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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9 동사서독 공지

작성자
혜원
작성일
2017-04-24 20:03
조회
196
170429 동사서독 공지

푸코는 행위를 통해 앎을 구성한다고 했습니다. 내 몸과 의식에 새겨지는 만큼만 배우는 것이라고요. 의식만 갖고 있는 것은 사실 배운 것이라고 할 수 없지요. 각자가 주요하다고 생각하는 '안 풀리는 문제'가 있다면, 그것이 질문의 형태로 계속 맴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계속 같은 방식으로 질문을 하면서 '~해야겠다'는 다짐만 한다면 그건 매우 관념적이게 되어버립니다. 에세이의 끝이 다 다짐으로 끝나게 되는 허무함은 질문하는 방식을 바꾸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질문이 달라지면 이전의 질문 소게서 가졌던 고통들은 사라질 수 있는데, 계속해서 같은 질문을 하면서 정해진 답만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입니다. 미래에 대한 의지의 투사가 나를 바꾸지 못하는데도, 어느새 에세이 마지막에 다짐을 적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곤 합니다 ㅇ0ㅇ
장자는 無心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무심과 마주하면 일단 있는(有)마음을 상정하고 그것을 없애는(無)것을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럼 마음이 없다는 게 무엇인지? 라고 결국 똑같은 질문을 하게 됩니다. 마음이 없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럼 마음에 대해 생각을 해 봐야 합니다. 장자는 무심과 상반되게 成心을 말합니다. 이미 만들어진 마음이 있고, 그것을 우리는 내 마음이라고 붙잡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마음 자체가 고정되어 있지 않다면, 사실 이루어진 마음도 없을 것입니다. 항상 유동할 테니까요. 아무리 많이 배워도 안에 쌓이게 되면 無心이 아닌 것. 늘 내가 고민하는 문제가 더 이상 질문이 아니게 되어야 질문 하나를 넘어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니라면 그 질문 위에 배운 것들이 붙어서 그것들을 정당화하는 꼴이 될 테니까요. 각자가 집착하고 있는 것에 대해 정당화를 하다가 정말 중요한 生死에 대한 질문을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화두로 生死를 함께 준다고 합니다. 삶에 대해 통찰해야 곧 죽음에 대해서도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푸코는 말년에 통치성에 대해 계속 고민했다고 합니다. 통치성은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상호관계입니다. 피지배자는 자기 스스로를 양이자 '양떼'라고 생각합니다. 일단 관리 받는 양으로서의 내가 있고, 또 양떼를 이탈하면 죽는다는 생각을 가진 내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목자는 양을 관리하는 동시에 양떼를 관리합니다. 1. 개인을 규격화하고 (정상성의 내면화), 2. 나를 양떼의 무리로 여기도록 하는 것이 목자와 양으로 표상된 통치성입니다. 그런데 푸코가 주목한 것은 양은 길들여지는데, 그러나 모든 양이 길들여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는 어떻게 길들여지는데도 불구하고 길들여지지 않을까. 푸코가 붙잡은 것은 디오게네스였습니다. 어던 파도 만들지 않고 어떤 것에도 길들여지지 않은 자. 그의 근간에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문명과 제도에 대한 반감이 있었습니다.
장자는 주로 회의주의자 피론과 견유주의자 디오게네스에 비견되고는 하는데요, 채운쌤은 코드를 교란하는 디오게네스에 장자는 더 가깝다고 하십니다. 노자만 해도 道 속에서 어떻게 사람들을 다스릴지에 대한 고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장자>는 국가적인 다스림 문제가 거의 보이지 않는 텍스트입니다. 그의 힘은 국가가 만들어지면서 같이 형성되는 달아나는 힘이었죠.
우리가 이번에 많이들 집착한(^^) 서로 거품을 뿜어주는 물고기들에 대한 이야기는 문명에 대한 이야기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제도에 갇혀 인위적으로 살게 된 물고기는 본성대로 살 수 없습니다. 진흙탕에 정착한 그들은 이제 수도 없이 서로에게 간섭하는 제도를 만들어 살 수밖에 없는 것이죠. 장자는 이런 문명에 대한 반감을 놓지 않습니다. 본성은 생을 온전히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생은 최대한 오래 사는 문제와는 다릅니다. 설령 호수에서 더 큰 물고기에게 잡아먹히는 한이 있더라도 물고기는 어항보다는 호수에서 사는 것이 본성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본성이 뭘까요. 물고기는 물고기답게, 사람은 사람답게 사는 것?
문명 또한 온전히 생을 누릴 수 있게 해줍니다. 그런데 문명에는 대가가 따릅니다. 제도는 늘 무엇인가를 하기 전에 넘어가야 할 절차와 서류들이 한가득 있다고 하면서 자꾸 우리의 발목을 붙잡고 넘어지게 합니다. 장자는 이런 인간세계를 벗어나서 다른 곳으로 하자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장자> 안에는 어쨌든 여기서 살 수밖에 없다는 인식이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출발점은 늘 문명으로 인해 불구가 된 사람들입니다. 이런 불구자의 신세에서 우리는 어떻게 우리 자신을 보존할 것인가. 장자는 계속 이것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스승으로 삼는 것이 있는데, 바로 道입니다.
도는 곧 자연을 가리킵니다. 문명은 인위적인 코드를 만들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각인합니다. 장자는 그 코드를 그대로 따르지 않겠다고, 근본(宗)을 따르겠다고 합니다. 이미 정해져 있는 코드가 아니라 코드를 교란시켜서 사건을 해석할 수 있는 영역을 자꾸만 만드는 것입니다. 장자를 당시 정치에 대한 정치론으로 볼 수 있는 가능성은 여기에 있습니다. 국가적인 삶에 포섭되지 않는 존재들로 신선들, 혹은 예술가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본성대로 산다는 것은 갇혀 있지 않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본성을 통치하고 만들려고 하는 제도, 코드 안에서 살 수밖에 없지만 生을 보전하려면 거기서 나와야 한다는 것. 그런데 도주선을 그리는 방법은 또 그 안에서 모색할 수밖에 없습니다.

 
간식은 건화, 이응언니
29일은 예고한 대로 더 긴~ 강의가 있을 예정입니다.
[응제왕] 읽어 오시고요, 공통과제와 함께 에세이 프로포절 써 옵니다.
에세이를 쓰는 유형은 두 가지가 있겠는데요, 1. ~편을 중심으로 쓴다. 2. ~키워드를 중심으로 쓴다. 이렇게 두 가지입니다.

다음 시간에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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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4-25 09:22
    혜원씨 정리된 글귀를 따라 읽다보니, 강의 시간의 선생님 목소리가 떠오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