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콜콜

[비정규 알바생“훈이의 일기”] 10화 3부

작성자
김훈
작성일
2020-11-01 23:25
조회
290
규문의 최고령 인턴 4n세 훈샘이 내년 공부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지방 출장을 떠났습니다.
훈샘의 소소한 일상 이야기에서부터 비정규직 노동자로서의 삶, 훈 샘이 읽고 계신 책 이야기까지 다양한 썰들을 가볍게~ 풀어볼 예정입니다. 
무려 주 2회! 매주 수, 일 저녁 6시에 연재될 예정이니 애독을 부탁드립니다~




[비정규 알바생“훈이의 일기”] 10화 3부

_측량알바를 마치며 3부

정식 호텔용어로는 벨맨이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벨보이'라고 불린다. 5성급 특급 호텔은 도어맨이 있어 손님들의 차문이나 현관문을 열어준다. 하지만 내가 근무한 4성급 일급호텔에서는 벨보이가 도어맨의 일까지 다 도맡아 해야 했다. 편의상 일했던 호텔 이름은 '코스모'라고 가명으로 하겠다. 원래 실명이 세 글자 식물군의 이름이었던 것을 감안해 '코스모스'로 하되 줄여서 '코스모'로 정했다. 코스모 호텔는 365일 쉬는 날 없이 24시간 운영된다. 그 안에 근무하는 사람들과 손님들만이 수시로 바뀌거나 잠시 머무를 뿐이다. 호텔이라는 공간은 한결같이 부동(不動) 해야 하는 곳이었다. 그 한결같은 친절한 미소와 유니폼, 청결하게 유지돼 있는 객실들과 복도의 붉은 카페트들, 정갈히 모서리가 접혀있는 침대보와 항상 제자리에 배치돼야하는 용품들은 '여기는 일급 호텔입니다.'라는 것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딱 여기까지이다. 부동하는 듯 보이는 호텔의 첫인상은 오해하기 쉬운 사람에 첫인상과 닮아있다. 말끔하게 보이는 사람일수록 속이 더 검을 수 있듯이 호텔의 그 이면에는 돈으로 탄탄히 얽혀있었다.

벨보이와 지하 보일러실 직원은 24시간 막 교대로 근무한다. 프론트 여직원은 8시간씩 3교대 근무를 하고 부장과 지배인, 그 밖에 사무실 직원들은 아침에 9시에 출근해 오후 7시 쯤 퇴근한다. 그러니 근무시간으로 제일 괴로운 건 벨보이와 보일러실 직원이었다. 하지만 보일러실 직원은 새벽에 거의 부를 일이 없기 때문에 지하 숙소에서 편하면 아침까지 잘 수 있었다. 실제 24시간을 거의 깨어있으면서 일을 하는 건 벨보이 뿐이었다.

벨보이는 매달 80만 원의 급여를 받았다. 당시 평균 회사원의 월급이 연봉 2천만 원 정도였던 걸 감안하면 턱없이 적은 금액이었다. 하지만 손님을 다루는 기술이 능숙한 벨보이일 수록 회사원 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었다. 팁을 잘 주는 손님은 예를 들어 담배심부름하면 만원, 옷을 세탁소에서 찾아주면 만원, 짐을 들어다주면 몇 만원까지 줬다. 더욱이 호텔 지하는 나이트클럽이었기 때문에 밤이 되면 객실에서 콘돔을 찾았는데 무료로 주게 돼있었지만 만만히 보이거나 처음 보는 손님인 경우는 오천이나 만원을 받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20년 전에는 감시카메라가 아직 생소해서 호텔의 보안이 허술했었다. 그 점을 이용해 프론트에서는 저녁 대실로 나간 방을(메이드 아줌마가 저녁에는 없었기 때문에 대실로 이미 쓴 방은 다른 손님을 받을 수가 없었다) 새 방으로 정리해 되팔아서 벨보이, 프론트 여직원, 부장, 지배인까지 그 금액을 나눴다. 물론 새 방으로 말끔하게 정리하는 일은 벨보이 몫이었다. 프론트에서 지시가 떨어지면 벨보이는 그 객실로 들어가 이번 주 그 층을 맡은 메이드 아줌마의 침대보와 화장지 끝마무리, 물건을 정돈해 놓는 등의 습관을 기억해뒀다가, 새 방처럼 정리해 놔야 됐다. 만약 매주 로테이션으로 층을 바꿔 청소를 하는 메이드 아주머니를 착각해 실수를 하면, 눈치가 빠른 메이드들의 의심은 쉽게 소문이 되어 사장 귀에 까지 갈 것이다. 그러면 지배인까지 이어지는 줄줄이 목은 고사하고 연루된 모두가 손목에 수갑 찰 일이었다. 여하튼 그렇게 하루 8방정도 정리하면 이십만 원의 정도의 현금을 챙겨서 퇴근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한 달 수입을 따지면 벨보이의 수입은 삼백만원이 넘었다. 집에 필요한 돈을 드리고도 현금이 넉넉했다.

24시간 근무를 마치면 오전 10시에 퇴근했다. 그리고 집에 가면 5명의 식구들이 살고 있었다. 부모님은 가게에 딸린 방에 생활하셨기 때문에 집에 있는 5명의 식구는 친동생, 친동생이 데려온 두 명의 친구 그리고 어쩌다 놀러 와서 눌러앉게 된 2명까지 해서 총 5명이었다. 모두 가정사가 복잡하거나 형편이 어려운 동생들이었다. 친동생 정태의 오지랖으로 인해 흘러들어온 이들은 퇴근해서 오는 낮이면 병아리 새끼들 마냥 '삐약빠약' 신나서 나를 기다렸다. 빵 3개의 천 원짜리 제과점, 한 줄에 50개 들어간 영업용 소세지 등의 가성비 좋은 하루치 식량들과 함께 볼 비디오, 만화책을 대여하고 저녁에는 오천 원짜리 노래방에 갔다. 그리고 가끔 놀러오는 초등학교 동창인 내 친구가 있었는데, 그 때 그 동창을 따라온 호균이와 첫 안면을 텄었다. 그 이후로 호균이는 자주 들러서 동생들에게 피자, 통닭을 사줬다. 이렇게 사는 우리의 모습이 호균의 눈에는 신기하고 재미있었던 모양이었다.

호균이의 첫 인상을 정말 잊을 수가 없다. 밤무대 의상처럼 반짝거리는 푸른색 바지에 샛노랗게 염색한 머리 그리고 선글라스처럼 붉은 빛이 도는 안경, 차는 쏘나타2를 잔뜩 튜닝을 해놔서 본래의 모습을 잃은 채 사방으로 번쩍번쩍이는 테이프를 두르고 있었다. 차 안도 밤이 되면 나이트 조명처럼 휘황찬란했고 뒷좌석 우퍼스피커 소리에 맞춰 차체가 들썩였다. 엔진 소리는 또 얼마나 크던지. '부릉부릉릉' 요란해서 우리 집 산동네 좁은 골목을 몰고 올 때면 동네에 다 민망했다. 그랬던 호균이였는데 내가 여차여차한 이유로 호텔을 관두고 일용직 전전하고 있을 때 재미로 한두 번 쫓아오더니 어느 쯤엔가 계속 같이 일을 하게 됐다.

"내가 처음 남 밑에서 일을 했었던 게 너와 같이 살 때였어."

얼마전 술자리에 호균이가 말했다.

'아. 몰랐었다.' 착실하게 나와 일용직 일을 나갔던 호균이는 그 모든 일이 처음이었던 것이었다. 재작년에 호균이는 당뇨를 고생하시던 아버지의 임종을 곁에서 지켜봐야했다. '그 요란했던 차를 튜닝하는데 몇 천 만원 카드 빛을 졌다'는 말을 언젠가 들었던 기억이 났다. 그 후로 부모와 연락을 끊고 우리 집에서 산 게 4~5년 이었다. 아마도 개인택시를 하시던 아버지가 그 카드빚을 갚으셨을 것이다. 그가 나약해지고 병든 아버지의 곁에서 어떤 심정일지 조금은 알 수 있었다. 그와 많은 세월을 같이 했지만 우리 집에 같이 사는 것이 불편할까봐. 한 번도 그의 가정사에 대해 묻지 않았다. 호균이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복잡한 사연이 있었을 텐데 '왜 나는 한 번도 그에게 묻지 않았던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가 자신의 아버지 장례식장에서 잠시 바깥바람을 쐬자며 커피를 사들고 나갔을 때  '더는 헛되게 살지 않겠다'라며 결의 찬 듯이 내게 말했지만, 복받치는 울음이 참느라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현장에서 그토록 회사의 일에 몰두했던 이유가...

몇 년 전부터 그도 그의 아버지처럼 당뇨로 인해 고생하고 있었다. 그래서 매달 정기적으로 큰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고 약을 타다 먹어야 했다. 이번 현장에서 네가 식도염이니 족저근막염으로 고생하니 뚝하면 '자기보다 오래 살 거라고 걱정 말라'는 것이다. 나는 그 말이 '나는 당뇨라 너보다 오래 못 산다'라고 들려서 몹시 씁쓸했다. 이번 측량알바 중에 호균이는 거의 매일 어머니께 전화 드리고 출장 간 지역에 좋다는 특산물은 빠짐없이 집으로 보냈다. 그런 호균이를 보면서 나는 '늦은 막이 효도 한다 '라고 농담했다.

측량알바가 마치기 바로 전날 친동생 정태는 '회사를 그만 두겠다'라고 사장에게 연락했다. 그의 떨리는 다리를 보며 차마 '일단 안정을 취하고 천천히 생각하자.'라고 말할 수 없었다. 결혼하고 아이가 생기자 6년이나 꿋꿋이 다니던 회사였다. 전날 친구네 식구들과 자신의 가족이 같이 제주도에 놀러왔지만, 정태는 일을 마치고 오후에 잠깐 보고 저녁에 돌아올 계획이었다. 가족과 하루라도 같이 보낼 수 없을 정도로 작업기한이 빠듯했다. 하지만 정태는 가족을 보고 혼자 차를 몰고 오는 중에 깜박 졸아, 도로 중앙선을 넘어서 반대편 가드레일에 차를 박았다. 그때 다행히 다치지는 않았지만 급하게 차량을 수습하고 숙소에서 돌아와서는 호균이에게 심하게 질책을 당했다. 모두에게 죄송하다고 하고 자기 방으로 돌아갔지만 밤새 잠을 못 이뤘을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 다른 차를 렌트하러 가야했지만 정태의 눈은 초점을 잃은 공항상태였다. 바로 어제 사고 수습하느라 긴장됐던 정신이 얼마 못자고 의식을 차렸을 땐, 죽을 뻔했던 사고 후유증이 뒤늦게 밀려왔을 것이다.

"형 다리가 떨려요. 머리가 너무 아파서 서울 올라가 큰 병원에서 진찰 받아야 될 것 같아요. 사장한테는 그만두겠다고 말했어요. 늦게까지 매일 일하니까, 잠이 부족해서 사고 날 뻔했던 것이 전에도 두어 번 있어서요. 더는 하면 죽겠다 싶어요."

동생의 목소리가 떨렸다.  정태와 호균이가 회사일로 자주 다투기는 했지만 그렇게 사고가 날 만큼 업무량이 많고 힘든지는 몰랐다. 아니 딴 곳보다 급여가 높으니 그만큼 힘든 건 나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야. 잘 때려 쳤어. 사람이 일단 살고 봐야지. 뭐 다른 일 없겠냐. 일단 몸부터 추스르고 병원에 가서 진찰받고..."

'까짓 거 별거 아니다'라는 투로 정태를 위로해줬지만 두통이 심하다는 정태의 말에 나는 '움찔'하고 가슴이 찔렸다. 평소 정태는 어려서부터 자주 두통이 있었지만 병원에서도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 했다. 나이가 들수록 다혈질로 변하고 얼굴에 여드름이 종기처럼 번져서 성인이 돼서도 그 흉터는 고스란히 남았다. 아버지와도 언쟁을 벌이는 일이 잦았고 화를 참지 못해 남과 자주 싸웠다. 호균이는 '네 동생 성질 더러워진 것 다 네 탓이야'라고 간혹 이야기했다. '그렇다. 맞는 이야기였다.' 정태와 나는 6살 터울이었고 중학생 때까지 별일 아닌 일로 어린 정태를 팼었다. 한번은 그냥 때린 정도가 아닌 발로 밟고 심하게 욕해서 정태가 서럽게 울렸던 기억이 있었다.

(정태가 태어나기 전에 아버지는 취중에 집에 들와서는 어머니를 팼는 일이 잦았다. 그리고는 우는 어머니 곁에 있던 나를 불러서는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라고 물었다. 그 때는 내가 뭐라고 답했는지는 기억나진 않지만 어머니가 '네 아빠가 누가 좋냐고 물으면 무조건 아빠가 좋다고 이야기해.'라고 시켰던 기억이 있다.)

동생이 나보다 몸집이 커져서 대들기 시작하기부터는 나는 더 이상 동생을 힘으로 제압할 수 없었다. 아버지처럼 나도 자신보다 약한 사람을 힘으로 제압하고 있었다. 내 어릴 적 제일 닮고 싶지 않았던 사람이 아버지였지만 그처럼 닮아가고 있었다. 내가 어린 정태를 팼던 탓에 그의 성격이 거칠게 바뀌게 됐다. 물론 전부 내탓이라고 할 수 없겠지만 내가 주요한 원인되었던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가 '머리가 아프다'라고 하면 내 자신의 가슴이 '움찔'하게 하는 이유가 여기가 있었다.

이번 현장에서 난 식도염, 족저근막염, 접촉성피부염으로 고생했다. 태어나 처음 겪는 질병들이었지만 수많은 일용직을 겪으면서 이렇게 아파본 적도 처음이었다. 크게 고통스러운 것은 아니었지만 이런 작은 질병들이 생활을 질을 떨어뜨렸다. '이제 나이를 먹어 아픈 건가.', '뭐 큰 병이라도 있는 거 아니야.', '왜 나만 이렇게 아픈 거지.'라는 등의 부정적인 생각들이 떠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돌아와 생각해보니 나의 지난 질병들은 자신의 성찰에 큰 공부가 되었다. 내가 '족저근막염'으로 절룩거리며 걸었을 때는 '동현이가 몇 년 전 발목 붓는 질병으로 이렇게 불편했겠구나.'하고 헤아려볼 수 있었고 '식도염', '접촉피부염'과 같이 오랜 시간 치료를 요하는 것은 정태의 달고 사는 두통이나 호균이의 당뇨로 인한 고통에 대해 이해할 수 있었다. 나 자신의 질병으로부터 인간적인 나약함이 느꼈을 때 나는 팀원들이 더 고통스런 질병으로 고통 받고 있거나 고통 받았다는 것을 인지하고 연민을 느꼈다. 그것은 단순히 육체적인 질병 때문만은 아니었다.

'정신적으로 우리는 또 얼마나 나약한가.'

그렇게 4년을 넘게 한방에서 허물없이 지냈던 호균이와 정태는 이제는 같은 회사에서 서로 헐뜯고 미워하는 사이가 되어있었다. 조금만 누가 밀면 허물어질 것만 같은 이 둘은 힘들게 버티고 있노라고 나에게 말했었다. 죽을 뻔한 차 사고로 잠시 허물어져 버렸던 정태의 초점 잃은 눈빛과 떨고 있던 다리를 나는 평생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동현이도 아픈 몸으로 벌었던 수 천 만원의 돈을 비트코인이 한창 유행일 때 넣었다가 전부 잃고 말았다. 아직도 그는 일확천금의 꿈을 버리지 않았지만 그를 탓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우리의 대다수는 결국 방편만 다를 뿐 필요 이상의 돈을 벌기 위해서 집을 사고 주식을 하고 좋은 직장을 원하지 않는가.

그리고 동현이와 광수씨 그 밖의 팀원들에게 나는 감사한다. 우리가 비록 취약한 알바생으로 만났지만 내가 쓴 일기를 재미있게 읽어주고 서로의 인간적인 면을 공유할 수 있었던 순간들은 나에게 소중한 글쓰기 체험이었다. 또한 규문의 식구들의 댓글과 응원이 없었으면 나는 글쓰기에 회의를 느껴 여태껏 순조롭게 써내지 못 했을 것이다. 일기를 쓰는 순간 나는 이들 모두와 연결돼 있음을 분명 느꼈다. 좋은 일이다
전체 9

  • 2020-11-02 09:37
    경험이 그대로 지혜로 변환되는 것은 아니지만, 확실히 경험은 우리의 중요한 스승이라는 생각이, 훈의 일기를 보는 내내 떠나지 않았습니다.
    "시간 많을 거 아냐? 그럼 놀지 말고 써봐!"라는 저의 말을 덥석 받아준 사십세 후니에게 박수를!^^ 그리고 초반 열화와 같은 댓글로 반응하시다가 (아마도) 매번 댓글을 달기가 쫌 그러셔서 참으셨을 애독자분들께 살짝 알립니다. 후니의 본격적인 인생이야기는 앞으로도 쭈~~~욱 이어집니다.

  • 2020-11-03 08:20
    댓글 달기 쫌 그래서 허벅지 꼬집어가며 참고있는 애독자입니다. 이렇게 끝나나 싶어 아쉬웠는데 뭔가 막 새로운 게 또 나올 것 같으니 목 빼고 기다려보겠습니다.
    그동안 샘 글 읽으며 즐거웠어요.

  • 2020-11-03 14:28
    4n세 김훈샘, 그동안 용기 내어 올려주신 글 잘 읽었습니다! ^^ '모두와 연결돼 있음은 좋은 일이다' 하는 마지막 구절이 마음에 남습니다. 앞으로의 이야기도 기대하고 응원하겠습니다!!!

  • 2020-11-03 22:51
    한 달의 알바 기간 동안 책을 많이 읽으려고 했지만 그걸로는 뭔가 부족하다 여기던 참에, 채운샘이 알바 일기를 써보라는 하신 것이 저는 '아. 이거다'라는 '감'이 왔었습니다. 그래도 일주일에 두번이 무리일 듯 싶었지만 왠지 저도 모르는 '의욕'이, 할 수 있을 거 같았지만 몇 번의 고비가 있었습니다. ㅎ
    다행히 그 '감' 덕분이지. 덥석 1회를 쓰기는 했지만 10회 3부까지의 긴 여정 동안 규문의 애독자분이 없었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겁니다. 누군가 기다리고 있다는 연결된 느낌이 약속된 시간까지 글쓰기에 집중할 수 있게 해줬습니다. 비록 가능해 보이지 않았던 환경 중에도 어떻게든 그 시간을 지키기 위한 글쓰기의 방편이 생기더군요. 이제는 걸으면서도 핸드폰으로 글쓰는 것이 가능해졌습니다.ㅎ
    저의 알바 일기를 즐겁게 읽어주시고 응원해 주시는 규문 식구들에게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앞으로 관찰일기도 부족한 글쓰기에 훈련으로 생각하고 묵묵히 매 회를 써나가겠습니다^^

    • 2020-11-05 08:20
      40대는 '감'이죠!ㅎㅎ 응원합니다. 쌤^^♡

  • 2020-11-03 23:07
    저도 그동안 넘 재밌게 잘 읽었어요. 앞으로의 인생이야기도 기대할게요. 일기에 등장했던 분들 모두 더는 아프지 않고 건강하셨으면..^^ 고생 많으셨습니다.

  • 2020-11-06 09:15
    오... 우리와 같이 "요~시!"하면서 탁구쳤던 훈쌤이 맞나요..? 이전의 두 편에서도 읽으면서 자세를 바르게 하게 됐는데, 이번에는 스크롤을 내리면서 뭔가 가슴에 콕콕 박혔습니다. 여러 모로 좋은 자극을 받았습니다!

  • 2020-11-12 00:46
    훈쌤 그동안 올리신 글 잘 읽었습니다. 보니 고맙다는 댓글한번 안달았더군요. 누군가가 마음을 내어준 한자락의 글은 같이 마음을 내주게 하는 힘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좋은 일입니다.

  • 2020-11-14 17:01
    훈샘, 저도 매회 기다렸던 애독자입니다. 훈샘의 남다른 경험이 녹아든 일기, 감사히 읽었고 자극이 많이 됩니다. 앞으로도 일기가 쭈-욱 계속된다니 무척 좋습니다.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