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n

12.21 수업공지

작성자
수경
작성일
2015-12-17 18:20
조회
533
에티카 4부를 함께 읽었습니다.
스피노자의 국가론('국가이성' 출현 시기의 산물, 동시에 공포를 주요 도구로 했다는 비판적 해석 함축)이라든가 자유인(이성의 인도에 따라 사는 자, 고립이 아니라 고독을 택한 삶) 등 재미있는 이야기가 아주 많았는데요.
그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것 두 개를 꼽자면 하나는 개를 향한 만두쌤의 마음(-_- 뭐라고 간략하게 말해야 할지...), 다른 하나는 '받지 않는 마음'이 곧 관용이 되는 기묘한 경우에 대한 것이었어요.

숙제방에서 보셨지요? 지난 주던가 지지난주에 만두쌤이 웬 강아지 사진 한 장을 올리셨죠.
수업 시간에 이야기가 참 분분했는데, 추위에 떨고 있는 강아지에게 마음이 움직이고 먹을 것을 주고 싶어하는 마음이 스피노자가 말하는 그 연민 - 타인의 불행에서 생기는 슬픔(3부 정리 22 주석),  슬픔에 관계된 감정의 모방(3부 정리 27 주석)이 맞는가 하는 문제를 둘러싼 것이었죠.
다들 즉각적으로 그건 뭔가 좀 이상하다는 반응들을 보였는데(^^;)누군가 얼어죽어갈 때 그냥 지나가야 한다는 거냐는 거였죠.
니체의 방식으로 말하면 연민이란 타자를 동일화하고 그로부터 권력 느낌을 맛보는 것인데, 개에 대해 즉각적으로 일어나는 이 마음이 그런 것이라고 말해도 되는가 하는.
채운쌤은 그건 감정이나 생각이기 이전에 즉각적이고 본능적인 반응이 아닐까 하셨습니다.
자신의 본성과 더 많이 일치하는 존재에 대해 일어나는 마음이라는 거죠.
가령 죽어가는 거미에 대해 일어나는 마음과 강아지에 대해 일어나는 마음이 다를 수 있다면, 그건 이 때문이라고.
이로부터 스피노자가 말하는 관계에 대해 좀 더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4부 공리에서 말하듯 하나의 개물은 자연 안에서 무수한 개물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고, 그것에 의해 한정되고 파괴됩니다.
그런데 정리 29에서 말하길 "자체의 본성이 우리의 본성과 전혀 다른 개물은 우리의 활동능력을 촉진할 수도 억제할 수도 없"답니다.
이어서 쓰길 만약 절대적으로 공통점을 갖지 않는 어떤 게 있다면 우리에게 선도 악도 될 수 없다고 하는데, 아마 이 말은 그런 객관적인 대상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이 아니라 그런 존재가 만약 있다면 그건 아예 내가 그 존재를 인식할 수 없는 것, 내가 그로부터 반응을 일으킬 수조차 없는 것이라는 의미 같습니다.
속성 자체가 상이한 존재가 저 머나먼 행성 어딘가 있다면, 혹은 내 책상 옆에 숨겨진 다른 차원의 세계에 있다면 그럴 수 있겠죠.
세계 안에서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존재라면 어떤 방식, 어떤 수준으로든 우리의 활동 능력을 촉진하거나 억제하리라 생각됩니다.
그런데 정리 29 주석에서 말하길 촉진이 곧 선, 좋음이며, 억제가 악, 나쁨이라는군요.
지난 번 읽은 <스피노자의 철학>에서 들뢰즈가 스피노자 철학에서는 절대적이고 도덕적인 선악은 없되 존재론적 차원에서 관계의 해체를 곧 악/나쁨으로 규정할 수 있다는 말을 이 맥락에서 이해할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
우리 역량의 촉진이란 가령 강아지를 먹을 수 있어서, 강아지가 내게 재롱을 떨어서 등등 내가 표상하는 것에 한정되는 게 결코 아닌 한에서 우리의 역량은 다른 모든 것에 대해 그렇듯 강아지에 의해 촉진될 수 있습니다.
나와 일치하는 본성을 지닌 사물, 즉 강아지에 의해 내 신체가 변용되고 그에 대해 관념을 일으키는 한에서 우리는 강아지와의 그 관계가 해체되는 것을 즉각적으로 슬픔으로 간주할 수도 있겠다 싶어요.
한 번 내가 인식하기 시작한 대상에 대해 내 손으로 그 관계를 해체하려 할 때 우리가 머뭇거려지는 건 그러므로 당연할 수 있겠다는.
만두쌤은 강아지가 나와 아무 상관도 없는데 왜 나는 그런 감정에 휘둘리는가를 고민하셨지만, 신 안에서, 우주 안에서 강아지와 만두쌤이 이미 그렇게 만나버렸는데 어째서 아무 상관도 없을까요 ㅋㅋ
분명 상관이 있다고 어딘가에서 느끼기 때문에 그게 찝찝함이든 뭐든 마음이 남는 게 아닐까 싶은.

아무튼 이 만두쌤과 개 이야기로 글쎄 수업시간의 상당 부분이 흘러갔습니다.....만 재미있었네요 ㅎㅎ

다음으로 관용의 문제.
4부 끝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미움을 사랑으로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기쁘게 그리고 확신을 가지고서 대응하며, 많은 사람에 대해서도 한 사람을 대하듯이 의연히 대항하고, 운명의 도움을 거의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에게 정복된 사람들은 기꺼이 그를 따르는데, 그것은 힘의 결핍 때문이 아니라 힘의 증대 때문이다.”
전에 화엄경인지 아함경인지에서도 한 번 들었던 이야기인데 새삼 그 인상이 강렬해 다시 한 번 정리해두고 싶습니다.
채운쌤에 따르면 여기서 하는 말은 '정서의 모방'을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랍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는, 이를 갈면서 마음 속으로 시뮬레이션 해볼 때야 시원통쾌할는지 몰라도 실상 해보면 몸도 마음도 한없이 무거워집니다.
그리고 대개는 다시 상대편에서 이를 받아치면서 악순환이 시작되지요.
게다가 복수의 논리상 동등한 양이 아니라 거기에 '플러스 알파'가 있어야 한다고 우리는 생각하니 문제는 아주 심각해지지요.
상대편이 무심코 던진 말 한 마디, 찰나의 눈빛에 괜히 마음이 쓰여 무서워지다가 자신도 모르게 비슷한 것을 되쏘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요.
이게 오해에 오해를 부르다 결국 매순간의 공기를 냉각시켜버리고 맙니다.
그러니 우리의 과제는 내가 감각한 정서를 모방하지 않도록 스스로를 훈련시키는 것.
상대방의 정서에 따라 일희일비하지 말기, 상대방이 욕을 하고 나를 미워해도 그것을 내가 안 받아줌으로써 상대방이 한 그 일을 없애버리기(즉 상대방의 업을 소멸해주기).
이를 위해 필요한 게 '용기'라고 하는군요. 관용은 용기로부터 나온다고.
음... 비슷한 이야기를 요즘 한창 인기리에 방영중인 <응답하라 1988>에서 들었습니다.
한 에피소드가 끝날 무렵 대략 이런 내용의 나래이션이 흘러나와 가슴을 후려쳤습니다.
가장 힘이 센 자는 자존심을 버린 자다, 자존심을 버릴 수 있을 때 우리는 가장 강해진다...
한낱 자존심 때문에 자기 세상을 온통 미움과 욕으로 가득 채울 수는 없다고, 그날 밤(재방송이 새벽 1시더군요;) 생각했더랬습니다.

지난 학기에도 느꼈던 거지만 신기하게도 에티카를 읽을 때는 확실히 불교를 떠올리고 불교 공부를 할 때는 에티카의 구절을 떠올립니다.
처음에 화엄경과 에티카를 시작할 때는 정말이지 눈앞이 캄캄했는데, 이젠 그 말들이 주는 강렬함을 온몸으로(까진 아닌지도;) 만끽할 수 있어 기쁩니다.
에세이가 걱정이긴 하지만, 암튼 그렇네요 ^^

자, 다음 주부터 3주간은 화엄경 기간입니다.
에티카 5부는 화엄경 마지막 날, 그러니까 내년 1월 4일에  화엄경과 함께 봅니다.
그럼 모두들 한 주 동안 부처와 함께 보배로운 시간 보내소서~

간식은 은하쌤께 부탁드립니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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