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n

0425 수업 공지

작성자
수경
작성일
2016-04-21 16:57
조회
393
이 한 권을 읽으며 TNGS(뉴런집단선택설)라는 단어를 읽고 또 읽어야 했는데 아직까지 잘 모르겠네요.
암튼 이 이론은 개개의 뉴런이 아니라 어떤 범주화에 의해 뉴런집단이 선택되고 다시 범주화 되는 과정을 설명하는데, 그 안에서 뉴런 간의 역동적 상호작용이 있다는군요.
에델만의 논의는 한층 복잡합니다만, 우리는 일단 이로부터 의식이란 끊임없는 운동 과정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의식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운동과정에서 발생하고 작동하는 어떤 것입니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나’ 또한 실체가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가 나라고 믿는 것, 그것은 의식의 운동에서 나오는 일종의 분비물 같은 것.(이런 표현을 어디서 읽은 게 분명한데, 기억이 안 나네요;)

의식이 사물이 아니라고 말하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겁니다. 그렇지, 의식은 그런 사물과는 다르지.
하지만 생각해보면 누구나 의식을 사물로 간주하며 살아가지요.
예컨대 기억을 ‘잃어버렸다’고 했을 때, 기억을 ‘되찾았다’고 했을 때, 추억을 ‘만들자’고 말할 때, 우리는 그것들이 어딘가에 저장되어 있어 복구될 수 있다고 여기지요.
그런데 에델만이 펼쳐 보이는 뇌 어디에도 기억의 저장소가 보이지 않습니다. 기억은 한 부위에 저장되는 것이 아니라, 신경 시스템의 복잡한 운동 과정 안에서 형성되고 작동되는 것이라네요.
가령 마르셀이 마들렌 한 입에 차 한 모금을 머금자마자 떠오른 과거. 이는 그의 뇌 어딘가에 고이 저장되어 있던 게 고스란히 재현된 것이 아니라, 신경 시스템이 지각된 감각작용들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새롭게 형성된 기억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 순간 마르셀은 과거 그대로를 보는 게 아니라(변형되는 신체가 있는 한 그건 불가능;), 지금 이곳에서 이 몸으로 겪을 수 있는 어떤 새로운 시공간을 체험하는 것… 이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요-_-
그러니까 기억은 ‘발생’됩니다. 의식도 발생되고, 나도 그와 더불어 발생됩니다.

그간 비슷한 이야기를 불교 공부를 하면서 내내 들어왔습니다.
세상 안 어떤 것도 실체라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것, 나의 의식 또한 그렇다는 것, 하지만 나의 의식을 실체화함으로써 우리는 번뇌를 겪는다는 것 등.
지난 수업에서는 이를 心所 개념을 가지고 이해해 보았습니다. 심소, 마음이 지향하는 바.
인간도 개나 고양이처럼 눈코입귀 등등의 감각 기관을 가지고 세계를 포착 및 인식합니다만, 여타의 종들과 달리 인식 작용에 뒤따라 심소를 지니게 됩니다.
눈코입이 지각하는 건 시시각각 변하지만 심소에 의해 그것들이 하나의 상으로 고착된다는 거죠.
사과를 한 입 물었는데 썩어 있으면 그냥 뱉어내면 되지만, 그에 대해 어떤 마음을 일으켜 재수 없게 썩은 사과를 주었구나 저 나쁜 놈이라 생각하고서 그 다음부터 내내 그 기억을 일으키는 일이 일상에 종종 있습니다.
불교에서 이는 사과를 준 자가 나쁘다거나 썩은 사과를 먹은 일이 나쁜 일이어서가 아니라 내가 6식에다 심소를 결합시킴으로써 대상과 나, 좋은 것과 나쁜 것, 나와 내 것 따위를 실체화한 것으로부터 나온 결과라고 봅니다.

내가 지각과 개념을 재범주화하는 방식, 그것이 바로 이 마음과 심소의 문제와 연결되는 듯합니다.
그러니 주의해야 합니다. 기억이 실체적이지 않다는 에델만의 말이 기억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듯, 마음과 심소를 이야기할 때 마음과 심소의 그 모든 결합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채운쌤 말씀에 의하면 마음을 없애는 게 아니라 특정 심소를 없애고자 하는 것이 수행이고, 또 심소 중에는 지혜도 있을 수 있답니다.
수업 중 읽은 짧은 글에서 사사키 시즈카가 말한 대로 “업의 추진력을 부여하는 좋지 못한 심소”, 즉 번뇌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노력을 하는 것이 중요하지, 마음이 일어나는 것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마음이 일어나는 상태와 그렇지 않은 상태를 또 다시 실체화하는 것에 다름 아니겠죠.

수업 중 흥미로웠던 이야기는, 비록 아주 짧은 언급이었습니다만 윤회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붓다는 지각 작용에 의해 마음이 끊임없이 흐르는 것을 지켜볼 수 있었던 자인고로, 그에게는 무의식과 의식의 구별이 달리 있을 수 없답니다.
무의식이란 사실상 의식 본연의 상태인바, 심소가 결합되기 전 찰나멸하는 의식을, 의식의 그 흐름을 볼 수 있었다는 겁니다.
붓다가 더 이상 윤회하지 않았다는 말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도 재미있을 것 같아요.
윤회란 결국 동일한 것의 반복, 하지만 심소와 결합해 고착되지 않는 한 의식에는 동일한 회로, 회귀할 장소, 붙박아둘 말뚝이 없습니다.
심소가 생겨 헛것을 실체화할 때 우리는 하루하루 시시때때를 윤회할 수밖에 없지만(이것은 다 그것이고, 이놈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런 놈이고…), 심소가 붙기 전의 상태로 흐를 수 있다면 그게 열반인지도.  …너무 비약인가요ㅋ

암튼 이런 붓다 이야기를 듣고 떠오르는 게 있어 잠깐 푸코의 <자기배려>를 들춰보니 역시나, 고대 그리스에서도 덕스러운 영혼은 달리 마음이 휘둘릴 만한 일이 없어 깊은 잠에 빠져 꿈을 꿀 때도 우리처럼 괴상하고 일그러진 꿈이 아니라 일상과 똑같은 꿈을 꾸었다고, 현재의 감정 상태가 드러나는 꿈(“에누프니아”)을 꾸지 않았다고 하는 언급들이 있네요.
“세네카는 ‘사람이 자면서 꾸는 꿈은 그가 보낸 낮만큼이나 소란스럽다’고 말하였다. 플루타르쿠스는 제논에 의거하여, 추잡한 행위를 하는 데서 쾌락을 느끼는 꿈을 더 이상 꾸지 않는다는 것은 진보의 표시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다소간 의식-무의식 문제를 억압의 문제로 다루는 게 아닌가 싶은 감이 있지만, 아무튼 성인이나 현자는 의식과 무의식 간의 장벽이나 간극이 없다는 건 동서양의 공통된 주장인 듯합니다.

음... 다음 주에는 다시 금강경으로 돌아갑니다. 금강경 16分까지 읽어 오시고요.
그 다음 시간에는 <인간> 4장까지 읽어 오셔야 한다는 점, 미리 알려드립니다.
간식은 간만에 돌아오신 은남 쌤께서 해주실 거고요. 다들 완수 쌤 후기 잘 읽으셨죠?
자, 그럼 모두들 다음 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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