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SF절차탁마 4월 11일 공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8-04-06 19:16
조회
123
이번 주에는 성민호 병장이 특별 게스트로 세미나에 참여했습니다. 그리고 토론 시간 내내 조금씩 익어가고(?) 있던 그는 너무나 중요한 질문을 터뜨리게 되는데, ‘푸코는 대체 왜 이 짓거리를 하고 있느냐’는 것이었죠. 역사를 쓰는데 왜 ‘언표’라는 개념이 필요했는지, 언표 개념이 역사를 어떻게 달리 보게끔 하는지 ……. 책을 읽지 않아 그 내용에 붙들리지 않을 수 있었던 민호가, 우리가(제가) 어느새 놓치고 있던 근본적인 질문을 다시 일깨워준 것 같습니다. (저는 대답하지 못했지만) 채운샘이 답변을 해주셨죠.

우선 역사에 언표라는 개념을 도입한다는 것은, 말해진 것을 하나의 ‘사건’으로 봄을 뜻합니다. 어떤 연속성이나 구조, 법칙 등에 완전히 종속되지 않는 하나의 사건. 즉 언표의 기술로서의 역사란, (‘필연성’에 종속되지도, ‘돌발적인 것’으로 환원되지도 않는) ‘사건’을 기술하는 일을 가리킵니다. 푸코는 이러한 역사 개념을 니체로부터 빌려왔다고 볼 수 있는데, 니체는 하나의 사건을 직선적인 시간성(연속성, 필연성, 전체) 안에서 그 중요성을 부여받는 역사의 한 요소로 보는 대신, 기존에 형성되어 있는 힘 관계 자체를 역전시킬 수 있는 힘을 지닌 것으로 보았습니다. 니체는 역사로부터 대문자 역사에 종속된 순간들이 아니라, 사건들의 비역사적인 운무를 보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건의 역사학’(?)은 근대적 역사학에 맞섭니다. 근대 역사학은 시원을 원인으로, 그리고 현재(혹은 현재의 투사로서의 미래)를 목적으로 설정합니다. 단군할아버지가 원인이 되고 현재의 번영이 달성된 목적의 지위를 부여받는 것이죠. 이는 신의 자리에 인간을 위치시키는 인간중심주의의 한 양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는 ‘시간의 연속성’과 ‘인간 인식의 초월성’을 전제하게 됩니다. 시원으로부터 현재까지를 연속적인 인과로 엮을 수 있어야 하고, 인간은 자신이 놓인 자리로부터 벗어나 그러한 역사의 운동을 조망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죠. 문제는 이러한 역사가 ‘오류’라는 데에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푸코가 서문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문제는 이러한 역사가 의식의 지고함의 도피처로 기능하며 주체의 절대성을 확립하고 재생산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푸코는 인간이 보편사를 기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의 현재성 속에서 본 것을 ‘보편’이라고 퉁 칠 수 있을지는 몰라도요. 우리는 과거의 기억을 복원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과거로부터 볼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과거로부터 사건이 어떻게 ‘발생’했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니체가 말하는 반시대적 운동, 즉 ‘시대’와 맞서는 게 아니라 그로부터 빠져나가며 형성된 체계들을 탈구시키고 구멍 내는 운동들의 발생을 탐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푸코의 작업도 이런 것이죠. 그는 ‘감옥이란 무엇인가’라고 묻지 않습니다. 다만 감옥을 둘러싼 ‘비역사적 운무’를 보여줄 뿐입니다.

사건의 ‘발생’을 분석한다는 것은 지금 여기에서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요? 푸코는 ‘현재의 역사가’를 자임했습니다. 그는 헛되이 과거의 모습들을 되찾으려 하는 대신에 현재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 속에서 과거를 봅니다. 그가 감옥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그의 ‘감옥정보그룹’ 활동과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과거에서 현재와의 단절점을 분석하는 것, 불연속을 드러나게 하는 것은 우리에게 ‘현재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제공합니다. 다만 이때의 비판이란 이데올로기에 맞서 또 다른 이데올로기를 수립하는 것과도, 도덕에 의존하는 것과도 무관합니다. 이러한 작업은 (과거와의 연속성에 의해 지지되고 있는) 우리의 현재적 지평 자체를 해체하는 과정을 함축한다는 점에서 가장 능동적인 비판의 가능성을 열어줍니다. 즉 이때의 비판이란 우리의 비판조차도 의존하고 있는 전제된 자명성들에 대한 비판입니다. 현재를 다르게 문제 삼고 우리 자신을 낯설게 보기. 이것이야말로 언표(=사건) 개념이 열어주는 역사의 유용성이며 유용한 역사(wirkliche Historie)가 아닐까요.

푸코에 따르면, 문서고에 대한 기술은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구분적인 특성들의 표를 만들게 하고 우리가 미래에 소유할 모습을 미리 소묘하도록 허락해 주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의 연속성을 빼앗기 때문에, 그것이 우리가 역사의 비약을 음모하기 위해서 스스로 바라보기를 좋아했던 이 시간적 동일성을 분산시켜 버리기 때문에, 그것이 초험적인 목적론들의 실타래를 잘라버리기 때문에, 그리고 인간학적 사유가 인간의 존재와 그의 주체성을 물어보는 바로 그곳에서, 그것은 타자를, 바깥을 파열시키기 때문”에 그 정당성을 얻습니다.



급마무리의 느낌이 없지 않지만(;) 다음 시간 공지하겠습니다.

1. ‘언표적 기능’ 챕터를 정리하시면서 ‘언표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2. 〈언표와 문서고〉 장의 3, 4, 5 챕터 요약하기

3. 간식은 호정샘과 봉선샘께서 맡아주셨습니다
전체 3

  • 2018-04-07 15:20
    우리의 연속성을 빼앗는 바로 그 사건. '언표'라는 개념과 함께 출현하는 이토록 느닷없는 불연속!

  • 2018-04-07 20:02
    크아~ 언표를 말해진 것이라고 해서 "그냥 말해졌구나~" 이렇게 생각했었는데, 허 참. ㅋㅋㅋㅋ 푸코를 현재의 역사가라고 여기저기서 얘기하고 있어서 이것도 "그렇구나~"라고만 생각했는데, 그걸 이해하는 것도 쉽지 않네요. @_@ 이런 매력덩어리!

  • 2018-04-09 09:24
    허허 알 것 같으면서도 여전히 모르겠는 언표.... ㅎ_ㅎ 우리의 비판마저 기대는 전제를 의심한다는게 어려우면서도 매력적이네욥 후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