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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동사서독 공지

작성자
김완수
작성일
2017-05-30 15:13
조회
194
창경궁로 규문에서의 첫 동사서독 수업입니다. 창문 밖으로 산이 보여 시원한 게 참 좋습니다.

장자 내편이 끝나고 외편이 시작되었습니다.

흔히 장자라고하면 내편을 일컫는 것이 보통입니다. 내편의 7편은 진짜 장자가 쓴 것이고 그 밖의 외편 15편, 잡편 11편은 장자 후학들이 쓴 것이라고 합니다. 내(內)가 뭔가 우리에게 가깝고 소중한 핵심적이라는 의미를 주는 것에 비해 외와 잡은 왠지 멀어서 덜 중요하고 내용도 순일하지 못해 정리가 잘 안 된다는 그런 느낌을 줍니다. 장자에 관한 책들도 내편에 대한 것이 대부분이고 외편, 잡편에 대해서는 내편만큼 심도 있게 해석되고 연구된 책들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내편에 비해 중요도는 떨어지고 참고할만한 책도 적어 공부하기도 힘든 편들을, 내편에 쏟았던 시간의 3배(다음 학기까지 포함하면)나 들여 공부할 필요가 과연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는데 말끔히 해소되었습니다. 동일인의 저작은 아니어도 어쨌든 장자라는 이름을 붙일 만큼의 내용들을 지닌 것은 분명하고 장자 연구자들이 외 잡편을 내용에 따라 많이들 분류하는 것처럼 특정 주제에 대한 논의가 심화된 것으로 보면 외잡편은 내편의 외연을 확장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내편이 장자가 직접 쓴 것이 맞느냐에 대해 확신할 방법도 없는데 예를 들어 강신주는 대종사의 한 구절을 들어 내편 장자 사상과 일관성이 없으므로 후학이 덧붙인 것이라고까지 주장합니다.

수업 중 이와 관련하여 과연 어디까지를 장자라고 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과 함께 어쩌면 장자는, 아니 우리의 실체는 다 뭐라고 규정할 수 없는 유령인지도 모른다는 화두와 함께 우리시대의 문제로 장자를 해석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강조가 있었습니다. 강신주의 주장에 대해 타당한지 여부를 많이들 과제에서 언급했는데 중요한 것은 맞고 그르고 보다는 강신주처럼 자신의 문제로 장자를 만나보는 것이며 그러면 논의 전개과정이 옳고 틀리건 간에 적어도 한 가지 이상은 쟁점이 분명하게 드러나게 된다고 합니다. 틀려도, 몰라도 확실히 그 틀리고 모르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것이죠. 곁들여 공부 이야기 가 나왔는데  공부를 하는 과정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공부에서 충만한 기쁨을 느끼는 것이랍니다. 배웠으니 그것을 삶에 적용해서 가족문제나 기타 인간관계에서 뭔가 배우기 전보다 더 나아진 인간관계를 바라는 그런 용도의 공부는 꿈꾸지 말라는 거죠. 공부가 힘들기만 하고 기쁨이 없다면 무슨 고행을 하는것도 아니니 오래 갈 수가 없을것 같습니다. 단 한 번만이라고 그 즐거움을 느끼면 될 것 같은데 언제나 그 때가 올른지요.

변무에서는 본성과 인의에 대한 언급이 많습니다. 1장에 나타나는 것처럼 장자는 변무에서도 내편에서와 같이 결코 균질한, 알기 쉽게 정리되는 문장을 구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변무가 좋다는 것인지 나쁘다는 것인지 하나로 정리된 상태로 알기를 원하는데 그런 구획된 분류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인간의 본성을 이렇게 낙관적으로 봐도 좋은가에 대해서는 적어도 인간의 본성이 인간사회를 유지하는데 나쁘게 작용하는 것이라면, 즉 남을 해치는 데에서 얻는 쾌감이 남을 도우는 데에서 느낀 즐거움보다 컸다면 인간이라는 종족이 멸종하지 않고 지금 여기까지 존속해 오기 힘들었을 거라는 하셨는데 여러 번 들은 말인데도 어쩌면 듣고는 이렇게 여러 번 까맣게 잊어버리는지... 그리고 장자는 인의가 필요 없다고 말한 적이 없고 쓸데없는, 잉여의 인의가 문제라고 합니다.

변무이야기에 들어가기 전에 인류의 미래(AI)와 더불어 자본주의에 관한 이야기가 많은 시간을 차지했습니다. 하나의 사실을 들어도 그것을 성심(成心) 없이 듣고 판단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인공지능과 관련된 2가지 예를 들어 말해봅니다,

먼저 하나는 알파고 이야기입니다. 저도 전에는 인공지능이 바둑에서 인간을 이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었습니다. 바둑의 경우가 수가 최대 10의 팔백 승 정도여서 이건 아무리 인공지능이 발달해도 감당할 수 있는 수가 아니니 적용 불가능한 영역이라고 믿었습니다. 인간이 무릎을 확실히 꿇고 나서야 그럼 인간은 그 엄청난 경우의 수를 어떻게 감당하는가 하는 의문이 들더군요. 그 수를 감당하지 못하는 것은 인공지능뿐만 아니라 인간 또한 마찬가지인데 인간의 지능, 경험, 직관력에 대한 근거 없는 턱없는 자부심 때문에 인공지능만큼 경우의 수를 읽지 못했던 인간 편에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이제 확실히 인간이 인공지능만 못하다는 것을 받아들이니 비로소 생각을 달리하게 됩니다. 목적이 있고 규칙이 있는 일은 얼마나 시간이 걸리느냐가 문제지 결국 인공지능의 승리일 듯싶습니다.

또 하나는 수업 중 나왔던 안젤리나 졸리의 유방 수술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건 벌써 몇 년 된 이야기인데 그 당시는 졸리를 건강염려증에 중독된 사람으로 여겼던 분위기였던 것으로 기억이 납니다. 단지 가능성만을 가지고 현재 멀쩡한 몸의 일부를 제거하는 사전조치는 좀 오버가 아닌가하는. 그 때 그렇게 수술하도록 권고한 의료진이 있었을 테고 그 충고를 받아들여 수술을 결심한 졸리가 있었을 것인데 서양의학에 대한 약간의 미덥지 못한 마음과 그렇게까지 죽음을 두려워하는 인간에 대한 탐욕에 대한 비난이 그 사건을 가십거리로만 여기게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성심으로 사건을 보았을 뿐 몸의 일부를 제거하는 수술을 받아들인 졸리를 이해하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진단시스템이 자신에 대한 오랜 기록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토대로 의료계의 인공지능이 당신은 비록 지금은 비록 멀쩡해 보여도 수술을 해야 한다고 단언한다면, 또인공지능이 내린 처방이 거의 예외 없이 맞는 것을 많이 보아왔다면, 수술은 옵션이 아니라 필수겠지요. 확실한 죽음이 바로 눈앞에 있고 그것을 약간의 희생을 통해 피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묻는다면 거기서 약간의 희생을 선택한 사람을 비난하기는 어렵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의료계의 인공지능은 장자 내편 응제왕에 인간의 앞날을 기가 막히게 알아맞히는 족집게 도사 계함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관상이나 사주 대신 머리카락 한 올이나 피 한 방울로 정확히 수명을 예측할 수 있게 되겠죠. 유발 하라리에 의하면 머지않아 불사의 인간, GMO 사피엔스가 만들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합니다. TV에서 법정에 나온 최순실 얼굴을 보면 저게 어떻게 65세의 얼굴일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한번 시술에 몇 천 만원씩 한다는 줄기세포 시술의 효과가 아니라면 화장이나 별다른 미용 시술을 할 수 없는 감옥에 육 개월 넘게 갇혀있는 할머니가 대체 무슨 수로 저런 안색을 유지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문제를 없앨 수는 없어도 아주 오랜 기간 연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질 수 있게 된다면 그런 시대에도 인간의 번뇌가 예전과 같을 것인가 하는 궁금증이 들었습니다.

변무는 잉여와 잉여가 아닌 것을 대비한 것으로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인간을 잉여의 세계로 밀어 넣습니다. 십계명과 오계면 충분했던 법이 여러 권의 두꺼운 책으로 분화되고 우리는 그런 촘촘해짐을 마치 발전인 양 여기게 됩니다. 자본주의는 우리가 심플하게 살려고 해도 그렇게 놔두질 않습니다. 그리고 그 방법이 엄청난 차이를 통해 욕망을 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미세한, 감지하기 어려운 차이를 미끼로 하지요. 신제품이 얼마나 기존의 제품과 미세하게 다른지를 힘주어 설명하고 결국 그 미세한 차이를 갖고 싶게 만듭니다. 어떤 오디오 마니아들에게는 턴테이블의 바늘재질이 백금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차이가 너무나 극명한 다른 소리를 들려주고 차체 가격의 수 배를 들여 엔진이나 부품을 튜닝 하는 카 마니아에게는 튜닝 전후의 엔진 소리와 승차감 차이가 일반 사람과 같을 수가 없지요.

변무에서 장자가 벌써 오래전에 잉여가 인간에게 주는 문제점을 제기했고 이러한 잉여의 부작용은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급속히 확대되어 이제 인간의 삶 자체가 잉여에 휘둘리는 삶과 그렇지 않고 주체를 갖고 사는 삶 두 가지로 그 구분이 확연해질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알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그저 노후자금을 모으는 것으로 목표로 산다면 우리는 기껏 노예가 되기 위한 준비에 온 힘을 다해 사는 성실한 특대형 개미가 될 뿐이라는 겁니다.

다음 시간은 이번시간에 이어 강신주 <장자의 철학> 2부 1장(149~222p)과 장자 9편인 외편 마제를 읽고 각각 내용에 대해 공통과제를 작성합니다. 강신주 책은 이렇게 조금씩(?)계속 읽어가며 내편의 기억을 꾸준히 되살리는 게 목적입니다. 발제는 따로 없습니다.

마제에 대한 암송 숙제 있고 간식은 반장쌤이 댓글로 알려준답니다.

두 분 쌤들 좋은 경과 있으셔서 어서 다시 뵙기 바라고 또 바쁜 회사일 어서 지나가길요~

 
전체 2

  • 2017-05-30 20:10
    야근 중입니다. 결재 기다리면서, 읽고 있습니다.
    교장 선생님 목소리처럼 담담하고 평온한 느낌의 글입니다.

  • 2017-05-30 21:04
    간식은 지현쌤과 완수쌤입니다^^ 제목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제가 언제 공지를 올렸나 하고 ㅎㅎ 공지에서 완수쌤의 목소리가 들려요~ 저도 외편이나 잡편은 어쩐지 덜 중요한 것 같고 내편만 집중해서 보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이번 수업에서 그런 생각이 사그라들었던 것 같아요. 촘촘하고 더 세밀하게 욕망을 세분화하면서 '쓸데없는' 잉여를 만들어내는 삶을 장자 외편에서는 육손이나 변무와 같은 것으로 잘 말해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