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문톡톡

[곰&나 사이] 나카자와 신이치의 "극락론(極樂論)"[1]
작성자
규문
작성일
2021-05-31 18:24
조회
289
나카자와 신이치의 <티베트의 모차르트(チベットのモーツァルト)>에 수록된 [극락론] 번역문입니다. 매주 월요일 연재됩니다^^


극락론(極樂論) (1)


내가 「천국」을 쓴 이유는, 존재를 비껴나가는 어처구니없는 유머에 휘말려들었기 때문이다. (필립 솔레르스, 『천국(Paradis, 1981)』)


1. 에메랄드 도시


일부 이슬람 편년사 작가들은 자발사(Jabalsa), 후르칼야(hûrqalyâ)라 불리는 그 도시를 바그다드, 쿠파와 같은 실재 도시처럼 묘사하기도 하지만, 사실 그곳은 어떤 지도에도 없으며 이 세계에 속한 도시도 아니다. 후르칼야에는 권력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노동도 불행도 없다. 주민들은 야채와 과일을 먹으며, 남녀의 유별도 모른다. 대지는, 천사처럼 엷게 빛나는 길, 선명하고 발랄한 색의 투명하리만치 푸른 하늘, 우아한 나무로 덮여 있다. 게다가 숲은 금(金)잎사귀로 뒤덮여 있어 녹색으로 보이는데, 이 잎사귀는 스스로 빛나기 때문에 그림자가 지지 않는다. 도시의 구조도 훌륭하고 주위 경관도 좋은 후르칼야는 무척 정교한 상상의 힘으로 만들어진 완벽한 도시다.
후루칼야는 지상낙원과 도원경의 전승 중에서도 특별한 것은 아니다. 이슬람 신비주의자인 수피들이 그 도시를 ‘에메랄드 도시’라고 부를 때에야 비로소 미묘하고 근원적인 변화를 느낄 수 있다. 통상적 아랍 세계 우주론과 지리학에 따르면 여행객은 이 도시에 이르기 전에 세계의 가장자리인 동시에 중심이기도 한 우주산(宇宙山) 카프(Qaf)에 당도한다. 수피는 이러한 우주론적 표상체계 안에 자리잡은 유토피아 도시의 색조를 짙은 에메랄드 그린이라고 생각했으며, 그곳은 신비로운 비전(vision)을 얻을 수 있는 내적 체험의 장이라고 해석했다.
수피에게 에메랄드 그린은 깊은 명상 안에서 체험할 수 있는 궁극적 색채의 은유다. 모든 빛과 빛의 운동성이 아직 발생하지 않은 채 내장되어 있는 이 색으로부터 눈부시고 신적인 빛이 장난스럽게 춤추며 나온다. 에메랄드 그린은 모든 존재가 분절화 되기 직전에 조용히 호흡하는 순간을 의미한다. 수피는 전승되는 도시인 후르칼야를 ‘에메랄드 도시’라고 부르며 이 유토피아의 비전을 우주론적 혹은 신화적 표상체계로 도입했고, 그것을 의식의 다층영역을 관통하며 횡단하는 다이내믹한 내적 체험으로 형성하려 했다.

후르칼야는 신성(神聖)이 스스로 다양하게 운동하는 과정의 일부를 의미한다. 이는 ‘앎’이라는 것이 존재의 다층성을 깊이 직감하고 파악하는 비전을 가져야만 성립될 수 있다. 존재의 다층성이란, 절대적으로 인식 불가능한 ‘일자(一者)’에서 출발해, ‘일자’가 다양한 이미지로 드러나는 영역을 통과하여, 감각적 세계로 도달한다. 후루발야는 이 연속 과정의 일부다. ……에메랄드 도시는 창조적 상상력이 스스로의 상징성을 전개되는 ‘형이상학의 나라’인 것이다.*

*크리스티안 잠베(Christian Jambet, 1949~), 『동방의 논리 - 앙리 코르벵과 ‘형상의 과학’』, スイユ社, 1983년, 36쪽


수피가 궁금해 하던 에메랄드 도시는 결코 신화 속의 비현실적 세계가 아니다. 다시 말해 결코 상상적(imaginaire)이지 않다. 그것은 의식의 다층적 전개 안에서 생성되는 순수한 비전의 일종으로, 현실 세계와 다름없는, 아니, 그 이상으로 현실적인 세계다(현실의 감각적 세계는 이 전개 과정의 표층부에서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들은 후르칼야에 대한 신화적 전승을 에메랄드 그린으로 물들이고 ‘형이상학’으로 만들었다. 창조적 상상력의 영역에서 생겨나는 미세하면서도 선명한 빛·형상·운동성을 앎의 대상으로 바꾸고 개념화한 것이다. 이로써 그들은 동결된 표상체계로부터 유토피아의 비전을 구출하려 했다.
지상낙원이나 천국에 대한 비전은 ‘다른 세계’, ‘저쪽 세계’, ‘사후 세계’에 대한 표상이 아니다. 오히려 신체와 의식의 다층영역을 가로지르는 횡단성으로 봐야 한다. 그때 비로소 지상낙원과 천국과 극락정토에 대한 묘사들은 수사적 진부함에서 해방되어 놀라우리만치 신선한 비전으로 되살아난다. 천국은 우리의 존재양식이다.


2. 에크리튀르(écriture)의 횡단성


이는 단테가 『신곡』을 쓴 목적과도 깊이 연관된다.
단테는 “인간 세상 여로에서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올바른 길을 잃고 어둔 숲에서 헤매게 되었다.”* 마침내 이 숲을 탈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절망하던 그 앞에 베르길리우스의 영(靈)이 나타난다. 그는 천국의 베아트리체의 기도로 단테를 구하기 위해 나타나서, 올바른 길로 돌아가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지옥과 연옥을 안내하며 길고 오랜 여행길을 함께 하겠다고 한다. 연옥 다음부터 단테는 베아트리체의 영의 인도로 천국의 지복을 맛보게 될 것이다. 단테는 베르길리우스를 길잡이로 삼아 지옥-연옥-천국을 횡단하는, 다시없을 여행에 나선다.
『신곡』이라는 에크리튀르를 통해 단테는 지옥-연옥-천국 세 가지의 다른 차원을 통과한다. 필립 솔레르스는 「단테와 에크리튀르의 횡단성」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이 세 가지 차원을 통과하는 과정은 동시에 언어활동의 세 가지 수준을 차례대로 통과하는 과정에 대응한다. 단테는 다층적 존재와 의식의 다양한 차원을 횡단하는 운동을 에크리튀르의 차이로 보았다. 그럼으로써 지옥-연옥-천국을 우주론적 표상체계로도 ‘다른 세계’ 관념으로도 환원하지도 않으면서, 물질주의적 신비학(랭보)의 문제로 되돌린다.
단테의 에크리튀르는 지옥 아홉 층을 가로지르는 여행을 그리며, 끈질길 정도로 차이는 만들지 않으면서 희망 없는 반복만 되풀이되는 것을 보여준다. 지옥은 반드시 하나의 행위에 대한 보복이 있으며, 언어는 혼란스럽고, 외치는 소리로 충만하다(“한숨과 울음과 고통의 비명들이 별 하나 없는 어두운 하늘에 울려 퍼졌다. 그 소리를 처음 들은 나는 울음을 터뜨렸다. / 알 수 없는 수많은 언어들, 끔찍한 얘기들, 고통의 소리들, 분노의 억양들, 크고 작은 목소리들, 그리고 손바닥 치는 소리들이 / 마구 엉켜 아수라장을 만들었고 회오리바람에 휩쓸리는 모래알처럼 그 영원히 깜깜한 하늘에 떠돌고 있었다.” 『지옥 3곡』).** 자유로운 생성변화가 아니라 행방이 정해지지 않은 슬픔의 변형(metamorphose)이 지배하며(“영혼은 숲에 떨어지는데, 떨어질 곳은 택할 수 없지요. 다만 운명이 몰아가는 대로 잡초 씨앗처럼 싹을 틔운다오” 『지옥 13곡』)***, 증오와 절망으로 소통(communication)은 저해되어, 만나기만 하면 서로 싸운다. 괴로운 동일성의 환영에 묶인 지옥의 주민들은 꼼짝도 할 수 없다.

*단테 알레기리에(Dante Alighieri, 1265~1321), 『신곡』
**단테 알레기리에(Dante Alighieri, 1265~1321), 『신곡-지옥편』 (박상진 역,『신곡-지옥편』, 민음사 27쪽)
***단테 알레기리에(Dante Alighieri, 1265~1321), 『신곡-지옥편』 (박상진 역, 민음사 131쪽)


지옥 주민은 외부성의 기호로 철저히 뭉개진다. 거기서 발생하는 파롤(parole)은 지옥의 형벌과 마찬가지로 다양하고 가지각색이지만 모든 것이 통째로 고정되어 있어 점점 실어증에 가까워진다. 단테에게 지상은 책이 흩어지는 장소인데, 지하의 지옥은 그 흩어진 책의 파편을 그러모은 곳이 아니고 부분이 전체로 오인되어 단단히 뭉쳐진 장소다. 지옥에서 시니피앙(signifiant)은 속절없이 반복되는 무언(無言) 속으로 떨어진다. 반대로 천국은 속박이 아니라 관계성의 장소다(천국에서는 신·사랑·의미가 별과 기호를 통해 혁명의 책을 짓는다). 따라서 지옥의 근저에는 신체적 물질성의 감옥이 있고, 여기서는 점점 고정되는 불모의 속박상태가 되어간다. 여기서 무력한 파롤은 그 거대함에 압도된다. 지옥은 공간과 파롤의 영도(零度)다.*

*필립 솔레르스, 『로직(Logiques)』


지옥의 괴물 루시퍼는 솔레르스가 말한 지옥의 응결성과 속박을 보다 잘 보여준다. 신에게 반역하여 타천사가 된 루시퍼는 괴물이 되었는데, 그 모습은 과거 가장 아름다운 천사였던 ‘빛을 지고 있는 자’의 모습과 대비되어 지옥의 시니피앙의 성질을 여실히 보여준다.
천국에서는 많은 천사들이 빛을 두른 채 가벼이 오간다. 그런 천사들의 모습은 다종다양하다고 표현할 수 있다. 반면 지옥으로 떨어진 루시퍼의 모습은 다수성의 응결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아, 그놈 머리에 달린 세 개의 얼굴을 보았을 때 내가 얼마나 큰 놀라움에 사로잡혔던가! 앞쪽의 얼굴은 진홍색이었다. / 다른 두 얼굴은 그 얼굴에 맞붙어서 좌우 어깨의 한가운데로 솟아 머리털이 하나로 뭉쳐져 있었다. / …… / 그가 여섯 개의 눈에서 흘린 눈물은 세 개의 턱 위로 흘러 피 맺힌 침과 범벅이 되어 고드름으로 맺혔다.”『지옥 34곡』)* 천국의 아름다운 천사였던 시절에 무수한 천사들과 가벼이 교통했을 루시퍼는 지옥의 괴물이 되어 다수의 물체와 무매개적으로 합체되었다. 이로써 교통은 막혔다. 루시퍼는 눈물과 피를 떨어뜨리고 무언의 고독을 견디며 죄인의 몸을 산채로 씹어야 한다. 천사가 무한으로 향하며 자기 차이화를 한다면, 지옥의 괴물은 전체성으로 응결된다. 단테가 이 시니피앙의 늪지를 가로지를 수 있었던 이유는 오로지 길잡이 베르길리우스가 가진 파롤의 힘 덕분이다(이것이 천국의 베아트리체가 지옥을 가로지르는 길잡이로 이 언어의 대가(meister)를 선택한 이유다).
지옥을 탈출한 단테는 연옥의 산을 통과한다. 이 연옥에서는 드디어 목소리와 음악이 나타나 끊임없이 시각과 청각을 깨운다. 지옥의 신음과 울부짖음은 파롤로, 노래로 변해간다. 지옥에서는 단테가 놀라고 바들바들 떨어서 베르길리우스가 설명하고 달래며 공포를 가라앉혀야 했다. 그런데 연옥에서는 단테가 스승에게 사랑과 자유의지에 대해 끊임없이 물으며 자발적이고 가벼운 언어를 구사한다(“선생님! 당신의 빛이 저의 시야를 밝게 해 주어서 하시는 말씀의 뜻을 이제 명확히 알겠습니다.” 『연옥 18곡』)**

*『신곡-지옥편』 (박상진 역,『신곡-지옥편』, 민음사 349쪽)
**『신곡-연옥편』 (박상진 역,『신곡-연옥편』, 민음사 160쪽)


슬피 울던 것이 노래로 변하는 것처럼, 지옥의 응결적인 시니피앙은 가벼운 자발성을 띠고 연옥에 걸맞게 변해가고 치우치지 않는 상상기능을 갖추게 되어 침묵과 새로운 언어활동이 나타나는 불연속점으로 근접해간다. 이렇게 그는 작은 도약을 반복하면서 ‘인간의 근원’ 즉 죄에서 도망친 언어활동의 근원을 향해 걸어가는 것이다.*

*필립 솔레르스, 『로직(Logiques)』


지옥의 시니피앙은 신체의 물질성 안에 견고하게 응결되어, 자유로운 차이를 생성하지 못하는 반복 안으로 가라앉는다. 반면 단테라는 시니피앙은 연옥의 불을 빠져나가 온몸을 답답하게 죄여오는 끈적한 늪을 탈출하여 몸을 가벼이 하고, 동일성의 상상적(imaginaire) 환영에 구속당하는 차이 없는 반복에서부터 말의 다의성을 낳는 상징적(symbolic)인 것의 차이화로 나아간다. 연옥의 불을 통과한 자에게는 ‘인간의 근원’이 주어진다. 어둔 숲을 헤맨 이래 처음으로 『신곡』에 ‘단테’라는 이름이 적힌다. 횡단 여행을 하는 자(그러한 단테를 주체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가, 여기 상징계(symbolic)에서 동일성을 획득한다. 다만 이후 ‘단테’라는 이름은 『신곡』안에서 두 번 다시 등장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길 잃은 단테가 궁극적으로 구원받으려면 ‘인간의 근원’을 획득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것만으로는 고작 재생에 불과하다. 단테는 ‘신생(vita nuova)’을 위해 횡단 여행을 계속해야 한다. 천국을 향해서.
베아트리체의 영에게 인도되어 천국을 여행하는 단테를 뒤덮는 것은 믿을 수 없을 만큼 화려한 시니피앙의 홍수다. 모든 장소(ubi), 일체의 시간(quando)에서 해방된 천계에서는 순간순간 반짝거리는 빛과 형태가 나타나 갑자기 선회하여 거대한 소용돌이를 만들어 상승하고 반짝반짝 흩뿌려진다. 여기에 지옥을 지배하던 희망 없는 동일성의 반복은 존재하지 않는다. 끊임없이 미세한 차이가 일어나고, 차이는 다시 스스로의 차이를 무한히 산출한다. 에크리튀르가 에크리튀르를 낳는 것이다. 단테는 자신이 체험하는 천국의 너무나 빠르고 너무나 경쾌한 운동 상태를 언어가 추적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그 점 주위를 불의 테두리가 돌았다. 그것은 별을 물들이는 후광을 이루는 안개가 가장 두꺼울 때 그 후광이 별에서 / 가장 가까이 있는 만큼 그 점에 가까이 있었다. 그것은 아주 빨리 돌았기에 세상을 가장 신속하게 두르는 운행을 능가할 정도였다. / ……거기에 가장 가까운 테두리를 보세요. 그렇게 빠르게 도는 이유는 그렇게 움직이도록 만드는 하느님의 불타는 사랑 때문이지요.” 『천국 28곡』)*

*『신곡-천국편』 (박상진 역,『신곡-천국편』, 민음사 243~244쪽)


이따금 단테라는 에크리튀르의 주체조차 보이지 않는다. 단테-베아트리체의 결합체는 천사같은 가벼움을 띠고 이 빛의 홍수 안을 비상하여 마치 천사처럼, 존재와 비존재의 ‘사이’로 미끄러지는 것이다. 천사는 여기서 빛의 바다라고 하는 공무(空無)의 연속체에서 사뿐사뿐 모습을 보이는 빛의 입자 같은 것으로, 이 빛의 입자가 존재와 비존재의 ‘사이’에서 날아다니고, 노래하고, 음악을 연주하고, 웃고 떠든다(“두 번째 품계는 영원한 봄에 만개하는 꽃과 같은데, 염소자리의 추운 밤도 해칠 수 없지요. / 이 품계는 삼위일체의 세 위격들을 통하여 울리는 세 가닥 선율로 영원히 ‘호산나!’를 부르고 있어요. / …… 이어 끝에서 두 번째의 춤추는 무리들에는 프린치파티와 아르칸젤리가 돌고 있으며, 마지막에는 온통 안젤리의 환희로 채워져 있어요.” 『천국 28곡』)** 솔레르스는 존재와 비존재의 ‘사이’에서 노니는 천사와 같은 광경을 ‘웃음의 에크리튀르’라고 부르는데, 왜냐하면 빛의 반짝임, 영묘한 조화를 기리는 음악, 어지러운 원무 등과 함께 이 가벼운 웃음이야말로 천국과 극락정토의 주선율이기 때문이다. 천국은 끊임없는 생성변화와 자유로운 차이의 ‘공(空)-간(間)’인 것이다(천국의 생성변화의 가벼움은 지옥의 응결공간을 지배하는 그 꼼짝 못하는 변형(metamorphose)과 첨예하게 대립한다).


*모든 사물에게는 그 나름대로의 독자적 본성이 없다는 것을 뜻하는 불교용어 - 역자

**『신곡-천국편』 (박상진 역,『신곡-천국편』, 민음사 248쪽)


하지만 단테가 지고천(至高天)의 장미 만다라에 가까워지자 그의 언어활동은 차차 정숙해진다. 이것은 그 경광이 무척 아름답고, 영묘하고, 미세하여 천국의 ‘웃음의 에크리튀르’마저 따라갈 수 없게 되었음을 보여준다(“내가 본 아름다움은 우리의 한계를 넘어설 뿐 아니라, 내 분명 믿노니, 그것을 만드신 조물주만이 온전히 즐기시리라. / 여기서 나는 패배를 인정한다. 희극이든 비극이든 어떠한 시인도 지금 나만큼이나 자기가 다루는 주제에 압도되지는 않을 것이다. / 햇빛이 가장 약한 눈에 그러하듯이 그녀의 사랑스러운 미소를 생각만 해도 나는 정신을 잃고 분간을 할 수 없게 된다. 『천국 30곡』)* 여기서 에크리튀르는 단숨에 무한으로 빨려 들어간다. 지고천의 차이화 상태는 마침내 인간 의식의 차이화 능력을 넘어가 버리는 것이다.
우리가 솔레르스의 「단테와 에크리튀르의 횡단성」이라고 하는 글을 길잡이로 삼아(그다지 충실했다 말할 수는 없지만) 온 것처럼, 단테는 『신곡』을 쓰면서 관념의 지옥, 관념의 천국이라는 것을 부정하고 신체가 관념에 맞서서 결국에는 무한영역으로 녹아드는 횡단적이고 ‘물질주의적’ 과정으로 돌아가려 했던 것이다. 『신곡』 이래로 천국은 더 이상 표상도 관념도 아닌, 우리의 존재양식 그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 되었다. 이를 에크리튀르의 횡단성이 가능하게 했다. 천국은 종교적 비전의 문제인 동시에, 의미의 형성성(形成性)을 둘러싼 문제와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신곡-천국편』 (박상진 역,『신곡-천국편』, 민음사 259쪽)


번역/혜원

전체 2

  • 2021-06-02 15:08
    천국이 '관계성의 장소'이고 지옥이 '물질성의 감옥'이라니... 넘나 적절한 비유인 듯하네요. 중간에 <차이와 반복>을 떠올리게 하는 문장들도 보이고.. 오랜만에 올라온 번역 재밌게 읽었어요, 샘~ 다음 편도 기대되네요!

  • 2021-06-03 18:56
    지옥-연옥- 천국이 우리의 존재 양식이고, '글쓰기' 는 의식의 다양한 차원을 횡단하는 운동 이다, 존재와 사유가 동시에 다층적으로 횡단하는 것이 <신곡>이었다니요.
    신이치가 읽어내는 신곡에 감탄하며 번역문을 읽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