼이나 사랑스럽고 긍정적이게 볼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연쇄 질문도 세미나 시간 때 들은 이야기를 토대로 떠오릅니다.

3)

Q. 가장 능동적인 죽음은, 아예 나 자신이 스스로의 마지막 순간을 선택하는 '자살'이라고 볼 수 있는가? (<마담 보바리>의 보바리 부인이 비소를 먹고 죽어버리는 것 또한 능동적인 죽음이 될 수 있는가?) 추가로, '능동적인 죽음'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인가?

사실 좋거나 나쁜 죽음이 없다면, 모든 죽음들이 그냥 죽음일 뿐이라면, 굳이 능동적인 죽음을 추구하지 않아도 될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사실은 또 마음에 꼭 들지는 않습니다. 왠지 능동적인 죽음을 추구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또한 그냥 수동적이게 살고, 수동적이게 죽고, 그러니까, 남에게 나를 다 떠넘기고 싶기도 합니다. 저 자신에게 비추어 봤을 때, 나대로 능동적이고 고집스럽게 살면 고통스럽고, 남대로 수동적이고 줏대없이 살면 좀 편하긴 했던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음...이 질문과 의문은 아직 아무런 실마리도 잡히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 공부하면서 저만의 태도를 찾아나서겠습니다.

[죽음을 철학하다]의 첫 시간은 죽음을 통해서 시간, 그리고 삶을 새롭게 맛볼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앞으로의 죽음을 철학하는 시간들도 너무 기대됩니다. 언제나 설레이는 마음으로 임하고 싶습니다! 함께 공부할 수 있는 기회 주셔서 감사합니다! XD
전체 2

  • 2018-02-21 10:32
    자기답게 죽을 수 있는 능력이 곧 자기답게 살 수 있는 능력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수업 시간에 들었던 질문이 앞으로의 싹이 되겠군요! '찬란한 죽음'이라는 윤영이의 해석도 앞으로 어떻게 변해갈지 기대가 됩니다! 짝짝짝!!! ^^

  • 2018-02-21 14:40
    <필경사 바틀비>의 죽음 ... . 요즘 안락사, 웰다잉을 부르짓는 지금에 철학할 수 있는 죽음으로 가끔 들리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