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콜콜

<훈이의 관찰 일기> 2화 "삶의 변수들과 이우"

작성자
김훈
작성일
2020-11-15 21:09
조회
216
"훈이의 노동일기"에 이어 "훈이의 관찰일기" 연재를 시작합니다. 4n세 훈님이 연구실의 친구들과 세미나들 관찰을 빙자하여 자신의 얘기를 하는 코너가 될 듯합니다.^^



<훈이의 관찰일기> 2화

삶의 변수들과 이우

어느 책에서 '우리의 삶이 다른 사람의 고통에 기반하고 있다.'라는 구절을 읽는 적이 있었다. 그 사실에 나는 감응됐었다. 내가 사용하는 물건들, 내 몸, 내 정신, 내 주변의 모든 것들을 거슬러 올라 따져보니 그렇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리고 여기서 내 나름의 생각으로 '고통'을 '변수'로 바꾸니 '또한 우리의 삶은 수많은 변수에 기반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의 수많은 변수로 인해 우리는 원치 않는 고통을 받는다. 그리고 그 고통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때로는 전화위복이 될 수도 있다.

2년 전이었다. 3~4년 전의 일이라 여겼는데 핸드폰의 사진첩을 뒤져보니 2년밖에 되지 않았다. 사람들에겐 마치 아주 오래전의 이야기처럼 말했었지만 사실 나는 정확히 2018년 9월 25일에 마날리에 있었던 것이다. 인도 델리에서 라다크 레로 가는 세상에서 가장 높은 육로 길은 오랫동안 품어오던 꿈이었다. 마침 비행기를 티켓을 검색했더니 델리로 들어가는 아시아나항공 직항 왕복이 38만원에 나온 것이었다. 성수기엔 백만 원이 넘는 티켓이었다. '이런 변수가 있나!' 예상치 못한 횡재를 만난 것 같아 기뻤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비행기 티켓의 날짜는 9월 21일로 그 때는 라다크 길이 닫히기 시작하는 우기이기 때문에 여행자들이 가급적 피했다.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았던 나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다소 위험하더라도 저 저렴한 비행기 일정에 맞추기로 했다.

약 8시간 정도 걸려 델리 공항에 저녁에 도착해 입국 수속을 밟고 여행자 거리인 빠아르간지에 숙소를 잡았다. 그리고 내일 바로 마날리(델리에서 라다크로 가는 길의 중간지점이다)까지 가기 위해 교통편을 수소문해서 예약을 했다. 다음날 해가 쨍쨍하고 날이 무척 좋았다.  마날리로 향하는 버스로 오르기 위해 몸이 휘청일 정도로 무거운 배낭을 메고 걷던 나는 거리에 들어차있는 수많은 인파들과 노점들 그리고 노란택시, 오토릭샤(삼륜 오토바이 운송수단), 릭샤(인력거) 등을 헤치고 지나가면서 '아. 내가 정말 인도에 와 있다‘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6년 전에 다시 오겠다 마음먹었던지라 감회가 새로웠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라다크의 험난한 히말라야 산길과 고산병 정도는 각오하고는 있었지만 여행자들이 기피하는 시기에 비행기 삯이 싸다고 온 대가는 톡톡히 치러야 했다.

50년만에 오는 북인도 최대홍수로 마날리까지 12시간 걸리던 버스가 24시간 걸려서도 도착하지 못했다. 비는 억수같이 퍼부었다. 구불구불한 산길의 절반은 홍수에 유실된 상태라 버스는 왼쪽 편 산에 바싹 붙어서 한 차선만 운행해야 했고, 어떨 땐 폭포수처럼 내려가는 오른쪽 계곡의 흙탕물 위로 갖은 잡동사니들과 함께 버스가 떠내려가기도 했다. 자칫하면 나도 저 꼴이 되겠다 싶었다. 계곡의 철다리가 나오면 기사는 사람들보고 먼저 내려서 반대편으로 달려가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승객인 우리가 먼저 건너면 버스가 따라와 건넜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계곡 너머 구경꾼들이 빨리 건너라고 손짓하고 소리 지르던 기억이 난다. 계곡에 불어난 흙탕물로 다리가 언제 무너질지 불안했기 때문이다. 어떨 땐 바로 앞에 큰 바위덩어리가 떨어져 그것을 치우느라 몇 시간을 정체된 채 기다려야했고, 거의 다 왔다 싶을 때는 길의 삼분의 이가 유실돼서 버스가 더는 운행할 수 없게 되었다. 승객들은 내려서 지프차들과 비싼 요금을 흥정해야 됐고 타서도 비좁은 뒤 좌석에 끼여서 덜컹거리는 지프차의 불편함을 고스란히 견뎌야했다.

다른 무엇보다 괴로운 것은 변을 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혹시나 용기를 내 변을 보려고 해도 풀 한포기 나지 않는 히말라야의 산길은 절벽이거나 가파른 산뿐이었다. 남들 다 보는 산길에 엉덩이를 까고 일을 볼 수는 없는 것이었다. 24시간 동안 바나나와 몇 개와 물만 마신 덕에 변은 마렵지 않았지만 심한 허기를 느껴야했다. 그렇게 어렵사리 마날리에 도착했을 때도 여전히 비는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었고 나는 아무 식당이나 들어가 음료와 밥을 시켜 먹었다. 그리고 가까운 숙소를 찾아 잠을 청했다. 새벽에 갑자기 복통이 찾아와 화장실에 갔더니 설사를 했다. 그렇게 시작한 설사는 몇 십분 간격으로 계속 됐다. 그런데 마침 홍수로 수도가 고장 나 변기 물도 내리지 못한 채 계속 변을 봐야하는 곤혹까지 겪어야했다. 5일 동안 설사가 멈추지 않아 거의 방에서 나오지 못하고 숙소 옆의 주인장이 운영하는 식당에만 잠시 들러 음식을 받아왔다. 음식을 섭취하면 바로 심한 복통을 일으키며 설사를 했기 때문에 거의 죽이나 음료만 조금씩 섭취했다. 설사는 몇 십분 간격으로 계속 나왔기 때문에 몸에 기운이 없어서 숙소를 나가지 못한 채 하루 종일 누워만 있었다. 온갖 잡념들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여행 오기 전 헬스를 반년 넘게 해서 몸이 좋았지만 설사병으로 인해 여태껏 살면서 가장 마른 몸의 자기를 거울로 볼 수 있었다.

그러던 중 안색이 안 좋은 나를 보고 숙소에서 물 담배를 피던 네팔의 젊은 친구들이 다음날 택시를 불러주고 가까운 병원을 알려준 덕에 약을 처방받고 나을 수가 있었다. 오지의 산동네라 병원 같은 건 없을 줄 알았다. 그리고 한국에서 지사제를 두 종류나 챙겨가서 먹었지만 전혀 낫지 않더니 인도 약은 바로 한방에 낫는 것이었다. 빠르게 회복을 해서 더 늦기 전에 라다크로 올라가야했다. 한인 식당에 가서 돈을 아끼지 않고 고기와 좋은 음식을 섭취했다. 하지만 한인 식당 주인장 아주머니의 말에 의하면 앞으로 일주일 안에 폭설로 쌓인 길이 복귀가 되지 않으면 포기하라는 것이었다. 마침 라다크에서 내려오신 분이 살아생전에 가장 아름다운 설산을 봤지만 겨우 살아서 내려왔다는 말에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다시 델리로 가지도 못했다. 이미 홍수로 길이 대부분 유실돼서 차량이 통제됐다. 위로도 폭설로 아래도 홍수로 사방이 고립된 채 기다려야 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도로가 정비돼 유일하게 갈 수 있는 곳이 생겼다는 것이었다. 지도상 마날리의 왼쪽에 위치한 다람살라였다. 우리나라 돈으로 무려 택시비가 십이만 원이었다. 인도 물가를 생각하면 거금이었다. 어쩔 수 없이 그 거금을 들여 라다크는 다음으로 기약하고 다람살라로 갔다.

다람살라에 도착하니 길게 줄을 선 서양 사람들의 행렬이 보였다. 간혹 일본사람들도 보였기 때문에 의구심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일본어를 조금 할 줄 알았던지라 물어봤더니 달라이 라마 가르침이 있는 날이라 출입증을 받기위해 서 있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줄이 너무 길어서 망설이다가 어차피 일정도 틀어져서 할 일도 없으니 달라이 라마나 뵙자는 심정에 줄을 섰다. 그렇게 해서 출입증을 받아 다음날 티베트 사원에 들어가 맨 뒤쪽에 우두커니 앉아있었는데, 내 뒤편의 철문이 열리더니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나도 무심결에 군중들 사이에 껴서 철문 쪽을 쳐다보고 서 있었더니 달라이 라마가 몇몇 무장한 군인들의 함께 다른 스님의 부축을 받으며 나오는 것이었다. 그리고 바로 몇 발자국 앞에 지나가시는데 많이 노쇠한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 때문이었는지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지더니 눈물이 났다. '이건 뭐지'하고 이 예기치 못한 감정에 나는 놀랐다.

2년 전 예기치 못했던 인도여행은 수많은 변수들의 연속이었다. 그 변수들이 때론 고통의 원인이기도 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 변수들 덕에 달라이 라마를 뵐 수 있었고 규문에서 공부를 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또한 그런 변수로부터 비롯된 홍수와 설사병으로 경험하게 된 죽음에 대한 공포와, 달라이 라마처럼 ‘나도 늙을 수 있다’는 인지는 글쓰기를 물론 ‘남은 생(生)을 허투루 살 수 없다’라는 자각을 일으켰다.

'이번엔 이우라는 변수였다.'

나는 가끔 누군가의 이미지를 바꾸는 놀이를 즐길 때가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여자를 남자로 변장시켜 본다든가 또 어떤 남자를 현대의 의학 기술로 호르몬 주사를 맞추고 약간의 성형을 더하고 여성스런 화장과 옷차림으로 꾸미는 상상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이든 사람은 젊었을 때 이랬을 거라고 머릿속으로 짐작해보곤, 제 자신의 손등에 난 주름과 굵게 도드라진 핏줄을 보며 '아, 나도 늙고 있구나.'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애초에 가졌던 성별과 나이에 대한 거리감은 허물어지고 동등하게 대할 수가 있었다. 내가 낯가림이 심해서 고안했던 방법이다. 하지만 아이와 애완동물 앞에선 속수무책으로, 말 없는 나무처럼 꼿꼿해져서는 당황한 빛을 들키지 않으려고 표정에 신경 써야 됐다. 더욱이 친동생의 6살 아들 앞에서조차 나는 과묵한 큰아빠로 '어, 그래.', '잘 가', ‘안녕'이라는 몇 안 되는 소통어를 구사하며 뻣뻣해졌다.

그러니 이우 앞에서도 속수무책이었다. 몇 가지 소통어만 구사하고 표정만 관리하면 더 당황스런 일을 겪지 않아도 될 터인데, '이우 관찰일기'를 쓰라는 채운샘의 말은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일이었다. '이걸 어쩐단 말인가? 혹시 채운샘이 눈치 채시고 나의 틀을 깨라는 미션 같은 걸 주신건가?', 여하튼 나는 상상력을 총 동원해 다른 방도를 찾아내야 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곰곰히 생각하다 '모든 중생은 부처님이다'라는 말에 착안해 이우에게서 아직 세상의 고(苦)를 보시기 전인 천진난만 했을 고타마 붓다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러니 이우를 대하는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도리어 이우를 통해 부처님을 뵙고 스스로를 돌이켜 볼 수 있으니 고마워해야 할 일이 아닌가. 그리고 번뜩 생각난 것이 나의 상상들이 불티(불교& 티베트)세미나에 공부했던 것을 십분 활용하는 것도 되겠구나 싶었다. 다시 말해 내가 세상이라 믿는 것이 우리의 몸과 정신이 만들어내는 환영에 불과하다면 나의 상상이 그 환영을 스스로 역이용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환영이 고(苦)를 만들어 낸다면 또한 우리의 환영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고(苦)를 복(福)과 같은 긍정적인 상태로 변환시킬 수도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인생은 아름다워'라는 영화가 있다. 그 영화의 주인공 귀도는 평소 재치 있고 상상력 넘치는 사람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그의 가족이 유태인 수용소에 들어가게 되면서 귀도는 아이를 달래기 위해 수용소가 점수 1000점을 따면 탱크를 상품을 주는 게임이라며 거짓말을 꾸며낸다. 그 재치 있는 거짓말이 실제 수용소와 다른 환영을 아이가 상상하게 만들어준 것이다.

이우에게 어떤 질문을 하면 두 가지 방식으로 답하는데, 그것은 즉각적이거나 한참을 골똘히 생각한 후이다. 보통 즉각적일 때는 "아니거든요!"하고 바로 답하는데, 아마도 이것은 '청개구리 같다'라는 말보다는 '이우는 청개구리 같은 대화놀이를 좋아한다.'라고 바꿔야하지 않나 싶다. 이우에게 질문에 답하는 대화는 일종의 놀이 같은 것이어서 "예"라고 말하면 게임을 충분히 즐기지 못하고 상대에게 승복해버리는 셈이 되는 것이다. 특히 이런 놀이는 절친(?) 민호샘과의 주거니 받거니 하는 대화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이우와 민호샘은 표면적으로는 대화를 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놀이를 하는 것이었다. 두 번째 "음..."하고 골똘히 뜸을 들여 답하는 방식은 더 이상 대화가 놀이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때가 이우에게는 가장 진지한 순간이 아닐까 싶다. 천진난만한 아이 얼굴에 진지한 빛이 어리면 그것은 모두가 가만히 들여다 볼 수밖에 없게 된다. 어떤 말이 그 입에서 튀어나올까 기대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우가 "음.."하고 뜸을 들일 때면 그 진지한 모습에 어른들은 '기특하고 귀엽다'라고 여기기 마련이다. 또한 이우에게서는 가끔 핵심을 찌르는 날 것의 말이 나올 때가 있다. 그러면 '아이의 눈은 정직하다'라는 격언을 새삼 느끼게 된다.

'아. 그렇구나.' 이우와 규문 식구들이 소통 방식은 질문이었다. 그러나 과거 여러 일들을 곰곰이 떠올려보니, 나는 상대를 슬쩍 관찰하거나 엿듣는 데 익숙할 뿐 상대의 생각이나 개인사 등에 대해 직접적인 질문을 한 적이 없었다. 5년 가까이 우리 집에 살았던 친구의, 그가 스스로 말해주기 전에는 몰랐을 개인사를 뒤늦게 '측량 알바 일기'를 쓰면서 알게 되서 미안했던 기억이 났다. '왜 그런 것이었을까?, 사람들에 대해 관심이 부족해서? 나의 자기중심적인 개인주의 때문에?' 나는 여러 직업들을 전전하면서 매번 다른 사람들은 만날 때마다 그들에게 질문을 받는 자로서 줄곧 살아왔다. 나이, 전에 했던 일, 사는 곳, 가족사항 등이 늘 받는 질문이었다. 그 반면에 나는 같이 일하는 사람들에게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특히 나이와 직업을 묻지 않는 습관(그래야 선입견 없이 사람을 볼 수 있다 여겼다)이 있었는데,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마음을 붙이지 못하다 보니 '오는 사람 안 막고 가는 사람 안 잡는다‘라는 말처럼 사람에 대한 미련을 갖지 않는 편이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모지리 같은 생각이었다. 그렇게 모지리 같이 살았으니 사람들과의 소통에 어려움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나는 스스로를 객체라고 인식하는 데에 길들여져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옳고 나쁘다고 이분법적으로 나누고 싶지는 않다. 그것 또한 결국은 서로가 연결돼 있다는 존재에 대한 깊은 이해의 부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겠는가. 다만 나의 무지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내일이면 이우를 비롯해 규문식구들이 영주로 놀러가기로 했으나 운전하기로 된 정옥샘이 전날 갑자기 발목을 다쳤다. 다들 크게 다치지는 않았나 염려스러워했다. 그로 인해 영주를 못가는 대신 관악산을 등산하게 됐지만 규문 식구들의 표정은 밝았다. 땀을 흘리며 함께 산을 타니 규문 식구들과 더욱 친밀해질 수 있었다. 산에 내려와서는 나의 상상력 덕분이었는지 한결 편해진 이우가 내가 나왔다며 핸드폰의 사진을 보여줬다. 때때로 나를 포착해 찍어준 이우의 마음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역시 부처님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었다. 때론 작은 상상력이 변수에 대응할 수 있는 유연한 방편이 될 수도 있다.
전체 4

  • 2020-11-15 22:04
    '관찰일기'를 빙자한 '자기 얘기보따리 풀기'가 분명하군.ㅋㅋㅋ
    암튼 요약하자면, 이우는 부처고, 이우를 부처로 상상한 후니도 부처다? 여기에 피처링은 달라이 라마? 와우, 엄에이징!!^^

  • 2020-11-16 16:14
    이우의 청개구리식 대화는 뛰어난 상상력의 산물이었군요...! 하나 배워 갑니다.
    훈샘 앞에 '늙음'으로 나타난 달라이 라마, '상상력'으로 나타난 이우가 준 깨달음!!

  • 2020-11-16 17:10
    계속 '아니거든요!'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점수가 후하시네요. 부처님이라니 ㅎㅎ
    저한테는 그냥 일반적인 대화였는데 다른 사람의 시선으로 봤을 땐 '청개구리식 대화' 였군요ㅋㅋㅋㅋ

  • 2020-11-17 09:56
    '속수무책'을 넘어가는 방편으로서의 상상이 있군요. 그리고 이우와 민호의 대화가 놀이와 진지한 고민 사이를 오가는 줄은 몰랐습니다.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