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n

3월 21일 수업 후기

작성자
현옥
작성일
2016-03-22 12:07
조회
582
다들 그러셨을 거라고 믿지만, 개인적으로 저도 이번 수업이 정말 흥미진진했습니다!

큰 주제는 ‘신경과학과 마음의 세계’의 저자인 아델만의 문제의식, ‘마음을 얘기하기 위해서 어째서 먼저 물질(신체 내지는 형태의 발생)을 얘기해야 하는가’ 라고 할 수 있겠죠.

사실 우리는 신체에서 분리될 수 없는 존재이며, 신체가 사라지고 나면 정신 또한 없다는건 그냥 사실일 뿐입니다. 스피노자는 우리 안에 생기는 일체의 관념은 자신의 신체에 대한 관념일 뿐이라고 잘라 말합니다. 즉 우리의 마음 혹은 정신이라는 것의 대상은 자신의 신체일 뿐이라는 거고, 따라서 신체 없는 정신은 애초에 성립하지 않습니다. 불교에서도 마음은 신체의 감각기관을 통해 외부를 지각하는 것에서 시작되므로, 애초부터 불교적 사유는 신체와 정신을 일체로 보았습니다. 따라서 ‘마음 하나 잘 먹으면 된다’는 얘기는 마음을 움직일 수 있기까지의 온갖 신체적인 수행을 포함할 수밖에 없는 얘기라는 거죠. 생각해보면 동양의 사유 또한 신체와 마음을 분리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텍스트를 반드시 소리내어 읽고 쓰고 암기하는 방식으로 공부를 했던 모습만 보아도, 신체를 통과하지 않는 공부는 소용이 없다는 것을 이미 몸으로 알고 있었다는 얘기지요. 서양의 경우에도 고대 그리이스의 원자론자들만 해도 마음도 일종의 원자(물질)로 보았고 물질에서 정신을 분리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도 익히 알다시피 신체를 포함한 물질의 세계는 잠시도 쉬지 않고 끊임없이 변하고 요동치며 갈등과 고통의 원인이 되는 사건들을 만들어냅니다. 변화라는건 사실 말처럼 우아하기만 한 일이 아닌 듯합니다. 우주에 존재하는 그 수많은 것들이 제각각의 리듬과 속도에 따라 운동하고 있고(세포 하나하나조차도..), 더구나 모든 것이 하나의 그물로 엮이어서 미세한 움직임조차 서로에게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변화는 그 자체로 예측 불가능한 사건이고 잡음이며 끝없이 버그가 발생하는 과정 자체라는 것이 이해가 됩니다. 이게 물질로서의 우리 신체가 일상 속에서 실제로 경험하는 삶이라는 거겠죠. 문제는 이런 신체의 변화과정을 우리의 정신이 따라잡지 못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분명히 어떤 변화가 감지되긴 하는데 그 원인도 알 수 없고, 어떻게 대처해야 좋을지도 알 수 없고... 그럴 때 우리는 갈등과 고통, 그리고 슬픔을 느끼며 그 원인을 외부에 투사하거나 자신을 자책하게 마련인지라... 이 空으로서의 물질세계와 더불어 변화할 능력이 없는 인간은 ‘변하지 않는 것’ ‘영원한 것’ ‘안정된 것’으로서의 정신을 표상하여, 변하는 것으로서의 물질 혹은 신체의 우위에 두게 되었다는 것이 채운샘의 설명이셨습니다. 초월적인 神이나 변하지 않는 본질로서의 自我개념 또한 이런 연장선에서 표상되었을게 분명하지요.

아델만은 이처럼 물질로부터 이탈된 마음을 다시 자연에 돌려주고자 다윈의 ‘선택적 진화’와 자신의 ‘위상 생물학’을 통해 뇌의 구조를 밝히는데요, 엄청 심오한 얘기긴 하지만 위의 얘기와 관련해 요점만 정리해보자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다윈의 진화론을 흔히 ‘경쟁에서 승리하는 우수한 종이 선택된다’고 여기고 있지만 그건 명백한 오해라는 겁니다. 실제로 다윈이 주장했던 바는 자연은 ‘돌연변이’를 선택한다는 것이었고, 그 돌연변이란 ‘변화 속에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노이즈 내지는 버그를 기존의 방식(코드화된) 대로 반응적으로 처리하지 않고, 정면에서 돌파하는데서 생긴다는 거죠. 경쟁이 기존의 코드에 유능하게 부합하기 위한 것이라면, 돌연변이란 그 코드(양식과 공통감) 자체에 대한 거부라는 점에서 다윈은 참으로 엄청나게 오해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아델만의 위상학 역시 ’장소와 시간 즉 사건과 더불어 세포들의 운동(연결방식, 형태)이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점을 얘기하고 있는데요, 결론은 그래서 인간의 뇌는 결코 컴퓨터와는 같을 수 없으며, 아무리 컴퓨터가 진화한다고 해도 결코 인간이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이처럼 정보화되지 않은 것, 코드화되지 않은 것, 생명의 여백 (내지는 잉여)의 균열 사이에서 삐져나오는 소음과 잡음, 버그 같은 아포리아(난제)에 끌리는 존재일 수밖에 없으며, 그런 문제를 통해서만 사유하고 진화할 수 있는 존재인 반면에(예술, 철학을 포함한 문화라는게 그 산물이고), 컴퓨터는 코드화될수록(즉 노이즈와 버그를 없앨수록) 유능해지기 때문이라는 거죠. 만일 컴퓨터에게 인간과 같은 감정을 준다면? 완전히 기능을 상실하고 자폭하고 말리라는 게 쌤의 멋진 설명이셨습니다!^^ 그러니 알파고가 이겼다고 인간의 위기를 걱정할 필요는 전혀 없는 것이고, 문제는 오히려 컴퓨터를 닮은 인간형을 유능한 인간으로 인정하고 지향하는 세태의 공통감에 있는 것이 아닐까 싶네요! 쓸 데 없이 길어져서 죄송합니다! 꾸벅!

 

* 다음 주에는 다시 금강경(5~8)입니다. 공통과제 써오시면 되고 발제는 없습니다.

* 간식은 수정샘.

 
전체 3

  • 2016-03-22 13:07
    명쾌쌈박한 후기 캄사합니다. 최근 담론 생산자들 입에 오르내리는 걸로 알파고를 따라갈 게 없네요ㅎㅎ

  • 2016-03-23 04:29
    쓰고나니까, 노이즈 내지는 버그에 대한 '정면돌파'라는 말이 약간의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네여~
    글쎄, 제 능력으로는 그건 생명현상이 그 모든걸 포함하고 있다는 데 대한 절대 긍정에서 나올 수밖에 없는 어떤 것이지, 적대적인 싸움같은 건 아니라는 것 정도밖에는
    설명할 도리가 없지만서두...

  • 2016-03-23 18:30
    정말 흥미진진한데요. 자세한 후기, 현옥샘 고맙슴다~~^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