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n

0502 수업 공지

작성자
수경
작성일
2016-04-28 19:13
조회
527
4월 25일 금강경 정리 올립니다.
지난 시간 읽은 범위는 12~15입니다만, 수업 진행은 11~14였으므로 이를 따릅니다.
후기는 은남쌤께서 잘 올려주셨으니 참고하시고요. 간식은 은하쌤 되시겠습니다^^
아참, <인간> 1~4장까지 읽어오시고 공통과제 해오시고요. 요거 발제는 미영쌤께서 맡아주셨습니다아.
(조금 전 덧붙인 글의 폰트가 왜 저렇게 다른지 모르겠네요. 어떻게 수정하는지도 모르겠고. 이것저것 해보다 걍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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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無爲福勝分 (무위복이 수승함)

須菩提 如恒河中所有沙數 如是沙等恒河 於意云何 是諸恒河沙 寧爲多不 須菩提言 甚多 世尊 但諸恒河 尙多無數 何況其沙
“수보리야, 항하에 있는 모래처럼 많은 항하가 또 있다면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모든 항하에 있는 모래가 얼마나 많겠느냐.” 수보리가 말씀드리되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다만 저 여러 항하만이라도 오히려 무수히 많거늘 하물며 그 모래수이겠습니까.”
須菩提 我今實言告汝 若有善男子善女人 以七寶滿爾所恒河沙數 三千大千世界 以用布施 得福多不 須菩提言 甚多 世尊
“수보리야, 내가 이제 진실한 말로 너에게 이르노니, 만약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칠보로써 저 항하의 모래수와 같은 삼천대천세계에 가득 채워서 보시한다면 얻을 복이 많겠느냐.” 수보리가 말씀드리되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佛告 須菩提 若善男子善女人 於此經中 乃至 受持四句偈等 爲他人設 而此福德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되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이 경 가운데서 사구게만이라도 받아 지니고 다른 사람을 위하여 설한다면 그 복덕은 앞에서 칠보로 보시한 복덕보다 수승하리라.”

<무위복승분>은 보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보시란 무엇인가? 수업 시간에 들은 바로는 단지 주는 것이 아니고, 아니 그보다 전에 도대체 ‘주는 것’ 자체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누구에게 이러저러한 것을 준다’라는 생각이 있는 한 보시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면 ‘준다’는 이미지가 남아 있는 한은 아무리 좋은 것을 주어도, 기쁘게 주어도 그것은 찌꺼기 같은 걸 남길 수밖에 없지요.
그게 꼭 보답받길 바라는 마음이라든지 알아주지 않는 데 대한 서운함이 아니라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주었다, 그가 받았다, 이 관념 자체에 아직까지 주는 ‘내’가 있고 받는 ‘상대’가 있는 거지요.
실상 보시에서는 주는 주체도 받는 주체도 달리 없습니다. 차라리 보시는 동시적인 주고받음이거나 나눔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가장 좋은 것을, 준다는 의식 없이 주고 또 받는 것. 가령 탁발의 과정은 중생도 구도자도 모두 서로에게 깨달음의 길을 함께 할 기회를 열어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수업에서 들은 인상적인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보시는 자기에게 있는 것을 ‘버리는 것’이며, 그것도 ‘버릴 수 없는 바로 그것’을 버리는 것이다…….
집착이나 욕망이 남아 있고서는 가장 소중한 것을 버릴 수 없지요. 왜, 막장드라마들이 보여주는 진실 한 토막이 있잖아요.
1회부터 마지막까지 악녀로 나오던 주인공 친구가 갑자기 변하기 위해서 그녀는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잃어야 합니다. 모든 인간관계와 명예와 재력과 삶의 모든 가능성을.
그 중 하나라도 남아 있으면 나는 끈질기게 그에 달라붙어 떨어지려 하지 않지요.
진정한 보시란 집착하지 않을 때 가능한 것, 그러니 종국적으로는 ‘나’가 없을 때 가능한 것이지요.
그러므로 진정한 보시는 지혜가 있는 자만이 가능하답니다. 그만이 중생에게 보시하고 중생을 구제할 수 있지요.
그런데 재미있는 건, 아타 구별이 없는 보살에게는 중생 구제가 곧 자신의 구제이기도 하다는 사실이에요.
결국 ‘나’는 깨달음으로 가는 길에서 출발점이면서 동시에 귀결점일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보살을 분열증 환자와 동급으로 치부하지 않는 한 보살에게도 ‘자기’가 존재합니다. 단 그때 자신은 깨달음 끝에 이 세계에서 편안함을 느끼고 일어나는 일들에 기뻐할 수 있는 존재, 다시 말해 세계와 구분되지 않는 자신이겠지요.
채운쌤은 이를 인과가 아니라 순간으로 세계를 파악하는 것이라 설명하셨죠. 기대하는 바도 없고 남길 것(=상)도 없이 세계에 존재하기.
하지만 이런 전환은 배움 없이는 가능하지 않은 법. 그래서 무위복승분에서는 사구게 수지독송을 말합니다.
사구게를 수지독송한다는 것은 그냥 기계적으로 구절을 외는 것이 아니라(물론 외운다는 행위 자체가 갖는 무게도 상당한 듯합니다. 외고 또 외는 것은 곧 생각의 회로를 바꾸는 놀라운 결과를 불러오기도 한다네요), 늘 지니고 다니면서 자신을 보고 자신을 향해 묻는 행위, 말하자면 사유를 의미한답니다.
사회의 이념과 집단적 욕망 등으로 구조화된 마음을 지켜볼 수 있는 사유의 힘은 사구게를 지님으로써 가능하다고. 화두를 든다는 것도 이런 의미인 듯합니다.
이런 이유에서라도 칠보 보시는 법보시에 못 미친다 할 수 있답니다. 칠보 보시란 오가는 사물의 속성상 한 방향으로 이동하는 것이지요. 칠보는 내가, 남에게, 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법보시는 무엇보다도 자기에게 묻는 것이고 그럼으로써 자기의 편안함을 불러옵니다. ‘자기’에 개체로서의 나만 포함되지 않으므로 편안할 수 있답니다.
말하면 말할수록 말에 얽매여 중언부언하는 느낌입니다만… 아무튼 지금으로선 대략 이렇게 정리되네요.

12. 尊重正敎分 (바른 가르침을 존중함)

復次 須菩提 隨說是經 乃至 四句偈等 當知此處 一切世間天人阿修羅 皆應供養 如佛塔廟
그리고 또 수보리야, 어디서나 이 경을 설하되 사구게만이라도 설한다면, 마땅히 알라. 이곳은 일체 세간의 천상, 인간, 아수라 등이 다 응당 공양하기를 부처님의 탑묘와 같이 할 것이어늘
何況有人 盡能受持讀誦 須菩提 當知是人 成就最上第一希有之法
어찌 하물며 어떤 사람이 능히 경을 다 수지하고 독송함이겠는가. 수보리야,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은 최상이며 제일인 희유한 법을 성취하리라.
若是經典所在之處 卽爲有佛 若尊重弟子
만약 이 경전이 있는 곳에는 곧 부처님과 존중할 제자가 계심이 되느니라.

경전이 있는 곳이란 경전이 물리적으로 모셔진 곳이라기보다는 경전을 외우는 자들을 말한답니다. 사구게를 수지독송하는 자들이 있는 곳이야말로 곧 부처가 계신 곳이라는 말이죠. 결국 문제는 경전을 읽고 외우는 나의 마음자리를 보는 것이 관건이라는.

13. 如法受持分 (법답게 받아지님)

爾時 須菩提白佛言 世尊 當何名此經 我等云何奉持 佛告 須菩提是經 名爲金剛般若波羅蜜 以是名字 汝當奉持
그때에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이 경을 무엇이라 이름하며 저희들이 어떻게 받들어 지니오리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되 “이 경은 금강반야바라밀이니 이 이름으로써 너희들은 마땅히 받들어 지닐지라.
所以者 何 須菩提 佛說般若波羅蜜 卽非般若波羅蜜 是名般若波羅蜜
그 까닭이 무엇인가. 수보리야, 부처가 설한 반야바라밀은 곧 반야바라밀이 아니고 그 이름이 반야바라밀이니라.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有所說法不 須菩提白佛言 世尊 如來無所說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설한 바 법이 있느냐”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어 말씀드리되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설하신 바가 없습니다.”
須菩提 於意云何 三千大千世界所有微塵 是爲多不 須菩提言 甚多 世尊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미진이 많지 않겠느냐.” 수보리가 말씀드리되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須菩提 諸微塵如來說 非微塵 是名微塵 如來說世界 非世界 是名世界
“수보리야, 모든 미진을 여래가 설하되 미진이 아니라 그 이름이 미진이며, 여래가 설한 세계도 세계가 아니라 그 이름이 세계니라.
須菩提 於意云何 可以三十二相見如來不 不也 世尊 不可以三十二相得見如來 何以故 如來說三十二相 卽是非相 是名三十二相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삼십이상으로써 여래를 볼 수 있겠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삼십이상으로 여래를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설하신 삼십이상은 곧 상이 아니고 그 이름이 삼십이상이기 때문입니다.”
須菩提 若有善男子善女人 以恒河沙等身命布施
수보리야, 만약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항하의 모래수와 같은 많은 목숨으로 보시했을지라도
若復有人 於此經中 乃至 受持四句偈等 爲他人說 其福 甚多
만약, 또 어떤 사람이 이 경 가운데서 사구게만이라고 받아 지녀서 다른 사람을 위해 설한다면 그 복이 저 복보다 매우 많으니라.”

 위에서 ‘부처가 설한 바 없다’는 말에 대한 규봉선사의 해석이 재미있습니다. “증득한 것과 같다면 곧 설한 것도 없으리라.”
채운 쌤 말씀에 의하면 부처는 말한 바가 곧 삶이었던 것이니 설법한 내용이 달리 있지 않다는 거죠.
부처가 하는 모든 말은 삶인바, 그 이상을 말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세상에 덧붙이는 말이 따로 없으셨으니 우리네처럼 시시때때 구업을 짓지도 않았다는.
오오, 일상적 대화에서도, 강의나 글에서도 책임질 수 없는 말을 무의식으로 쏟아내어 늘 반성 모드인 저로서는 아주 멀고도 인상적이고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하는 이야기였습니다;

14. 離相寂滅分 (상을 떠나서 적멸함)

爾時 須菩提 聞說是經 深解義趣 涕淚悲泣 而百佛言 希有 世尊 佛說 如是甚深經典 我從昔來 所得慧眼 未曾得聞 如是之經
이때에 수보리가 이 경 설하심을 듣고 깊이 그 뜻을 깨달아 눈물을 흘리고 슬피 울면서 부처님께 사뢰었다. “희유하십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이렇게 심히 깊은 경전을 설하심은 제가 예로부터 얻은 바 혜안으로도 일찍이 이와 같은 경은 얻어 듣지 못하였습니다.”
世尊 若復有人 得聞是經 信心淸淨 卽生實相 當知 是人成就第一 希有功德
세존이시여, 만약 또 어떤 사람이 이 경을 얻어 듣고 신심이 청정하면 곧 실상을 내리니, 마땅히 이 사람은 제일 희유한 공덕을 성취한 사람임을 알겠습니다.
世尊 是實相者 卽是非相 是故 如來說名實相
세존이시여, 이 실상이란 곧 이 상이 아님이니 이 까닭에 여래께서 실상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世尊 我今得聞如是經典 信解受持 不足爲難
세존이시여, 제가 지금 이와 같은 경전을 얻어 듣고 믿어 알고 받아 지니기는 족히 어렵지 않거니와
若當來世 後五百歲 其有衆生 得聞是經 信解受持 是人 卽爲第一希有
만약 오는 세상 후 오백세에 그 어떤 중생이 이 경을 얻어 듣고서 믿어 알고 받아 지닌다면, 이 사람은 곧 제일 희유함이 되겠습니다.
何以故 此人 無我相 無人相 無衆生相 無壽者相 所以者何 我相 卽是非相 人相 衆生相 壽者相 卽是非相 何以故 離一切諸相 卽名諸佛
왜냐하면 이 사람은 아상이 없으며 인상이 없으며 중생상이 없으며 수자상도 없기 때문입니다. 까닭이 무엇인가 하면 아상은 곧 이 상이 아니며 인상, 중생상, 수자상도 곧 이 상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일체 모든 상을 떠난 것을 이름하여 모든 부처님이라 하기 때문입니다.”
若復有人 得聞是經 不驚 不怖 不畏 當知 是人 甚爲希有
만약 또 어떤 사람이 이 경을 듣고 놀래지 않고 겁내지 않으며, 두려워하지도 않으면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은 심히 희유함이 되느니라.
何以故 須菩提 如來說第一波羅蜜 卽非第一波羅蜜 是名第一波羅蜜
무슨 까닭인가. 수보리야, 여래가 설한 제일 바라밀이 제일 바라밀이 아님일새 그 이름이 제일 바라밀이니라.
須菩提 忍辱波羅蜜如來說 非忍辱波羅蜜 是名忍辱波羅蜜
수보리야, 인욕바라밀도 여래가 설하되 인욕바라밀이 아니고 그 이름이 인욕바라밀이니라.
何以故 須菩提 如我昔爲歌利王 割截身體 我於爾時 無我相 無人相 無衆生相 無壽者相
어찌한 까닭인가. 수보리야, 내가 옛적 가리왕에게 신체를 낱낱이 베일 때에 나는 그때에 아상도 없었고 인상이 없었으며 중생상도 없었고 수자상도 없었느니라.
何以故 我於往昔節節支解時 若有 我相 人相 衆生相 壽者相 應生嗔恨
왜냐하면 내가 옛적에 마디마디 사지를 베일 때에 만약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었으면 응당 성내고 원망함을 내었으리라.
須菩提 又念過去於五百世 作忍辱仙人 於爾所世 無我相 無人相 無衆生相 無壽者相
수보리야, 또 과거 오백세 동안에 인욕선인이었던 일을 생각하니 그때의 세상에서도 아상이 없었으며 인상도 없었고 중생상도 없었으며 수자상도 없었느리라.
是故 須菩提 菩薩 應離一切相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
그러므로 수보리야, 보살은 응당 일체상을 떠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낼지니
不應住色生心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 應生無所住心
응당 색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며, 응당 성, 향, 미, 촉, 법에 머물러서도 마음을 내지 말고 응당 머문 바 없는 그 마음을 낼지니라.
若心有住 卽爲非住
만약 마음에 머묾이 있으면 곧 머묾 아님이 되느니라.
是故 佛說 菩薩 心不應住色布施
그러므로 부처님이 말하기를 “보살은 마땅히 마음을 색에 머물지 말고 보시하라”하느니라.
須菩提 菩薩 爲利益一切衆生 應如是布施
수보리야, 보살은 일체중생을 이익하기 위하여 응당 이와 같이 보시하느니
如來說一切諸相 卽是非相 又說一切衆生 卽非衆生
여래가 설한 일체의 모든 상은 곧 이 상이 아니며 또한 일체의 중생이라고 설함도 곧 중생이 아니니라.
須菩提 如來 是眞語者 實語者 如語者 不狂語者 不異語者
수보리야, 여래는 참다운 말을 하는 자며 실다운 말을 하는 자며 사실과 같이 말하는 자며 거짓이 아닌 말을 하는 자며 다른 말을 하지 않는 자니라.
須菩提 如來所得法 此法無實無虛
수보리야, 여래가 얻은바 법인 이 법은 실다움도 없고 헛됨도 없느니라.
須菩提 若菩薩 心住於法 而行布施如人入闇 卽無所見 若菩薩 心不住法 而行布施如人有目 日光明照 見種種色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마음을 법에 머물러서 보시하면 마치 사람이 어두운 곳에 들어가매 아무것도 보이는 바가 없는 것과 같고, 만약 보살이 마음을 법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면 마치 사람이 눈도 있고 햇빛도 밝게 비쳐서 여러 가지 사물을 보는 것과 같느리라.
須菩提 當來之世 若有善男子善女人 能於此經 受持讀誦 卽爲如來 以佛智惠 悉知是人 悉見是人 皆得成娶 無量無邊功德
수보리야, 오는 세상에서 만약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능히 이 경을 받아지니고 읽고 외우면, 여래가 부처의 지혜로써 이 사람을 다 알며 이 사람을 다 보아서 모두가 한량없고 끝없는 공덕을 성취하게 되리라.

아무래도 긴 대목이라 그런지 재미있는 이야기가 여럿 있었습니다.
일단 수보리는 왜 울었는가?(涕淚悲泣) 보니 야부는 돌고 돌아 밟은 고향 길을 밟고 긴 세월을 깨달아 울었다 하고, 비슷하게 육조도 지금 비로소 부처의 뜻을 깨달았음에 울었다고 풀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리 고생했건만 왜 이제사…!’ 이런 정서는 아닌 것 같죠;
지나온 긴긴 길이 어디로 이어지는 모르고 걷다 이제야 때가 와서 그 모든 것이 내가 나왔던 고향 길로 이어지는 것임을 깨달은 데서 오는, 어떤 정서라고 딱 꼬집어 말할 수 없는 그런 눈물인 모양입니다.

또 하나 짧긴 해도 재미있었던 이야기는 解라는 단어의 풀이였는데요. 相을 흐르는 세계 안에서 심소가 만들어놓은 하나의 매듭이라 이해한다면, 해란 그것을 푸는 것으로 대응된다는 이야기.
들으면서 오, 그렇군! 싶었습니다.
단지 문제가 미리 가지고 있는 정해진 답이 아니라, 기존에 답이라고 생각되던 것을 풀어버리는 것이 해라면, 해가 곧 문제일 수 있겠다 싶었어요. 물음 자체가 곧 해!

만약 부처 입멸 후 오백 세에 이 경을 수지하는 자가 있다면 그런 자는 완전 희유할 거라고 말하는 수보리의 말에 붓다도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그렇지 그렇지’ 하였다죠. 어째서?
채운쌤 왈, 부처 당시의 성문들조차 남아 있지 않은 시대, 그야말로 말만 남아 있는 시대에 말 가지고 싸우는 사람들 천지일 텐데, 그런 가운데에서 상 이전의 이치를 깨달으려 하는 자라면 희유하고 또 희유할 거라는.
예나 이제나 인간은 말을 가지고 배우고 사유할 수밖에 없어 자꾸만 말의 그물에 걸려 넘어지고 남의 말을 걸어 넘어뜨리려 하는데, 배운 사람일수록 더하기 마련일 텐데…….
아마도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이 구절이 더 마음에 남는 모양입니다. 말을 가지고 싸우되 말에 걸리지 않고 자유로울 수 있으려면 대체 어떤 마음으로, 무엇을 바라보며 공부해야 할까……. 생각하고 생각해볼 일입니다.

대체 왜 이 경을 읽고 무서워하거나 하지 않는 자가 희유하다 했을까요? 솔직히 전 무섭진 않았는데, 제가 희유한 걸까요;
채운쌤 설명으로는, 어떤 이야기가 상으로 떠오르지 않으면 불편함을 느끼는 중생에 대한 말씀이랍니다.
이야기를 듣던 당시에는 끄덕끄덕 해보기도 하지만 막상 집에서 혼자 그 이야기를 되새겨보거나 다시 책을 읽으면 뭔가 잡히지 않고 그래서 결국 내 인식이 바뀌는 일도 없는 그런 거, 우리 꽤 익숙하지요^^
우리네 중생은 담대하거나 깨달아서 불경불외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그저 아둔한 까닭에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해 이게 얼마나 위험하고 새로운 이야기인지 실감하지 못하는 거라는.

마지막으로 인욕바라밀. 글자 풀이대로라면 인욕이란 욕됨을 참는 것인데 흥미롭게도 인욕바라밀은 참지 않는 것이랍니다.
채운쌤 말씀대로 보통 우리가 어떤 것, 어떤 일을 욕된 것이라 표상하는 경우는 제 생각대로 되지 않았을 때죠.
그래서 나의 노고나 걱정에 대해 상대가 단지 무대응으로 나올 때(자신이 그렇게 받아들였을 때)에도 이를 무례한 것으로 여기고 치욕이라 생각합니다.
이는 자신이 이러저러한 사물이든 존중이든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데서 나온답니다.
그러니까 채운쌤 설명대로 ‘내 것’이라는 생각으로부터 욕됨이 만들어진다는 것, 달리 말하자면 그 욕됨이란 사실 상대가 아니라 나 스스로가 만든 것이라는 것.
(이와 관련해 가장 급진적인 예가 전생에 가리왕에게 신체를 낱낱이 베일 때에도 붓다는 생명이 내 것이라는 상조차 없어 원망이 없었다는 이야기였죠;)
아무튼 인욕한다는 것은 그러므로 상대의 무례함을 참는 것이 아니라 ‘내가 또 상을 짓는구나’하고 나를 보는 것(한 번 욕됨을 느꼈을 때 그를 알아채고 그 마음을 고쳐먹어야 한다고, 그때 마음을 돌이키지 못하는 탓에 업이 된다고 하는데, 네, 물론 이게 참 안 됩니다;), 내가 못 참아하는 것을 내 수행처로 삼는 것을 뜻한답니다.
그러니 ‘이노무 지긋지긋한 세계’(채운쌤 왈, 사바세계 뜻이 忍土라 하셨지요)가 곧 나의 수행처라는.


자, 오늘도 수행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살아볼까요~ ㅎㅎㅎ
모두들 다음 시간에 만나요.

전체 1

  • 2016-04-30 07:03
    보시에 대한 이야기는 늘 들어도 낯선것 같아요=
    '준다'가 아니라 버릴 수 없는 것을 버린다,,, 원망이나 증오, 애착같은 마음을 버릴 수 있는 것도 보시라면 확실히 보시는 자기구제와 같이 가는 것 같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