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n

0321 수업 공지

작성자
수경
작성일
2016-03-17 15:22
조회
507
如是我聞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一時 佛 在舍衛國 祇樹給孤獨園 歟大比丘衆千二百五十人俱 한때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시사 큰 비구들 천이백오십 인과 더불어 함께 하셨다.
爾時 世尊 食時 着衣持鉢 入舍衛大城 乞食於其城中 次第乞已 還至本處 그때는 세존께서 공양하실 때라 옷을 입으시고 발우 가지시어 사위대성에 들어가시사 걸식하실 때 그 성중에서 차례로 걸식하여 본래의 처소로 돌아오사,
飯食訖 收衣鉢 洗足已 敷座而坐 공양을 마치시고 옷과 발우를 거두시며 발을 씻으신 뒤 자리를 펴고 앉으셨다.

여시아문. 불교 경전에서 맞닥뜨리는 익숙한 문구지요. 몰랐을 때는 그냥 그런가보다~ 들은 건가보다~ 그래 글보단 말이지, 그랬는데 이번에는 보면 볼수록 이거 희한하네요. 채운쌤 설명에 의하면 여기서 我란 들은 주체로서의 아난이 아니라는. 그리고 我가 들었다고 하는 이하의 기나긴 이야기도 붓다 개인의 말씀이 아니지요. 듣는 이도 말하는 이도 달리 없고 둘 사이에 전해지는 어떤 말도 없는 가운데(어떤 실체도 없는 가운데) 여시아문이라 하니, 이거야말로 空의 드러남 아닌가여. 채운쌤 표현에 의하면 이는 진리가 있는 바로 그 자리, 그 총체적 상황이랍니다.

또 하나 의미심장한 표현, 一時. 실제로 다른 경전들에서도 어떤 법회나 설법 등이 있을 때 어떤어떤 때라 명시하지 않고 일시라고 하더군요. 이 또한 특정한 일시가 아니라 전체가 緣起된 바로 그와 같은 때를 의미한답니다.

법회인유분이 금강경의 전부일 수도 있으며 나머지는 그 반복이라고 할 수도 있다는데, 솔직히 처음 봤을 때 큰 감동이나 충격을 받기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냥 어느 하루 붓다가 말씀하시기 전 공양하고 세족했다는 것 아닌가…. 헌데 채운쌤 말씀에 의하면 설법과 일상 공간이 서로 분리되지 않았다는 점, 하여 설법 자체가 특화되지 않는다는 점이 일단 주목할 지점이라네요. ‘일상즉보리’.

한편 ‘착의지발’은(한자를 잘 모르는 자로서 분위기까지 느끼고 파악하기 쉽지 않습니다만) 한 끼를 먹을 때에도 하나하나 공들여서, 수행하듯 정갈하게 옷을 갖춰 입고 발우를 드는 모습을 나타낸다고… ^^;
한 가지 더, 걸식. 이건 세미나 시간에도 많이 나온 이야기였는데요, 채운쌤 왈 걸식은 분별심을 버리는 수행이자 밥을 주는 이에게 하는 보시라고.

책에서 무비 스님 해설을 보면 이 장면이야말로 일체의 상(四相) 없이 일상적 일들을 해나가는 붓다의 모습을 보여준다 합니다. 아직 붓다의 목소리는 한 자락도 들리지 않는 가운데 이미 이처럼 지혜가 그 자리에 펼쳐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말없이 앉아만 있어서야 우리 같은 범부들 마음의 평온함이 1초라도 유지될 수 있겠습니까. 수행하는 제자들도 이는 마찬가지라, 붓다와 달리 많은 제자들의 경우 다시 마음이 요동치고 온갖 분별심이 작동하기 시작하겠지요. 이를 알아챈 1人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입을 엽니다. 붓다에게 설법을 요청하기 위해서지요.

時 長老 須菩提 在大衆中 卽從左起 偏袒右肩 右膝着地 合掌恭敬 而百佛言 그때에 장로 수보리가 대중 가운데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쪽 어깨에 옷을 벗어메고 오른쪽 무릎을 땅에 꿇으며 합장하고 공경히 부처님께 사뢰었다.
希有世尊 如來 善護念諸菩薩 善付囑諸菩薩 世尊 善男子 善女人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 應云何住 云何降伏其心 “희유하십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모든 보살들을 잘 호념하시며 모든 보살들에게 잘 부촉하십니다. 세존이시여, 선넘자 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하오니 응당 어떻게 머무르며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받으오리까.”
佛言 善哉善哉 須菩提 如汝所說 如來 善護念諸菩薩 善付囑諸菩薩 汝今諦淸 當爲汝說 善男子 善女人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 應如是住 如是降伏其心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선재선재라. 수보리야, 네 말과 같이 여래는 모든 보살들을 잘 호념하며 모든 보살들을 잘 부촉하느니라. 너희는 지금 자세히 들으라. 마땅히 너희를 위해 설하리라. 선남자 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하였으면 응당히 이와 같이 머물며 이와 같이 그 마음을 항복받아야 하느니라.”
唯然 世尊 願樂慾聞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바라옵건대 듣고자 합니다.”

인상적인 이야기 하나. 수보리는 무지한 탓에 묻는 것이 아니라 가장 먼저 중생의 마음(분별심)을 알아차리고 일어난 것이라는 사실. 그렇기에 붓다가 善哉라 칭찬한 것이랍니다.
‘마음을 항복받는다’는 표현 때문에 셈나 중에 수보리가 약간 계몽적인 것 아닌가 이런 이야기도 나왔었는데, 채운쌤에 따르면 일단 호념하고 부촉하는 것은 모든 보살 스스로 해야 하는 것이지 여래가 해줄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랍니다. 우리도 이미 배웠듯 나도 중생도, 또 공도 여래도 실체라 할 만한 것은 어느 하나 없지요. 깨닫는 것은 오직 각자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됩니다. 마음을 항복받는 것(마음을 다스리는 것) 또한 어떤 선각자가 해주는 것이 아니고 오직 자신만이 할 수 있답니다. 수보리가 물었던 것은 어떻게 하면 중생이 집착 없이, 오는 것과 가는 것에 매이지 않고 그렇게 편안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지, 깨달은 내가 어떻게 중생의 마음을 항복받을 것인가, 깨닫게 할 것인가, 이런 질문은 아니었다는.

佛告 須菩提 諸菩薩摩訶薩 應如是降伏其心 부처님이 수보리에게 말씀하시되 “모든 보살마하살은 응당 이와 같이 그 마음을 항복받을지니라.
所有一切衆生之類 若卵生 若胎生 若濕生 若化生 若有色 若無色 若有想 若無想 若非有想 非無想 我皆令入無餘涅槃 而滅度之 있는 바 일체 중생의 종류인 난생․태생․습생․화생․유색․무색․유상․무상․비유상․비무상을 내가 다 무여열반에 들어가게 해서 그들을 다 멸도하리라.
如是滅度無量無數無邊衆生 實無衆生得滅度者 이와 같이 한량없고 셀 수 없고 가없는 중생을 멸도하되 실로는 멸도를 얻은 중생이 없느니라.
何以故 須菩提 若菩薩 有我相 人相 衆生相 壽者相 卽非菩薩 무슨 까닭인가.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으면 곧 보살이 아니니라.

이제부터 언어 방편을 사용한 붓다의 가르침이 시작됩니다. 조금 전까지 걸식과 세족으로 보인 모든 것이 다시금 말로 되풀이되지요.

여기서 핵심 문장은 ‘실로는 멸도(상을 없애기, 열반)를 얻은 중생이 없다’. 붓다에 따르면 여래로부터 구제받는 중생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멸도란 스스로 자각함으로써 가능한 것이지 타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위에 언급된 네 가지 상을 없애는 것이 곧 깨달음일 텐데, 채운쌤에 따르면 이는 아무런 상도 없이 행하라는 것이기보다는, 상을 만들되(인간이 살아가는 한 매번 상은 자연스레 짓기 마련) 그것에 붙들리고 얽매이지 말라는 것이라고. 우리가 안 되는 게 이거죠. 한 번 만들어진 상은, 물체로 쥐고 있는 것도 아니건만 어쩜 그리 안 없어지는지.

復次 須菩提 菩薩 於法應無所住 行於布施 또 수보리야, 보살은 법에 응당히 머문 바 없이 보시를 할지니
所謂不住色布施 不住聲香味觸法布施 이른바 색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며 성향미촉법에도 머물지 않고 보시해야 하느니라.
須菩提 菩薩 應如是布施 不住於相 수보리야, 보살은 응당 이와 같이 보시하여 상에 머물지 않으야 되느니라.
何以故 若菩薩 不住相布施 其福德 不可思量 무슨 까닭인가. 만약 보살이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면 그 복덕은 가히 헤아릴 수 없느니라.
須菩提 於意云何 東方虛空 可思量不 佛也 世尊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동쪽 허공을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겠느냐.” “못하겠습니다. 세존이시여.”
須菩提 南西北方 四維上下虛空 可四量不 不也 世尊 須菩提 菩薩 無住相布施福德 亦復如是 不可四量 “수보리야, 남서북방과 사유상하허공을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겠느냐.” “못하겠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보살의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한 복덕도 또한 이와 같아서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느니라.”
須菩提 菩薩 但應如所敎住 수보리야, 보살은 다만 응당히 가르친 바와 같이 머물지니라.

여기서 포인트는 무주상보시. 상이 있다는 것은 전제가 있다는 것이고, 여기 머무른 채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말. 만약 나의 분별에 따라 보시를 행한다면 이는 住相布施라 해야겠지요. 이게 산타클로스들이 하는 일. 꼭 돌려받을 걸 기대하지 않더라도 어떤 근거에 따라 선별해 누군가에게 베푸는 것은 잉여를 남기기 마련인 듯합니다. (산타의 선물이 울지 말라는 명령이 되는 것처럼…?-_-?)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한 복덕, 위에서 말한 其福德에 대한 설명도 인상적이었어요. 복덕이란 어떤 행위에 대한 대가가 아니라 그 존재 양식 자체라는 사실. 지혜로워‘서’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지혜 그 자체가 복이라는 것. 상에 얽매이지 않는 삶 자체가 복덕이라는 것. 그러므로 이는 헤아릴 수 없는 것이 된답니다.

한자를 하나하나 읽어가며 하니 저는 그 재미가 또 있던데, 음, 혹시 저만(문맹이었던 탓에) 그런 걸까요; 암튼 다다음 주에도 재미나게 금강경 공부 해보아요.
당장 다음 주에는 에델만의 <신경과학과 마음의 세계> 함께 읽습니다. 금강경이 전하는 무위법의 세계와 병행해 읽는 지극한 유위법의 세계! 기대됩니다아. 다들 8장까지 읽고 공통과제 해오시고요, 수정쌤 좋은 발제 부탁드립니다.
간식은 현옥쌤께서 자원하셨네요.
그럼 한 주 잘 보내시고 다음 시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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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3-17 15:46
    우아~ 아주 정성스러운 공지로다! 다른 분들도 요렇게 한 구절 한 구절 새겨가면서 복습하심 좋겠구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