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콜콜

[비정규 알바생 “훈이의 일기”] 4화

작성자
김훈
작성일
2020-10-03 22:22
조회
230

규문의 최고령 인턴 4n세 훈샘이 내년 공부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지방 출장을 떠났습니다.
훈샘의 소소한 일상 이야기에서부터 비정규직 노동자로서의 삶, 훈 샘이 읽고 계신 책 이야기까지 다양한 썰들을 가볍게~ 풀어볼 예정입니다. 
무려 주 2회! 매주 수, 일 저녁 6시에 연재될 예정이니 애독을 부탁드립니다~




[비정규 알바생 “훈이의 일기”] 4화

2020년 10월 1일 목요일( 추석 전 아홉 대가리를 마치고 돌아와서)

_어제 읽은 문장

“우리는 취약한 생물이고 인간들은 바로 이 취약을 공유한다.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희망하고 사랑한다는 것은 취약함을 부정하기보다는 받아안는다는 뜻이다. 그리고 오로지 자신의 취약함을 완전히 인식하고 있을 때 또렷하게 분별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_한승태, <고기로 태어나서> 中

_몆 달전 읽은 문장

“온화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사물을 다정하게 가늠하고, 정신적인 이유를 찾아서 보고, 모든 인간적인 나약함을 잘 이해하는 일은 오직 고독한 시간의 괴로운 정적 속에서 방해받지 않고 생각에 잠겨본 사람만이 할 수 있다.”                                                       _헤르만 헤세, <헤르만 헤세, 여름> 中

오늘 새벽 잠결에서 불현듯 몇몇의 문장들이 떠올랐다. 심상찮은 그 문장들이 머리 속을 어지럽히더니 '인간의 나약함을 이해할 때 모든 것을 뚜렷이 볼 수 있다'라는 한 문장으로 응축됐다. 그리고 눈 감은 채로 깬 나는, 그 문장을 곱씹어 생각했다. 어제 읽은 책의 문장과 몇 달 전에 읽었던 문장이 겹쳐졌다. 내가 줄곧 생각해왔던 문제에 답을 무의식적으로 찾았던 것이다. 나는 상기(上氣)됐고, 내 주변 사람들의 처지가 담긴 이미지가 슬라이드 영사기처럼 스쳐 지나갔다. '왜 그런 처지에 있을 수밖에 없는지.' 지면에 솟아오른 단층처럼 이미지가 뚜렷이 다가왔다.

측량하러 온 6명의 알바와 2명의 직원은 모두 각자의 사연이 있다. 다들 삼십대 후반이거나 사십대였다. 이들이 여기까지 흘러들어왔다는 것은 그들의 처지가 녹록치만은 않다는 거였다. 그리고 이 영세한 측량회사의 사장님도 그들의 처지와 다를 바가 없었다. 내가 다른 알바생보다 이 점을 잘 이해 할 수 있는 것은 직원 두 명이 나의 친동생과 절친이고 이 회사의 사정에 대해 익히 들어왔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이어가기 전에 새벽에 불현듯 떠오른 문장들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인간의 나약함에 대한 고찰은 내 자신에 대한 이해로부터 시작되었다. 몇 년 전 태국에서 땡기열로 40도의 고열에 시달렸을 때와 히말라야 산간마을에서 설사병에 걸려 열흘간 아무것도 먹지 못 했을 때, 나 자신의 나약함에 대한 자각은 죽음에 대한 공포보다는 삶에 대한 회의를 느끼게 만들었다. 그 이후로 나는 '언제 죽을지 모르겠구나'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늙는 것과 때때로 잔병에 시달리는 자신으로 인해 그런 생각은 더욱 상기(想起)됐다. 간혹 고개를 숙여 제 신체의 피부와 힘줄 그리고 손가락의 움직임을 살피는 것도 그런 연유에서 비롯된 버릇이다. 자신의 몸에 대해 살피던 버릇은 타인의 몸도 살피게 만들었다. 겉으로 보이는 신체라는 것이 얼마나 나약한가. 누구나 늙고 병들며 죽는다. 그리고 자신의 신체를 둘러싸고 있는 '정신, 마음, 영혼'(이 세가지를 구별해 쓰기가 어려웠다)이라 불리는 것이 그 자신의 생리적 욕망과 외부의 환경에 얼마나 취약한가. 나는 한승태의 <고기로 태어나서>를 읽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닭, 돼지, 개의 열악한 사육환경을 고발하고 있는 듯싶지만, 그는 인간의 편의를 위해 사육되는 동물의 취약함이 인간 그 자신의 취약함과 다르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지구 밖 넓은 상공에서 굽어보면 인간도 지구상의 취약한 생물에 불과한 것이다. 내가 나 자신의 나약함으로부터 타인의 나약함을 이해하고 그들의 처지를 헤아려볼 수 있었다면, <고기로 태어나서>의 저자는 인간의 먹거리로 사육되는 동물들의 취약한 처지를 클로즈업해 들여다 봄으로써 그 동물들과 다르지 않은 저자 자신과 주변 사람들의 취약한 처지를 헤아린다.

내 팀의 신호수인 광수라는 동생이 있다. 나이가 서른 후반인데, 최근 연상인 아내가 생각지 못한 임신을 해 아이가 셋이 됐다며 쑥쓰러워했다. 팀원 중 다른 셋은 광수보다 나이가 많은 노총각들이었다. 다들 내심 부러웠을 듯싶다.

"애가 셋이면 먹고살기 힘들지 않아요?"

내가 물었다. (나는 아무리 나이가 어려도 말을 쉽게 놓지 못한다)

"아니요. 힘든 줄은 모르겠어요. 어차피 저는 이렇게 일 나오면 길게 몇 달씩 있으니까요."

"그럼 아내 분은?"

"간호사예요. 애들은 시골 할머니에게 가 있어요."

“아. 언제 결혼한 거예요? 아까 전화 통화하는거 들었는데. 와이프분이 애교도 있고 성격이 좋아보이더라구요.”

“결혼은 서른에 했어요. 두 번째 동거했을 때, 이 사람 놓치면 안 되겠다 싶어 임신시켰죠. 형님. 결혼하기 전 동거해보는 게 좋아요. 그래야 이 사람이 같이 살 수 있는 사람인가 알게 되거든요.”

광수는 예전에 측량회사에서 정직원으로 일해서 경력이 많은 덕에 신호수를 맡고 있다. 신호수는 기계수와 스타프(스타프 들고 걷는 알바를 줄여서 스타프라 부른다)가 멈춰서 측량할 수 있는 정확한 거리를 선점하고 차 사고가 나지 않도록 경계를 서는 일을 한다. 그리고 가벼운 배낭 하나만을 메고 걷기 때문에 가장 몸이 편하다. 그래서 매번 힘들게 스타프를 들고 걷는 다른 두 명의 스타프 형님들에게 미안한 말투로 발판이라도 대신 들어주겠다며 농담도 건네고 도로 가로수나 시골 집 담장 너머로 뻗는 가지들에 열린 간식거리? 대추, 감, 밤 등을 따가지고 먹으라며 건넨다.

광수는 평소 “아무 생각 없이 사는 게 최고예요.”라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그런 친구가 옆방에 형님들과 술 마시고 돌아와서는 대뜸 내 앞에 앉더니, 술 취한 어눌한 말투로..,

“형님. 민주주의하고 자본주의가 뭐가 달라요.”라고 물었다.

아마도 그의 이런 물음은 평소에 읽는 책이 뭐냐고 물어서 설명해주고 매번 술자리에 참석하지 않고, 카페가서 일기 써야 한다고 내뺐던 나의 모습에서 연유된 것 같다. 소파에 기대어 책을 읽던 나는 그의 혀 꼬부라진 질문에 당황스러웠다.

“왜 그런 걸 물어요?”

“아니, 형님 제가 학생운동 했거든요.”

“아. 그게 민주주의는 정치고 자본주의는 경제잖아요. 서로 연동하는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닌가요. 뭐가 다르다고 말할 수 있는게 아닌 거 같은데요.”

“형님. 그러면 미국은 민주주의인가요? 전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

그렇게 무논리에 맥락 없는 대화가 삼십분쯤 흘렀을 때,

“형님, 오늘 새벽에요. 김밥 집에서 아침 먹고 나올 때 이상해 보이는 아저씨 있었잖아요. 다들 차안에 있어서 몰랐을 건데, 그 아저씨 손에 피가 묻어있었거든요. 자꾸 뒷통수를 만지는 것이 거기에 피가 난거 같더라구요. 저희 차 앞에서 횡설수설하니까. 다들 차에서 비키라며, 빨리 출발하자고 그랬잖아요. 저.., 그 아저씨 신고해야 하나 고민했어요. 많이 다쳤을 수도 있잖아요. 그렇다고 신고하면 경찰서 가서 경위서도 써야하고, 그러면 오늘 우리팀 작업을 할 수 없게 돼서..,”

광수의 얼굴에서 진심으로 괴로워하는 표정을 읽을 수가 있었다. 그가 취중에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은 그 아저씨에 대한 미안함과 자신의 양심에 대한 괴로움이었을 것이다.

“광수씨. 누구나 그러한 상황이면 다 그랬을 거예요. 그리고 애매한 상황이었잖아요. 행색이 허름한데다가 횡설수설하는 것이 정상인은 아니었어요. 만약 누군가 차에 치여 있고 확실히 도와줘야 할 상황이었다면 우리 모두 그냥 지나치지는 않았을 거예요. 자책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누구나 완벽할 수 없어요.”

그렇게 위로의 말을 해주었지만 내 마음 또한 편치 않았다. 나는 차안에 있어 그 아저씨의 피 묻은 손을 보진 못했지만 그 아저씨가 심하게 다친 상황이었다면.., 하고 불편한 마음이 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아무 생각 없이 사는 게 최고’라던 그의 말과 달리 그는 아무 생각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누구보다도 생각이 많던 친구였다. 그 여린 마음을 다치지 않으려고 자신에게 주문을 거는 듯한 그의 말이 이제는 곧이곧대로 들리지만은 않을 것 같다.

앞으로 일기에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할 것 같다.

내가 광수에게 호감을 갖는 이유는 자신의 인간적인 나약함에도 불구하고 윤리적이고 주체적으로 살려고 하기 때문이다. 나는 인간 본연의 나약함을 넘으려는 그런 시도에 박수를 쳐주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미천한 나의 힘이 그런 이들에게 응원이 된다면 기꺼이 보태주고 싶다.
전체 4

  • 2020-10-05 21:08
    나라면 어떻게했을까, 글을 읽는저도 고민해보게 되네요~
    잘 읽고 있습니다. 훈샘~~~

    • 2020-10-06 19:58
      공감이 되는 부분이 있었다니, 아. 다행입니다. 아직 많이 미숙한 글쓰기인데도 다들 읽어줘서 힘내고 있습니다.^

  • 2020-10-06 21:28
    이 문장, 이 정서는 뭔가요? 너무 아름답네요! ^^ 역시 일주일에 글을 두 번이나 쓰셔서 그런가...
    돈도 벌고 글도 쓰고..와! 힘내세요^^

    • 2020-10-07 20:21
      부족하지만 글쓰기 훈련의 장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약간은 실험정신도 포함해서요. ㅎ 다들 읽어주시고 응원해주신 덕분에 꾸준히 쓸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