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좌 후기

스피노자 강의 후기(들뢰즈와 네그리)

작성자
추연
작성일
2017-10-27 09:04
조회
105
스피노자의 철학에 매력을 느껴 어설프게나마 꾸준히 공부하고 있는 입장에서, 이번 강의를 통해 상당한 자극과 촉발을 받고 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름만 들어본 서양 철학자들의 사상의 일단을 접하는 것도 좋지만, 무엇보다 그들을 통해 다양한 스피노자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감격스럽기 그지없습니다. 그리고 샘의 지적 깊이에 대해서는 경탄을, 꼼꼼하고 성실하신 강의에 대해서는 깊은 감사의 마음을~~!!!^^

본격적인 강의에 앞서 지난 시간 내용을 좀 보강해 주셨는데요, 먼저, 스피노자의 주요 개념인 ‘적합한 관념’에서 ‘적합한’에 해당하는 원어인 ‘adaequatus’가 ‘사물(대상)과 지성(관념)의 일치(equation)성’을 의미하는 것인 만큼, ‘타당한’이라고 번역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고 강조하셨죠. 많은 책들이 그렇게 번역하고 있기에 특별히 언급을 하신 듯합니다. 그리고, 이와 비교되는 말로 ‘agreement’의 뜻을 갖고 있는 ‘convenientia’가 있는데, 이 또한 ‘대상과 관념간의 합치’의 의미를 담고 있지만, ‘adaequatus’와 달리 합치의 근거까지 품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convenientia’한 걸로는 ‘참된 관념’을 이룰 수 있지만 2,3 종의 인식에까지는 도달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죠. ‘adaequatus’는 늘 ‘convenientia’하지만, 그 역은 아니라는 것! 다시 말해, 적합한 관념은 근거에 대한 인식을 품고 있기에 언제나 참된 관념이지만, 근거를 품고 있지 않은 ‘참된 관념’은 적합한 관념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나저나 말이 좋아 ‘적합한 관념’이지 어떻게 이에 도달할 수 있을지는 참 어려운 문제라는 생각이 듭니다.

다음으로, ‘상상’에 대한 부가 설명. 외부 대상과의 만남으로 인한 신체의 변용 또는 그로 인해 새겨진 흔적이 ‘imago’이고, 이와 동시에 우리의 정신에서 이루어지는 신체변용에 대한 지각)의식) 작용이 ‘imaginatio’라 하는 만큼, 우리의 사고 작용 일체가 ‘상상’ 작용일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이, 우리의 신체를 변용시킨 대상이 이미 현존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자신에게 현존하는 것처럼 표상한다는 사실입니다. 이게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상상’의 의미일텐데요, 문제는, 우리는 왜 이렇게 표상하냐는 겁니다. 그리고 또 언제까지. 스피노자는 관성이라고 하는 자연 법칙이 지각 작용이나 정서에서도 일관되게 작용하기 때문에 새로운 사물이 나타나 신체를 변용하기 전까지, 원리상으로는 무한하게 지속될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그리고, 하나의 대상이 깊은 흔적을 새겨 또다른 새로운 사물이 등장했음에도 사라지지 않는 경우까지 있다고, 그리고 이를 프로이트 식으로 말하면 트라우마가 형성된 거라 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같은 상상이 그 자체만으로 보면 정신의 악덕이 아니라 미덕이 될 수 있다고 하셨는데요, 부재를 현존으로 표상할 수 있는 이 상상 능력이 없다면, 매번의 지각 작용은 단편적이고 일회적인 것이 그치고 말아 인간은 자신의 경험들을 비교, 연결, 복원, 종합할 수 없게 되어 철저한 고독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될 거라는 겁니다. 결국, 상상은 1종의 인식이기는 하지만, 이것 없이는 2,3종의 인식 또한 불가하다는 점에서, 2종으로 넘어가는 가교의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을 듯합니다. 들뢰즈가 예로 든, 언어(pommum)나 이미지(말발자국)의 예를 보더라도, 인간은 어케든 ‘상상’을 끌어안고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선생님께서는, 스피노자에 대한 들뢰즈 해석의 독특한 면모 중 하나가 개체(존재자)를 바라보는 ‘일반 행동학적 관점’에 있다고 하십니다. 각 기관의 기능과 기관들의 조직 방식에 따른 생물학적인 범주 구분이 아니라 변용 능력과 정서를 통해 드러나는 존재자들의 존재 역량에 따른 분류가 더 근본적이라고 들뢰즈는 보고 있다는 것이죠. 그렇게 되면 수레를 끄는 말은 경주용 말보다 수레를 끄는 ‘소’와 더 가까운 친척이 되어 버리는데, 이는 우리가 철칙 같이 신봉해 온 종적인 유사성에 따른 보편적인 범주 구분이 사실은 우리의 해묵은 믿음이나 편견에 근거한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환기시켜 줍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이같은 들뢰즈의 해석이, 스피노자의 생각과 아주 일치하지는 않는 것 같다고 하셨네요. 스피노자는 형상을 고유하는 것들끼리의 묶음을 여전히 견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면이 남아있다고 한다면, 들뢰즈는 오로지 역량과 정서의 차이를 중심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것이었지요.

들뢰즈의 이같은 관점은 인간의 윤리의 문제와 관련해서도 획기적인 의미를 갖는데, 들뢰즈는 그간 ‘심판의 체계’로 기능해 온 온갖 도덕적 ․ 초월론적 가치 판단 기준에 관한 문제를, 좋고 나쁨이라는 내재적 역량의 문제로 전환시키고 있다는 겁니다. 코나투스를 자기 본질로 삼고 있는 우리 유한자의 존재 역량을 증대시키는 것은 ‘좋음(선)’이 되고, 그 반대의 것이 ‘나쁨(악)’이 된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우리의 실존 양식에 대한 평가의 문제에 있어서도, 존재 역량을 증대시키는 기쁨의 정서가 반대인 슬픔의 정서보다 더 가치 있고 좋은 게 되는 것은 물론이겠지요. 그리고 이 정서들이 모두 외적인 원인이나 조건에서 생겨난다는 점에서 수동적이라고 한다면, 단지 ‘기쁨’의 정서를 산출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우리 자신의 존재 역량이 증대되는 원인이나 조건을 적합하게 인식하고 이를 우리 스스로를 통제함으로써 능동적인 존재자가 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실존 양식에 대한 평가의 관건이 될 터이지요. 그리고 이같은 능동화의 문제는 어떻게 새로운 실존 양식을 창출하느냐의 문제로, 다시 말해 윤리적인 문제에서 정치적인 문제로 우리를 이끌어 간다고 들뢰즈는 보고 있다고 합니다. 스피노자의 철학에서 사회적 조건의 변혁이라는 현실 정치의 문제를 끌어내고 있으니, 들뢰즈는 역시 놀라운 철학자라는 생각이~~~^^.

들뢰즈에 대한 논의를 마무리하시면서 선생님께서, 수동에서 능동으로 나아가는데 있어 중요한 고리라 할 수 있는 ‘common notion(공통 관념)’에 대해 설명해 주셨는데, 개인적으로는 성에 안 차 질문을 더 하고 싶었던 게 사실입니다. 공통관념은 항상 우리에게 적합하게 인식될 수밖에 없다는데, 그래서 이거 한 방이면 끝날 거 같은데^^), 아무리 읽고 그 뜻을 헤아려 보아도 그게 도대체 뭔지, 그걸 어떻게 형성하고 또 확장시킬 수 있는지는 여전히 오리무중인 것 같습니다. 기회되면, 공통 관념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저만 그랬던 건지~~ㅠ).

이제 네그리로 갑니다.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현대 정치 철학자이자 급진적인 좌파 이론가이고, ‘다중’이라는 개념으로 식자층에 널리 알려진, 그의 글은 한쪼가리도 제대로 못 읽어봤지만 명성만큼은 자자해서 언젠가 도전해 보리라 맘(만) 먹었던 철학자였슴다. 그의 사상적 투쟁의 궤적은 한 마디로 ‘불의 연대기’라 할 만한 듯한데, 그의 독보적인 위상과 문제 제기 능력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이 스피노자 연구라고 합니다. 감옥 안에서 저술한 <야생의 별종:스피노자 철학에서 역량과 권력>(1981)를 통해 네그리는 그간 스피노자 연구자들에게서 주목받지 못했던 새로운 정치적 해방의 주체를 발견하는데, 그게 바로 ‘다중(multitudo)’이라고. 그리고 작금의 제국의 시대에 ‘다중’이 역량이 어떻게 현실화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제국>(2001> 3부작을 통해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고 하지요(그러고 보니, 이 책이 내 책꽂이 어딘가에 있는 듯도~~). 현대 스피노자주의 정치학의 한 토대를 제공해 주었다는 <야생의 별종>에 대한 샘의 설명을 따라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그는 들뢰즈와 다른 맥락에서 스피노자의 철학을 이질적인 두 권의 철학으로 구분한다고 합니다. 들뢰즈가 <윤리학>을 서술 방식에 따라, 치밀한 논리와 기하학적인 토대에 바탕해 쓰여진 정의나 정리 부분과 경험적인 묘사와 서술을 통해 스피노자의 생각을 비교적 직접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부록이나 주석 부분으로 이원화할 수 있다고 보았다면(읽어보면 확연한 듯요~~), 네그리는 스피노자 철학의 발전과정에 상이한 두 단계가 존재한다고 가정하고 있다는 겁니다. 첫 번째 시기는, <윤리학> 1-2부가 쓰여지는 시기(1661-1665)로, 이 단계에서는 산출하는 자연인 실체와 산출되는 자연인 양태 사이의 존재론적 거리가 완전히 소거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스피노자가 여전히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초월성에 대한 흔적)에서 자유롭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합니다. 들뢰즈가 속성을 매개로 실체와 양태 사이의 거리가 완전히 사라진, 일의성의 존재론을 여기서 확인했다는 점을 상기해 보면 두 사람의 관점은 다른 게 분명합니다. 두 번째 시기는 <윤리학> 3-4부와 <정치론>이 쓰여진 후기로(1670-1677), 실체나 속성 개념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났을뿐더러, 다중이라는 개념을 기본적인 세계 구성의 원리로 제시한다는 점에서 내재성의 철학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고 네그리는 주장합니다. 첫 번째 시기와 두 번째 시기 사이에서, <신학정치론>을 집필하면서 히브리 민중들을 통해 현실적인 역사와 정치 세계를 발견한 게 그 변화의 계기가 된 것으로 네그리가 보고 있다고 샘께서 덧붙여주셨지요. 한 마디로, 1-2부와 3-4부의 철학을 전혀 다른 철학으로 보고 있다는 것인데, 이같은 시기별 구분이 설득력을 갖지 못하는 결정적인 증거가 바로 <윤리학> 5부로, 아다시피 5부가 ‘신의 사랑’에 대한 언사들로 넘쳐나고 있다는-샘의 말씀대로 성령으로 충만하다는-사실을 확인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지요. 그의 주장이 독창적인만큼, 소수의 의견에 그친다는 겁니다.

이같은 점은, 네그리의 근대 철학의 계보 구분에서도 보입니다. 그는 서구 근대의 철학을 권력(포테스타스)의 노선과 역량(포텐샤)의 노선으로 나누고, 전자에 홉스-루소-헤겔로 이어지는 흐름을, 후자에 마키아벨리-스피노자-마르크스로 이어지는 흐름을 배정합니다. 그리고 전자가 근대의 지배적인 사상의 노선이라면, 후자가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에 맞서 민중의 해방력을 드러낸 노선이라고 합니다. 내 상식으로도 맑스를 후자에 위치지운 것은 당연해 보이는 데 반해 마키아벨리를 여기에 놓은 것은 좀 납득이 안 되는데, 네그리는 군주에 대한 조언을 아끼지 않은 듯 보이는 마키아벨리가 사실은 급진적인 공화주의자로 <군주론> 역시 민중을 염두에 두고 쓴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스피노자는 ‘부르조아 생산 관계의 헤게모니가 성립하는 고전주의 시기(17세기)에 이에 대항하여 생산력과 존재의 충만한 역량을 강조하는 “야생의 별종”의 위치를 차지’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라고요. 나아가 네그리는 스피노자의 철학이 ‘세계에 대한 다중의 실천적 구성의 역량을 긍정하는 정치적 구성의 존재론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뚜렷한 현재성을 지닌 것으로 보는데, 여기서 우리는 근대성 안에서 주변화된 역량의 노선(특히 스피노자)을 통해 ‘모더니티’를 넘어설 반근대성을 발굴해내고자 하는 네그리의 안간힘을 읽어낼 수 있다고 말씀하셨지요. 네그리는 ‘말이 되든 안 되든’ 일견 참신하고 독창적으로 보이는 큰 구도를 잡고 그 안에 대립 구도를 설정하는 것 같은데요, 이는 그가 문제를 설정하고 제기하는 방식의 중요한 특징으로 보입니다(어찌보면 풍운아나 도박사 기질이 농후해 보이는 듯도 하고··ㅋ). 우리가 중요하게 살펴야 할 것은, 과연 이런 명괘한 이분법이 스피노자의 철학에 부합하냐일텐데 그렇지 않은 게 문제라고 하셨네요.

<윤리학>에는 존재론과 신학적인 차원에서 ‘역량(potentia)’과 ‘권력(potestas)’이라는 개념쌍이 대립적인 의미로 사용되는데, ‘역량’은 ‘합리적으로 인식된 신의 본성’을 나타내며, ‘권력’은 ‘신의 본성에 대한 상상적이고 미신적인 견해’를 나타냅니다. 이게 가장 명료하게 드러난 텍스트가 2부 정리 3의 주석이라 하시면서 꽤 길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간략히 요약해 보자면, 신의 역량(포텐샤)은 ‘자연의 필연적인 법칙들에 따라 필연적으로 표현되는 자연의 무한하게 많은 인과 역량’으로, 필연적으로 행위나 활동으로 표현되는 힘이자 본질에 다름아닌데, 우중들이 이를 자유의지에 따라 행사되는 능력-주체의 의지에 따라 실행될 수도 되지 않을 수도 있는-으로 이해해 왕의 권능(포테스타스) 같은 것과 혼동한다는 것입니다. 스피노자는, 이는 신인동형론적인 발상으로 인간 자신의 모습을 신에 투영해 만들어낸 상상적인 이미지에 불과하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왕’은, 인간은 과연 자유의지에 따라 자신의 힘을 행사하느냐 하면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 신의 역량과 왕의 권능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은 모든 유한자와 마찬가지로 '왕' 또한 필연적인 인과율에 따라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이중의 오해에 기반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처럼 스피노자는 포텐샤를 ‘주체의 의지와 무관하게 필연적으로 작용하는 인과 관계와 그 작용’으로, 포테스타스를 ‘인과적 필연성을 초월하는 어떤 목적을 전제하거나 의지의 무한성에 의존하는 힘’으로 구분하고 있는데, 이같은 구분은 당대의 우중을 비롯한 신학자들이 견지한 존재론과 종교적 믿음에 대한 비판을 함축한다고 합니다. 신학과 존재론적 차원에서 사용된 포텐샤와 포테스타스의 개념을, 네그리는 정치적인 방식으로 전유하게 되는데, 과연 얼마나 스피노자의 철학과 합치하느냐에 대해서, 다음 시간에 다중의 문제와 연관해 설명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다음 시간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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