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사서독

  동사서독  &  동사서독 숙제방

5.6 동사서독 에세이 공지

작성자
혜원
작성일
2017-05-04 16:29
조회
212
170506 동사서독 에세이 공지

공지가 늦어서 죄송합니다ㅠㅠ 에세이는 잘 되어 가시나요~ 좀 많이 흐릿하지만 저번시간 후기 올립니다//

이번에는 <장자> 내편을 다 읽었는데요, 그런데도 장자가 생을 보전한다고 하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잘 와닿지는 않습니다. 장자는 무엇을 두고 삶을 보전한다고 했던 것일까요? 인간의 수명이 100세까지라고 두고 그것을 다 채우면 생을 보전할 수 있다고 말하는 걸까요? 순탄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채 목숨을 부지하고 있으면 되는 것이라고 한 걸까요? 장자는 생을 보전하는 것을 ‘근원’과 함께 말합니다. 자연, 德, 혹은 天과 같은 것을 기준으로 두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장자가 아무런 기준 없이, 무작위로 살아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 ‘근원’은 무엇일까요?
‘근원’의 반대는 장자가 成心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선입견이기도 하고 신념이기도 한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생각을 신념으로 만드는 것은 근원적인 삶에 반한다고 장자는 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장자가 보기에 백이숙제는 무왕의 고삐를 쥐었다고 봅니다. 자기가 쥐고 있는 禮가 유일하다고 생각하는 독선을 부린 것이죠. 만약 이렇게 생각한다면 백이숙제는 장자의 세계에서 원망하는 마음을 가지고 주나라로부터 등을 돌린 사람들이 됩니다. 백이숙제를 성인으로 보고, 또 仁을 추구하여 그것을 얻었기에 원망함도 없었다고 보는 공자와는 다른 관점이죠. 무왕이 무도하다고 보는 자기 기준을 끝내 포기하지 못한 백이숙제는 결국 원망하다가 수양산에서 굶어죽은 것입니다. 장자가 보기에는 자기 생을 보전한 것이 아니라 남의 명을 지키다가 죽은 것.
장자는 ‘옳은 것’이라는 것에 대한 문제제기를 멈추지 않습니다. 우리는 ‘무엇이’ 옳을까? 라고 묻습니다만, 장자는 그것이 곧 성심이라고 보는 것이죠. 채운쌤은 중심이 계속 이동하는 타원운동에 대해 말씀해주셨는데요, 중심이 계속 이동한다는 것은 외부와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존재는 자기가 텅 비어 있으면 존재를 이룰 수 없는데, 문제는 중심이 너무 꽉 외부의 힘을 끌어당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강력한 리더십은 아집이 없으면서도 텅 비어있지도 않습니다. 다만 주위와의 변용능력이 뛰어난 것이죠. 내가 멈추지 않고 돌 수 있는 것은 다른 힘들과 내 중심이 함께 영향을 주고받기 때문임을 아는 것. 그 중심을 도의 지도리라고 했습니다. 자기 것은 고집하지 않으면서 다른 모든 것은 회전시키는 중심.
이 변용이라는 것은 단지 외부의 영향을 받는다는 수동성은 아닙니다. 장자는 얼핏 수동적으로 있으라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따르라고 하고, 응하라고 하니까요. 하지만 이건 너무 어려운 능동성이기도 합니다. 이때 ‘따른다’는 것은 누가 앞서가고 있고 그것을 따르는 게 아닙니다. ‘응하면서 따르는’ 것입니다. 장자는 ‘順’의 속성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地를 꼽지요. 모든 것을 품어서 쓰레기는 분해시키고 씨앗은 발아시키는 것이 땅입니다. 모든 이질적인 것을 받아서 분해시키거나 키워내는 것은 이미 수동이자 능동성인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응함’이 나타나는 것은 무엇일까요? 모든 중심과 부차는 상대적인 것을 아는 것입니다. 아무리 소수라도 극우는 다수이고 극좌가 중심이 될 수도 있는 것이죠. 하지만 중심이 정해지면 그것이 곧 절대시되기 쉽습니다. 신념이 어느 순간이든 틀릴 수 있는 것을 전제하지 않으면 바로 혁명이라도 반동이 될 수 있는 것이죠. 장자를 좋아하던 루쉰이 가장 경계하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루쉰은 중심을 신념화하지 않으면서도 적과 싸울 수 있을지 고민했던 사람이니까요. 그 방법은? 계속해서 변화하는 흐름에 자기를 던지면서 응하는 것입니다. 계속 움직이면서 항상성을 유지하는 것. 중심과 주변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죠. 장자는 중심과 개체의 관계에 대한 문제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럼 우리 문제로 돌아오면, ‘나는 정말 다르게 살고 싶은가?’라는 질문이 필요합니다. 이 질문이 세계에 대한 다른 국면을 보여줍니다. 현재 누리고 있는 것을 다 누리며 거기에 플러스 알파만 하는 것은 탐욕인 것. 장자가 知에 대해 문제 삼는 것을 보며 우리는 우리가 공부한 것을 어떻게 쓰고 있는지를 돌아봐야 합니다. 공부한 것을 장신구로 쓰고 있지 않은지, 무기로 만드는 공부가 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말입니다.
<장자>는 정치론으로도 읽을 수 있는 텍스트입니다. 분명히 통치자가 있는데 그가 있다는 것을 모른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건 ‘자연이 덕이 있다’라고 하는 말과 연관지어야 할 것입니다. 자연은 다 주지만 준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장자는 “덕을 준칙으로 삼으라”고 합니다. 이건 유가의 정치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유가는 親親을 기반으로 정치를 사유하죠. 자기로부터의 확장성을 강조하기에 결국 자기가 사심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장자는 존재론적으로 근거가 다릅니다. 덕을 준칙으로 삼는다는 것. 장자는 그것을 “다리가 있는 존재와 걷다보니 언덕을 다 올랐다”고 말합니다. 통치자의 존립근거는 일단 ‘다리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다른 것이 함께 가기 때문에 ‘내’가 잘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죠.
태양은 베푸는 덕을 가지고 있습니다. 빛과 온기로 만물을 비추고 키웁니다. 하지만 다른 별들과의 운동이 없고서는 그런 덕을 베풀 수가 없습니다. 우주의 별들 중 하나라도 없어지면 태양의 ‘덕’은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독립된 존재만이 홀로 기능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장자는 있는데도 있다는 것을 모르는 통치자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럼 장자가 ‘서로 잊는다’라고 했던 것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관계의 협착성을 갖고 있어서는 끊임없이 어떤 존재를 의식하기만 해야 합니다. 불행이나 행으로 자기 존재감을 확인하려고 하면서 관계에 대한 협착성에 집착하면 결국 그 사람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장자가 ‘서로 잊는다’라고 할 때는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고착화 되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정치에 있어서는 당파성에 대한 비판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잃고 얻는 것에 목숨을 걸고 또 어떤 통치자가 나타날지 촉각을 곤두세웁니다. 이런 것은 장자 입장에서 보면 이미 정치가 좋은 상태가 아니라는 것의 반증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살면서 관계를 맺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장자가 말하는 어느 한곳에 머물면서도 협착 되지 않는 것, 그것은 단지 내가 좋아하는 관계만 맺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내가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인해 내가 살아있기도 하다는 것을 알고, 큰 흐름에서 보면 같다고 알게 되는 것이 장자가 말하는 정치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에세이 발표는 오전 10시에 시작합니다^^
에세이는 금요일에서 토요일로 넘어가는 오후 12시까지 게시판에 올려주세요
간식은 각자 조금씩~
저희 복사기가 많이 늙었습니다... 미리미리 와서 복사합시다~

 

에세이날 건강한 모습으로 만나요~
전체 1

  • 2017-05-04 17:03
    에세이발표는 밥 안 먹고 논스톱으로 하겠습니다. 허니 간식은두둑히! 끝까지 집중력을 잃지 않도록 숙면을 취하시고요, 에세이는 한번 올리면 끝입니다. 반드시 완성본으로 올리시길! 그럼 모두의 건투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