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사서독

  동사서독  &  동사서독 숙제방

6.10 동사서독 후기

작성자
하동
작성일
2017-06-11 17:26
조회
203

<<장자>> 10번째 편인 <거협>을 읽었습니다. 앞서 읽었던 <변무> <마제> 등과 더불어, ‘도가좌파’, ‘원시주의자’, ‘무군파’니 하는 계열들로 묶이는 작품이지요. 읽고 토론해 가다보니 어째서 학자들이 그런 거창한(?) 딱지들을 붙였는지 이해가 되는 것도 같습니다. <내편>에 등장하는 장자 선생님께서도 무색해할 정도로 강력한 문명 비판의 메시지를 드러내고 있는가 하면, 노자 선생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소박하고 원시적인 삶에 대한 지향을 보여주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반국가적인 아나키즘의 면모가 자연스럽게 배어나오고 있는 것이겠고요.


그런데, <거협> 편은 이전 편들에 비해 그 강도가 세게 다가와, 우리 조에서는 이 글이 ‘반문명 공동체 선언문’쯤으로 쓰여진 게 아니냐는 말들도 있었습니다. 역사적, 계보학적인 관점에서 문명의 역설과 그 폐해를 따져들어가는 그 날선 비판의 시선과 어조에서 결연한 전사의 모습이 엿보이는 게 분명합니다. 대신, 그들의 추구한 원시주의적인 삶의 모습을 두고는, 도대체 어떻게 해석하고 의미화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좀 막막해하긴 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과거의 이상 사회에 대한 향수나 회고라는 건, 여태껏 우리가 봐온 장자적인 비전이나 세계관과는 거리가 먼 것이 사실이니까요. 그리고, 그같은 복고주의가 단순한 과거 지향이 아닌, ‘좌파적’ 현실인식을 드러내는 효과적인 방식일 수도 있겠다는 얘기도 잠깐 나왔는데, (물론^^) 더 이어지지는 못했습니다.


그리고, 강신주 선생의 글을 두고는 많은 얘기를 나누지는 못했습니다만, 논의 과정이나 개념 등에 대해서 그대로 인정하기가 힘든 부분이 많다는 것이 대세였습니다. 모든 걸 ‘소통’의 문제로 환원해 버린다든지, ‘마음’을 유대와 무대의 상태로 이분화해서 접근하고 있는 것도 그렇고, 무엇보다 자기 체계에 충실하려다보니 개념들에 대한 해석이 자의적이지 않냐는 등의 말들이 있었습니다. ‘양행’이나 ‘견독’의 해석에 대해선, 채운 샘께서도 논리적인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지적을 하시기도 하셨더랬죠. 아카데믹한 글이 갖는 한계일 수도 있겠지만, 장자를 어떤 틀에 가두어 해석하는 게 그만큼 어려운 일이라는 하나의 방증일 수도 있겠습니다. 여튼, 다음 시간까지 다 읽고 나면 뭔가 전체를 두고, 논리적으로 반박을 하든 옹호를 하든, 뭐라 대응할 건덕지가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입니다.


채운 샘의 강의는, ‘소통’에 대한 얘기로 시작되었습니다. ‘소통’에 대한 담론들이 넘쳐나는 게 이 시대인데, ‘소통’이라는 게 과연 뭔지, 어떻게 하는 게 소통을 잘하는 것인지요. 우리는 상대방이 자기의 마음이나 생각을 고스란히 이해하고 받아줬으면 하는 전제 위에서 소통을 시도하고, 그게 잘 이루어졌을 때 소통에 성공했다고 생각한다는 겁니다. 허나, 이건 아무리 잘 봐줘야 자기애에 불과하다는 것이기에, 소통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겠지요. 자기 안의 ‘성심’을 완전히 내려놓고 갈 데까지 가보겠다는 마음을 내야 서로간에 ‘通’이 이루어질 텐데, 평상시에 우린 그걸 불편하게 여겨 미봉해버리기 때문에 번번히 실패하고 마는 게 아니겠냐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소통을 대화의 문제로만 바로보지 말고, 행동방식이나 존재의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하셨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소통의 문제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처지인 저로선 새길 만한 내용이었던 듯합니다.


<거협> 편에 대해선, ‘문명’이나 ‘제도’, ‘국가’의 문제와 그 안에서 우리개인들은 어떤 삶의 방식이나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에 대한 내용들이 주를 이뤘습니다. <거협> 편을 보면, 자기 것에 대한 소유를 공고히 하기 위해 유형, 무형의 것들을 재산화하는 과정에 다름 아니고 국가란 이를 보증하고, 나아가 지배를 용이케 하기 위해 온갖 도덕이나 법 제도, 가치 척도 등을 만들고 가동·유지시켜 온 것이라는, 문명과 국가의 공생적 관계에 대한 통찰이 살아 있습니다. 지금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전혀 녹슬지 않는 모습으로 말이죠. 확실히 인간은 문명을 통해 자신을 표현해 왔고, 그걸 통해 보호, 관리받으면서 살아가지만, 그것이 초래한 더 큰 문제들을 안고, 시달리며 살아가는 게 실상입니다. 온갖 기술 장치나 제도, 서비스 속에서 인간이 이전보다 더 큰 역량을 통해 자유와 행복감을 누리는 게 아니라, 외려 그것들에 얽매여 생명체 본연의 능동성이나 확장성을 펼치지 못하고 한없이 수동적이고 무기력한 모습으로, 마치 부품처럼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죠. 작금의 자본주의 문명이란, 이런 사태가 극에 달한 시점이라는 것이고요. 지독한 문명의 역설! 채운 샘께서는, 문명을 누리는 순간 당연히 감당해야 할 것이 있다는 분명히 알고, 정말 문명의 억압이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면, 분명 문명이 주는 이기에 대해서도 태도를 분명히 해야지, 둘 다 좋은 쪽으로만 누리려는 것만큼 큰 욕심은 없을 거라고 일침을 놓으셨죠. 얻는 것만큼 잃는 게 있다고 하는 지당한 자연 법칙을 인간의, 자신의 삶의 룰로 받아들이기란 왜 이렇게 어려운 일인지요.


<거협> 편의 독특함은, 성인과 도둑을 하나의 레벨에다 놓고 평가하고 있다는 점에 있지 않을까 싶네요. 성인이 인의도덕을 들고 나오는 즉시, 그 반대의 가치가 동시에 만들어지고, 또한 성인이 도덕을 통해 뭔가를 실현하려고 한다면, 도둑 또한 그걸 이용해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일이 당연히 생겨난다고 말합니다. 전 그 대목을 읽으면 폭소를 금할 수가 없었는데, 생각해 보면 이보다 더 냉정한 진리는 없는 듯합니다. 성인이든 도둑이든 각자 자기의 선악을 펼쳐가는 것이지, 애초부터 주어진 선과 악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은, 결국 선악의 문제를 권력 관계의 문제 속에서 사고하게 한다는 점에서 니체의 문제의식과도 닮아있다고 말씀하셨네요.


이처럼 장자의 사유는 보편적인 가치체계에 대한 예리한 비판과 결연한 저항, 나아가 그것들을 해체시키고 무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지금의 우리에게도 뜨겁게 읽힐 수 있는 텍스트라고 생각합니다. 그 무너진 폐허 위에서 어디로 가야할지에 대한 답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니만큼, 다음 스텝은 채운 샘 말씀대로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할 것 같고요. 개인적으로, 그동안 <외편>을 읽으면서 <내편>에 비해 살짝 얕잡아 본 면이 있었는데, 외려 더 강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현재화할 수 있어야겠다고 맘먹었던 수업이었습니다. 몇몇 인상적인 말씀들이 더 있었는데, 그건 반장님께서 공지 글에 담아주실리라 생각하고 마무리합니다. 최근 하루치기로 사는 인생이라, 바로 하지 않으면 못하게 될까봐 서둘러 올립니다. 담주에 뵈옵지요^^.

전체 2

  • 2017-06-11 20:22
    이렇게 일찍 올리실 거면서 그렇게 바쁘다고 고개를 저으셨다니 ㅇ0ㅇ 하동쌤의 자세한 후기를 든든한 뒷배로 삼아 간단하게 공지 올리겠습니다^^

  • 2017-06-12 11:23
    빠르고 꼼꼼한 후기 멋지십니다! / 하도 반복해서 듣다 보니 이 말이 저 말 같고, 밍숭맹숭 읽히는 감이 없지 않지만 그래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매번 '뜨겁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그리고 외편이 내편에 비해 모자른 것이 아니라 외편대로 음미할 수 있는 맛이 숨겨져 있었네요! 다음 주가 기대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