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n

0509 수업 공지

작성자
수경
작성일
2016-05-05 14:57
조회
493
꿀 같은 연휴 잘 보내고 계신가요들?
지금 연구실에는 가정 같은 것과 무관한 다섯 명이 각자의 자리에 앉아 무언가에 골몰하고 있습니다만...

자… 지난 수업에서는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 : 인간>의 4장까지를 함께 읽었었죠.
채운 쌤께서 잡아주신 포인트는 이렇습니다. 일단, 나의 주관은 세계 안에서 만들어지고 그런 채로 나는 세계를 본다는 것.
피셔는 이를 ‘상보성’이라는 단어로 설명하고 있는데요, 이 말자체가 아주 의미심장합니다.
가령 숫자 1과 다른 숫자 1 사이에는 상보성이 성립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동일한 것끼리는 서로를 돕거나 보완할 만한 게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채운 쌤에 따르면 하나가 아닌 것, 그러니까 서로 차이가 나는 것끼리만 상즉하고 상입할 수 있답니다. 서로 다르기 때문에 서로 면해 있을 수 있고, 그렇게 면해 있으면서 서로가 서로를 구성할 수 있다는 거죠.
채운 쌤 왈, 존재하는 것은 오직 차이다.
나와 세계 사이에 형성되는 역동적 관계는 둘 간의 차이로부터 발생합니다. 차이를 소멸시키지 않는 차원에서 매번 새롭게 구성되는 것, 그것이 나와 세계가 맺고 있는 관계랍니다.
나는 세계 안에서 이러저러하게 생각하고 인식할 수 있으며, 그런 나의 인식이 세계를 이러저러한 것으로 변모시킵니다. 잠자리의 세계, 나비의 세계, 나의 세계, 너의 세계, 오늘 나의 세계, 어제 나의 세계…….

피셔가 인간 뇌의 기능을 '전환'과 '번역'이라 정리한 것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답니다.
채운 쌤 왈, 모든 세계는 번역된 것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피셔가 간략하게 만들어놓은 다음의 도식을 보는 것으로 충분할 듯합니다.
“시각신호의 전환 과정 : 물리적 신호(빛) → 화학적 신호(단백질) → 전기적 신호(신경충격) → 뇌 신호(흥분) → 보기(의식)”
그러니까 뇌는 외부의 자극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다른 기호로 전환시켜 일련의 마디들을 통과시킨 뒤에야 비로소 그것을 의식 층위로 띄워 올립니다.
우리가 세계를 이러저러한 것으로 인식하기 위해 거쳐야 할 마디들, 그리고 마디 사이의 틈에서 변환되고 제거되는 정보들을 상상해보고 나니, 왜 나는 대상을 A라고 이해하는데 그는 그것을 B라 이해하는지, 왜 둘은 서로를 끝내 설득시키지 못하는지 조금은 납득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피셔의 틀에서라면 그건 내 몸의 전달 체계, 지각 회로가 그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내 뇌가 특정하게 변환시키고 번역해서 출력된 세계A는 내게는 추호도 의심할 수 없는 진실입니다. 그러니 미치고 팔딱 뛰는 거지요 -_-;

이로부터 두 가지 재미있는 결론을 끌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대상을 A라고 보는 나와 B라고 보는 그이므로, 우리는 서로 상보적일 수 있다는 것이 그 첫 번째입니다. 같아지는 것이 아니라 상보적이 되는 것, 그것은 하나의 의견으로 합의를 보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과 더불어 있음으로써 세계를 보는 다른 눈을 획득하게 되는 것을 의미하겠죠.
박 터지게 싸우는 것은 우리가 서로 상보적 관계라는, 서로 다른 채로 붙어 있으면서 영향을 끼치는 사이라는 증거……. 가 맞을까요 ㅋㅋ
두 번째, 특정한 세계를 산출하는 나의 지각 회로는 의식 이전의 층위에서 형성되고 운동하는 것인바, 세계를 바꾸고자 한다면 무엇보다도 지각 회로를 문제 삼아야 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세계를 해석하는 나의 세포, 나의 유전자 코드 같은.
피셔의 설명에 따르면 세포, 유전자 코드, 시냅스 등등은 한 번 만들어지면 영원히 정박해 있는 배가 아니라 그 자체가 끊임없이 다른 것들과 더불어 구성되는 것이랍니다.
세계와 내가 서로를 구성하는 것처럼, 내 몸 속의 세포들도 새로 들어오는 힘과 더불어 그리 한다네요.
의식 이전의 차원이라니, 그럼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군 — 요런 말을 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 있답니다.
인간의 능동성이 발휘되어야 할 부분은 바로 여기이고, 채운 쌤은 불가(佛家)에서 강조하는 몸 수행이 바로 이런 맥락이라 하십니다. <금강경>에서 붓다가 수보리에게 말하는 사구게 수지독송도 같은 맥락이죠.
해야 할 건 의지를 다지거나 계획표를 세우고 일기를 쓰고 하루를 반성하는 게 아니라, 지금 당장 ‘몸’을 바꾸기 위한 수행이랍니다.
몇 십 년을 이 몸으로 살면서 이미 굳어져버린 나의 지각회로는 한 찰나에 수만 가지의 익숙한 생각들을 가지 칩니다.
이를 그때 알아챌 수 있는 역량을 기르는 것 말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없다고 불교는 가르칩니다.
그럼 그 역량을 어떻게 기르느냐. 명상과 몸 수행을 통해 내 뇌에 다른 신호가 흐르도록, 내 뇌가 다른 신호를 번역할 역량을 기를 수 있도록 하는 거죠.
지금껏 좋다고 해오던 일을 그만 두고, 하기 싫다고 외면한 수고로운 일들을 시도하고, 그럴 때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마음을 일으키는지 지켜보기.

공부가 그런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을 아주 가~끔 합니다. 공부가 아주 잘 되어서가 아니라, 이따금 정말정말 하고 싶지 않아!라고 생각할 때 특히 더.
모든 공부가, 언제나 그런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적어도 어떤 공부는, 세계를 바꿉니다.
전인류의 세계를 바꾸는 건 망상가의 머릿속에서만 가능한 일이지만, 지금 당장 내 눈앞에 펼쳐진 나의 세계를 바꾸는 건 공부하는 사람의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벌어지는 사건 같습니다.

후기는 이 정도로 하고요... 다음 시간에는 금강경 17~20분分까지 읽어오셔요.
후기는 은하쌤 어여 올려주시고, 담주 간식은 안명애쌤께 부탁.

아참, 다다음 시간 <인간> 공통과제 쓰실 때는 수업 중 채운쌤 질문 염두에 두시길요. 대체 우리는 언제 어디서부터 인간인가? 배아 상태? 태아? 태어난 후? 혹은 그 외에 다른 문턱이 있다면?

자, 다음 시간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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