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n

12.14. 수업 공지

작성자
수경
작성일
2015-12-10 15:13
조회
482
<이세간품>을 읽었습니다.
이세간은 한자로 하면 離世間, 토론 시간에 出이 아니라 離를 쓴다는 게 의미심장하다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아마도 '떠난다'는 의미와 '붙는다/ 붙인다'는 의미가 함께 있는 한자라 그런 것 아니겠느냐고 완수쌤이 말씀하셨죠.
이날 강의에서 채운쌤게서 설명하신 보살행, 보살심이 이와 무관하지 않은 듯합니다.
떠나지만 떠나지 않은 존재, 보살은 그런 존재일 겁니다.
세간이 공한 줄 알면서 중생과 함께 여전히 세간에 머뭅니다.
번뇌와 고통이 어디서 오는지 알지만 번뇌 없는 세상을 바라지 않으며 선정에 머물러 있길 고집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보살은 중생과 다르지 않습니다. 보살은 세간에서 중생이 겪는 모든 것을 함께 겪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그들이 맞닥뜨릴 온갖 마군들에 대한 질문, 또 경계의 말이 이세간품에 한참 이어지지요.

하지만 여전히 보살이라는 이 단어가 주는 거리감이 있는 분들에게는 채운쌤의 이런 설명이 도움이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보살은 질문을 가지고 사는 존재랍니다.
무명을 헤매는 중생과 다르게 자기 삶에 대해 질문을 가지고 사는 자. (음,, 그렇다면 공부를 하는 우리들 역시 어설프나마 보살을 향한 길 위에 있다고 믿어도 ^^;)
그러므로 이들이 중생과 차원이 달라 번뇌도 없고 감정도 없이 사는 게 결코 아니라는 거죠.
다만 다른 게 있다면 있다면 같은 번뇌라 해도 그것을 어떻게 겪어내는가에서 드러난답니다.
무지하고... 그래서 가여운 중생은 자기가 만든 상에 끄달려 멋대로 기대하고 집착하다가 슬픔과 좌절을 맛보고 거기서 헤어나오지 못합니다.
우리는 멋대로 자기 욕망을 투사해 대상을 바라보고 예측하지만 대개의 경우 일은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지요.(된다는 보장이 이 우주 어디에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좋고 싫은 것도 요란하고 기대도 요란하고 그 결과에 대한 반응도 요란한 게 우리들입니다.
이와 달리 보살의 번뇌는 아주 고요하리라고, 번뇌를 겪긴 겪되 이를 고요하고 편안하게 겪을 수 있는 게 보살이리라는 이야기가 인상적이었습니다.

하지만 똑같이 몸을 받아 태어나 몸에 따라 감정을 생산하는 인간이건만 어째서 누구는 요란하게 살고 누구는 고요하게 살다 고요하게 죽는 걸까요?
대체 둘 간의 차이는 어디 있는 걸까요?

삼장법사(현장)나 혜초 같은 승려들의 이미지가 있겠군요.
개인적으로 경전을 위해 맨몸으로 사막을 횡단한 승려들의 이미지가 수업중에 강렬하게 각인되었습니다.
비유가 아니라 삶이 곧 사막입니다.
매일 아침 기어이 몸을 일으켜 걷는 것, 표지도 없고 매번 바뀌는 사구들 사이에서 한 걸음씩 떼는 것 말고 인간이 할 수 있는 게 뭐가 더 있을까요.
경전을 얻기 위해서라고는 해도 실은 가망 없고 기대할 수도 없는 일 아닙니까.
모래에 반쯤 파묻힌 수많은 해골들이 보여주는 게 그거잖아요.
그러니까 이때 그들을 움직이게 하는 건 경전을 반드시 얻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나 희망 따위가 아닙니다.
그런 기대로는 결코 사막을 무사히 횡단할 수 없겠지요.
그런 자에게는 얼마나 많은 유혹(=마군)과 그에 따른 요란한 감정의 술렁임이 있겠습니까.
결코 도착할 수도 얻을 수도 없겠으나 그럼에도 간다는 것, 그렇게 움직이는 것 말고 이 삶에 유다른 뭔가가 있지 않다는 것, 그게 목숨 건 승려들이 도달하게 될 깨달음입니다.
그러니 사막을 건너는 인간이 만나게 될 것은 경전에 적힌 부처의 설법이 아니라 그 같은 깨달음을 체득하는 것이라고 봐도 되겠습니다.
그저 할 뿐, 바라지 않고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할 뿐, 기대 없이, 집착함 없이.

중생과 더불어 세간에 머무는 보살의 모습이 이와 같습니다.
'나'라는 상('아상') 없이 또 '중생'이라는 상('중생상)'도 없이 중생을 만나고, 무언가 했다는 생각 없이 그들에게 줄 수 있는 걸 주어야 합니다.
호의를 베풀었다가도 상대방이 내 기대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면 재빨리 마음을 접어버리는 우리와 다르게, 보살은 그래서 계속 보시할 수 있답니다.
상 없이, 기대 없이, 집착 없이, 그러므로 실망과 분노와 슬픔에 걷잡을 수 없이 잠식되지 않은 채로 멈춤 없이 주고 더불어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보살에게는 중생이 자신의 보살이 될 겁니다.
보살로 하여금 매순간 깨어 있게 하는 존재, 깨달음을 저 깊은 무의식 차원으로까지 실어가게 하는 존재, 오래된 습을 버리게 하는 존재(이제야 비로소 '습기 제거'라고 하면 하마가 아니라 보살행이 연상될 것 같아요^^;)는 나와 비슷한 사람이 아니라 바로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타자니까요.

매번 기대 때문에 살고 기대가 무너져 죽을 것 같은 우리에게 화엄경이 또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네요.
집에서 혼자 읽을 때는 또 같은 소리네, 싶다가도 모여서 함께 읽고 이야기하다 보면 새록새록 새겨지는 말들이 많습니다.
이게 정말로 내 앎이 될 때까지, 우리 모두 정진 -_-

일단 다음 주는 다시 <에티카>죠. 에티카 4부+<스피노자의 철학- 3장>(들뢰즈) 읽어오시고 공통과제(주제가 '공동체 윤리'에 대한 것이었단 거, 기억하시죠?) 써오시는 걸로.
기대 없이, 상 없이, 우리는 그저 지금 할 수 있는 한 읽고 쓸 뿐!

간식은... 만두쌤...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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