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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0 동사서독 공지

작성자
혜원
작성일
2017-05-11 16:07
조회
229
170520 동사서독 공지

5월 6일 토요일 <장자> 내편을 읽고 중간에세이를 발표했습니다. 총 10명이 발표했고 다들 피곤한 얼굴로 회와 매운탕과 마주했던 기억이 나네요. 시간이 좀 많이 지났지만^^;; 기억나는 것부터 더듬으며 에세이 발표 후기를 써 보겠습니다.
이번 에세이 발표는 ‘<장자>에 대한 오해와 진실’ 정도로 테마를 잡아볼 수 있을까요...? 계속 <장자>는 그런 텍스트가 아니라고 하면서도 매번 장자에 대한 기존의 표상에 사로잡히는 것 같아요.
처음 기억나는 것은 <장자>를 무하마드 알리의 발재간으로 비유하신 지현쌤의 에세이였는데요. 장자의 ‘逍遙遊’가 마치 링 위에서 쉴 새 없이 움직이며 상대방에게 틈을 만드는 무하마드 알리의 발재간과 닮은 것 같다고 하셨어요. 저는 알리가 누군지 정확히 몰랐는데, 링 위에서 계속 뛰면서 상대방의 정신을 쏙 빼놓는 전법을 쓴 복서라고 합니다. 소요유는 사실 온갖 경계를 넘나들기 위한 쉴 새 없는 발놀림을 닮은 것이라고 지현쌤은 보신 것입니다. 그런데 채운쌤은 이런 독해는 <장자>를 너무 자본주의적으로 읽는 것이라고 하셨어요. 복싱은 링 위에서 도망치지 못하고 서로 맞부딪히는 정직한 스포츠이면서 일종의 자본주의로 더 잘 비유 된다고요. 장자의 소요유를 쉴 새 없는 노력에 비한다면 그건 <장자>를 세상의 기준에 가두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것. 장자는 링 위에서 상대방의 틈을 노리며 열심히 움직이라고 하기보다는 그 링을 나오라고 하는 철학이니까요. 사실 장자의 이런 자유로운 이미지가 사실은 많은 노력을 동반하는 것이라고 해석하신 분도 많았고 또 <장자> 역시 그런 여지가 있는 텍스트인 것 같아요. 하지만 <장자> 자체가 갖는 독특함, <장자>를 통하지 않으면 말할 수 없는 경지가 무엇인지 계속 의식해야 할 것 같습니다.
장자는 링 밖으로 나오라고 했습니다. 곤이 붕이 되는 것처럼 존재의 변신을 꾀하죠. 하지만 그 세상 밖으로 나와서 소요하는 이미지에만 너무 빠지면 장자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기 어려운 것 같아요. 재원 언니가 쓴 에세이에서는 장자의 철학이 해적단의 모험(!)으로 비유되었는데요, 동료들과 우정을 나누는 것이라고요. 장자는 삶을 거꾸로 매달린 상태라고 여겼습니다. 그것은 꽃이 탁 떨어지듯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도 있지만 보통 삶의 비극성으로 읽기 쉽습니다. 재원언니는 후자의 의미를 따랐는데요, 만약 거꾸로 매달려 있는 상태에서 떨어진다면 그것은 천지가 뒤집어지는 충격이고 사실 달갑지 않은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죽음을 사실 반기지 못하는 이유는 이런 이유도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 불편할지언정 익숙한 것에서 나와 전혀 다른 세계로 진입하는 것이니까요. 뭐가 나올지 알 수 없는 곳으로 나는 진정 자연스럽게, 혹은 즐겁게 나아갈 수 있는가? 하고 생각해본다면 역시 선뜻 고개를 끄덕일 수 없을 것 같아요. 아무리 현재가 부담스럽고 싫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하지만 무작정 모험을 긍정하는 것은 너무 욕심이 많은 이미지라고도 할 수 있죠. <장자>는 온갖 제약이 있던, 혼란스러운 시기에 나온 텍스트였습니다. 풀려나 자유롭고 싶다는 것이 하고 싶은 것을 다 하겠다는 것과 등치될 수 없다는 것을 장자는 아주 잘 알았을 것 같습니다. 단지 제약을 감당하거나 벗어나겠다는 것으로는 아직 욕심만 앞서는 상태라고 할까^^;;
이응 언니는 <장자>에 나오는 성인이 어수룩하고 자기가 없는 모습이라는 것, 자기가 없는 듯 바보처럼 굴다가도 중요할 때 매력이 폭발(?)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는 에세이를 썼어요. 어떤 사물이든 자기주장이 강하지 않으면서 편하게 응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고요. <장자>를 읽다보면 가장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바로 불구자나 어수룩한 인물들이 성인으로 칭송받는 것이죠. 대체 사물에 응한다는 것은 무엇인지, 그것이 포기가 아닌 道의 체현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사실 지금도 잘 모르겠습니다. 확실한 것은 자기 원칙이 없는 사람은 매력적이기 보단 생각이 없어 보이고 원칙이 강한 사람은 편안해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럼 장자의 성인은 그 사이에 있는 것일까요? 자기가 어떠하든, 심지어 죽더라도 거기에 응하며 편안할 수 있는 사람이란 어떤 존재일까요.
현옥쌤은 이런 ‘장자의 사람들’이 자유를 적극적으로 구성하는 사람들이었다고 풀이하셨어요. 그들은 아무런 걱정 없이 발길 닿는 대로 가는 산책자들이 아니라는 거죠. 그러긴 커녕 곤이 붕이 되어 간신히 균형을 잡으며 견디는 모습은 너무나 치열할 수 있다는 것이죠. 조금이라도 균형을 놓치면 成心에 사로잡힐테니까요. 이 성심이라는 것도 이번 에세이 발표에서 주적(?)으로 많이 언급되었는데요, 성심이라는 것은 선입견, 분별심, 자기 신념이 절대적인 것이라고 믿는 아집 같은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런데 이런 성심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은? 어떤 것도 분별 짓지 않으면 되는 문제일까요? 인간은 자기 원칙이나 기준이 없으면 살 수 없습니다. 다만 여기서 주의할 것은 신념을 절대시 하지 말라는 것은 장자는 끊임없이 말하고 있습니다. 현옥쌤은 성심에서 벗어나는 자유란 그런 것을 만들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이 아니라 개념의 용법을 새로 발명하는 것이라고 하셨고요.
<장자>에서 인간은 사로잡는 성심은 ‘쓸모’로 표상되죠. 우리는 사물을 만날 때 그것이 어떤 쓸모가 있을지 부터 생각하니까요. 하지만 ‘쓸모’가 없어져야 한다고 장자가 말하지는 않습니다. <장자>에 나온 무수한 그 나무들은 ‘쓸모없음의 쓸모’를 발명해 내서 천수를 누렸으니까요. 완수쌤의 ‘쓸모’에 대한 에세이는 정말 ‘쓸모’에 관해서 모두 <장자>에서 찾아낸 것이었는데요. 저는 <장자>에 많은 나무가 나왔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까지 많은지는 몰랐습니다.
완수쌤은 철저한 독해 끝에 <장자>가 나무에서 인간으로, 목재에서 사람의 쓸모로 옮겨가며 점점 강도를 높여가며(!) ‘쓸모없음의 쓸모’에 대해 독자들을 설득하고 있다고 보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사실 ‘쓸모없음의 쓸모’는 ‘쓸모’의 피라미드 중에서도 하위층, 그러니까 블루오션(?), 쉽게 ‘쓸모없음의 쓸모’를 이룰 수 적기라고 보신 것입니다. 이건 처음의 자본주의적으로 <장자>를 읽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에서 <장자>적인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고민할 때 도출될 수 있는 결론 같아요. 채운쌤은 맑스가 말한 ‘적은 노동시간과 나머지 시간에 시를 쓰는 사람들’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지금 인간이 노동을 맡고 있는 것은 기계로 점점 대체되고 있는데 이때 인간은 그 ‘쓸모’의 바운더리에 들어가려고 아등바등하기보다는 비로소 ‘쓸모없음의 쓸모’를 길러야 하는 것이 자본주의에 사로잡히지 않으면서 장자적일 수 있는 전략이라고요.

에세이 발표가 끝나고 생각해보면, 늘 느끼는 것이지만 고전을 읽는 것은 정말 어려워요. 읽은 적은 없는데 전혀 모른다고도 할 수 없는 것이 고전이고, 어딘가에서 들어본 것이 이미지로 잡혀 있고, 또 막상 펴보면 굉장히 당연한 소리를 하고 있는 것 같거든요. 그런데 또 에세이 발표를 해보면 전혀 그런 게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철저한 독해가 없으면 고전을 새롭게 보는 것이 아니라 더 낡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13일은 채운쌤 출장 관계로 쉽니다.
다음 시간은 프랑수와 줄리앙의 <장자, 삶의 도를 묻다>
발제는 혜원, 건화
간식은 태욱쌤, 은남쌤

 

벌금!! 확인하시고 안 내신분들 자진 납세하시고 맑고 깨끗해집시다 ㅇ0ㅇ/

https://docs.google.com/spreadsheets/d/1RY1UskHLvrVABuE8n7Eoy8VbpcxzAS34jF-AMhBqmyE/edit?usp=sharing

 

다음 시간에 만나요~
전체 1

  • 2017-05-12 18:25
    바쁜 혜원씨가 빼먹지 않고 공지를 올리셨네요.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