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12.21 절차탁마 후기

작성자
혜원
작성일
2016-12-25 19:14
조회
305
161221 절차탁마 후기

 

 

<천개의 고원>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노마드를 그저 옮겨 다니는 것으로 단순하게 봐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유목민은 궤도를 지키는 자들, 그러니까 어쩌면 가장 자리를 지키고 있는 자들로 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유목민은 위험을 피해서 옮겨 다니지 않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가장 위협이 되는 사막이나 건조한 스텝을 떠나는 것이 상책일 테니까요. 오히려 정주민들이야말로 위험을 떠나 옮겨 다니는 자들로 볼 수 있습니다. 유목민은 자기가 겪는 문제가 없는 곳을 꿈꾸지 않습니다. 문제를 만나면 그 문제와 더불어 자기 역량을 변화시키는 자가 유목민인 것입니다. 반면 정주민은 위험을 피해서, 도피할 공간을 찾고 급기야 도피할 공간인 온실을 만듭니다. 그게 도시이고요. 이반 일리치는 근대인들이 함께 살아가는 기술을 잃은 자들이라고 규정합니다. 도시인들은 집에 정주하지 않고 수납된다고요. 그리고 또한 정주의 기술을 잃었기에 수납을 원하기까지 한다고 말합니다. 위험을 마주하기보다는 그렇게 수납되는 형식으로 문제를 회피하는 자들, 그것이 문명인인 것입니다.

이 스스로 원하는 ‘수납’을 이번에 배운 국가장치의 ‘포획’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들뢰즈/가타리는 국가를 ‘포획장치’라는 개념으로 규정합니다. 그러면서 13장 앞에 새 덫 그림을 삽입합니다. 새들이 먹이를 찾아 기웃거리다가 광주리 영역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그러면 광주리는 툭 떨어져서 새를 사로잡고 새는 자기가 포획된 줄도 모르고 먹이를 먹는 거죠. 포획장치의 특징은 바로 이런 새덫처럼 스스로 자기가 잡히도록 하는 장치입니다. 스스로 포획하는 장치. 그래서 들뢰즈/가타리는 ‘마법적’이라는 말을 합니다. 국가는 사람들을 마법적으로 포획하고 또 한편으로 법, 협정, 계약과도 같은 합리적인 수단으로 결연을 맺게 합니다. 그리고 국가의 외부성으로 전쟁기계가 있습니다. 전쟁기계는 국가 외부에 있으며, 나무적인 국가와 달리 리좀적인 존재입니다. 즉 국가가 사람들을 묶는다면 전사는 묶음을 풀고 또 국가가 합리적인 계약을 맺는다면 전사는 계약에 항의하는 자입니다. 흐름을 통제하는, 수렴하는 거대한 장치로서의 국가, 그리고 국가와 다른 메커니즘으로 움직이는 전쟁기계. 이 둘은 서로 대립하기보단 서로를 전제하며 존재합니다. 들뢰즈/가타리가 클라스트르이 原국가 개념을 인용하면서 보여주는 것은 국가와 원시사회가 서로 反하는 것이 아니라 그 두 가지 개념이 서로를 전제하는 개념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클라스트르는 원시사회에서 국가로 발전한다는 진화론에 반대하며 원시사회는 늘 국가의 출현을 막는 메커니즘이 존재했다고 말합니다. 다만 클라스트르의 문제는 원시사회를 반국가로 간주해 그걸 너무 이상화했다는 데 있습니다. 들뢰즈/가타리에게 국가는 진화의 산물도 아니며 원시사회가 국가보다 더 근본적인 사회구성체인 것도 아닙니다. 원시사회는 국가가 현실화되지 않을 정도로 국가에 저항하는 힘이 더 강했던 것일 뿐입니다.

국가는 성숙한 채로 일거에 출현합니다. 그리고 비축을 전유하는 거대기계입니다. 생산물의 잉여를, 그러니까 富를 독점적으로 전유하고 그 다음에 분배하는 것이 국가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토지를 영토화하고 노동을 도구화하고 화폐를 교환가치로 환원해 지대, 이윤, 세금을 발생하도록 합니다. 그런데 또 들뢰즈/가타리는 비축 자체가 잉여가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잉여가 생겼으므로 국가가 그것을 독점해서 다시 분배하는 식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고요 그들이 항상 말하는 것은 배치의 선차성입니다. 특정한 배치 속에서 비축은 잉여를 생산해 냅니다. 그런데 이런 국가를 사유하는 것은 그동안 우리가 배워왔던 진화론적 국가, 그러니까 원시사회에서 생산수단이 발달하여 잉여가 생기고 집단이 생기고 그것이 점점 커져서 국가가 된다는 것과 어떻게 다른 걸까요?

맑시즘의 진화론적 국가는 유럽의 경우 들어맞는 이론이었습니다. 유럽에서는 생산양식이 전반적으로 자본주의를 향하는 것처럼 발전해 갔습니다. 그러니까 생산력의 증가가 생산양식을 만들어내고 그것이 국가를 설립을 추동하고 자본주의가 발달되는 끝에 노동자 혁명이 일어나는 것은 역사적으로 맞는 말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론이 들어맞지 않는 곳이 있었으니 바로 동양, 그중에서도 중국입니다. 자본주의가 발달하여 공동체가 해체되는 흐름이 동양에서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동양은 전제군주에게 복종함으로써 공동체가 견고해지는 사례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봐야 하는 것은 그래도 있을지 모르는 동양의 자본주의 맹아가 아니라 동시대에도 다양한 생산양식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들뢰즈/가타리는 사회구성체가 기계적 과정에 의한 배치라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배치에서는 무엇이 현실화되고 현실화되지 않았는가를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요. 중심화하려는 힘과 외부의 힘 그 두 가지 힘들간의 관계 속에서 포획이 일어나고 또 혁명도 잠재하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배치를 변화시키는 것은 늘 외부와의 관계. 그 역동적 관계 속에서 배치는 늘 변화합니다. 그래서 들뢰즈/가타리는 우발성의 역사를 말합니다. 역사란 조건이고, 또 조건은 우발적이라고요.

포획장치의 완성은 마법이라고 들뢰즈/가타리는 말합니다. 포획되면서도 포획된다는 사실을 잊기 때문에요. 그리고 마법적 포획의 치밀함은 포획자를 포획한다는 사실입니다. 상위/하위가 나뉘어져서 상위가 하위를 착취하는 게 아니라 상위 계급마저 포획한다는 것이 이 마법의 완성인 것.

근대 국가는 여러 중심들을 공명시키는 것으로 작동합니다. 촘촘한 그물망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여러 중심들이 하나의 소리로 울리도록 하는 공명상자인 것입니다. 이런 근대국가를 전제하지 않는 자본주의는 없다고 합니다. 자본주의는 영토의 한계를 계속 넘어서는 자본의 흐름인데 그 흐름은 외부를 없애는 게 아니라 내부와 외부를 경계 짓는 방식으로 나타난다고요. 자본주의화 되지 않은 것이 자본주의의 경계를 만듭니다. 그리고 자본주의는 포획되지 않은 분자적 운동을 수용하고 또 탈코드화하는 흐름을 끊임없이 재코드화하여 자신의 에너지로 전유합니다. 즉 자본주의에게 외부는 위협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돌파구, 기회인 것.

이 자본주의 자체는 파시즘적 체제로 볼 수도 있습니다. 파시즘이란 국가가 하나의 소리로 공명을 요구하기 전 대중 스스로 상호작용하고 전염시키는 분자적 흐름을 말합니다. 자본주의가 ‘부의 추구’라는 단일한 욕망으로 홈을 패서 수렴하면 욕망은 새로운 네트워킹을 하지 못하고 고착되는 것입니다. 접속이 본질인 욕망이 흐르지 못하면 어딘가에 고착되고 그렇게 한 가지에 붙들리면 국면을 돌파하고자 하는 에너지는 발휘되지 못하고 죽음을 욕망하는 방향으로 흐르게 됩니다. 지젝은 자본주의란 그저 견디게만 하는 체제라고 말합니다. 힘을 사용하지 않고, 생명을 갉아먹을 뿐인 파시즘 체제가 자본주의인 것.

그럼 들뢰즈/가타리에게 자본주의 이후는 있는가. 채운쌤은 ‘글쎄’라고 합니다=_= 분명 맑스에게는 자본주의 이후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들뢰즈/가타리가 주목하는 것은 소수성의 문제입니다. 분자적인 운동, 되기, 기관없는 신체, 도주선, 유연한 절편성. 우리가 계속 <천개의 고원>을 읽으며 들어왔던 무리화 않은, 소수성의 개념들 말입니다. 소수자 문제는 우리도 다수자가 되게 해달라는 요구가 아닙니다. 소수성이란 셀 수 없는 것입니다. 공리계가 허용하지 못하는 것, “자기 문제는 본인들이 정식화할 것을 요구”하는 것 따위 말입니다. 포획할 수 없는 것, “불가산 집합들과 관련된 문제들에 대한 평가와 개념형성”이 공리계에 저항하는 중요한 문제라고 들뢰즈/가타리는 말합니다.
전체 2

  • 2016-12-27 13:14
    소수성... 많은 고원의 결론이지만... 적극적으로 해석하지 않으면 너무나 공허한...ㅠㅠ 벌써 마지막인데 전 여전히 모호하네요.

  • 2016-12-27 22:09
    상위 계급마저 포획하는 것이 자본주의라.... 돈이 많고 적음이 아니라 모두의 욕망이 돈의 흐름을 따라가게 만드는 것을 지적하는 것 같네요. 그리고 결론에 이르러서는 소수성의 문제인데 그것은 또 니체의 강자와도 접속이 가능한 것 같습니다. 수가 많고 적음 보다는 사회의 가치, 자본주의 욕망으로 포획할 수 없기 때문에 항상 다수가 아닐 수밖에 없는 점을 말하는 것일까요? 흠.... 느낌만 한 가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