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4학기 쫑!

작성자
수경
작성일
2016-12-30 20:07
조회
334

여느 때보다 길었던 4학기, 드디어 종강했습니다~ 다들 애쓰셨어요. 세미나를 함께 해온 분들도, 저녁마다 수업에 참석해주신 분들도, 그리고 채운쌤도 ^^


수업이 늦어져 따로 뒷풀이를 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잔치에 버금가는 간식을 준비해놓고 여유로운 기분으로 마지막 수업을 들었던 것 같네요.
그런데... <고원>은 마지막까지 멋진 말 천지군요. 모쪼록 이걸 자기 식으로 소화할 수 있어야 할 텐데요.
수업이 끝났지만 에세이가 남았단 사실, 잊지 않으셨겠죠? 매 고원들이 들뢰즈+가타리 사유의 변주인 만큼 한 고원을 택해 정리하심 된다고, 채운 쌤께서 전에 말씀하셨었지요. 모두 파이팅입니다.


지난 수요일에는 열세 번째 고원에서 등장한 '포획' 개념(첫 등장은 아닙니다만)을 조금 더 살펴본 뒤, 마지막인 열네 번째 고원을 함께 읽었습니다.
사실 이 정도 시간동안 한 권의 책을 읽다보면 마지막에는 완벽한 이해까지는 아니어도 대략 반복되는 말들에 익숙해지기 마련이죠.
열네 번째 고원에 등장한 ‘매끈한 공간’과 ‘홈 패인 공간’이라는 묘한 말도, 그리고 그 말을 둘러싼 설명들도, 처음 이 책을 펼친 뒤 당혹감을 불러일으킨 수많은 문장과 단어들에 비하면 아주 양반이죠.
대략 느낌으로라도 이제 아실 거예요. 홈 패인 것은 하나의 척도에 의해 등질화된 것, 매끈한 것은 패인 홈을 벗어나기 위해 속도를 창출할 때 만들어지는 것. 고로 매끈한 것이 보다 큰 강(렬)도를 갖는데, 단 여기서 강렬도란 흔히 생각하는, 외부에 가하는 힘으로서의 강도가 아니라는 것이 앞서 몇 번 설명된 바 있죠.
<앙띠>에서 이는 ‘내공’이라는 단어로 번역되어 있는데, 채운 쌤께서 강도란 곧 유연성과 상통한다 설명하셨던 것도 이와 연관되는 듯합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시 현실적인 것과 잠재적인 것의 관계로 돌아가야 할 듯해요.
아마 <의미의 논리>에서 주로 이야기되었던 것 같은데, 발생된 모든 개체는 그렇게 현실화되기 위해 잠재적인 것과 관계 맺어야 하고, 사실상 존재하는 모든 개체는 현실화된 것과 잠재적인 것과의 관계를 표현하는 것이라고 했었지요.
그러니까, 내가 지금 이렇게 존재하는 것, 그것은 나를 둘러싼 수많은 힘들의 관계에서 결과한 것. 들뢰즈는 이를 현실적인 것과 잠재적인 것의 공존, 수많은 의미들이 동시적으로 공존하는 무의미의 장… 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니체는 ‘자기’라는 신체를 가로지르는 수많은 힘들의 전쟁 상태라고 했고요.
그리고 붓다는 이를 인연조건이라고 표현합니다. 내가 지금 이 순간 이렇게 현상된 것은 수많은 인연조건들이 서로를 설립케 한 결과라고요.
하지만 붓다처럼 세계의 법칙, 즉 空을 깨닫지 못한 범부들은 단지 현재 지각되는 것을 바탕으로 지금 이 상태를 이해하고 절대시합니다.
나는 나로서 있고, 너는 너로서 있고, 세계는 이렇게 있다. 이러저러한 건 선한 것이고, 그 반대는 악한 것이고, 너는 나의 적이거나 혹은 친구다…….
불교에서는 이와 같이 세계와 자신을 실체화하는 것이 인간의 고통의 원인이 된다고 말합니다.


채운 쌤께서 붓다를, 홈 패인 공간에서 자신의 속도로 매끄러운 공간을 만드는 자라고 하신 이유가 이 지점에서 설명될 수 있지요.
채운 쌤에 따르면 붓다는 일시적 결과로서 출현한 개체에서 그치지 않고 그것의 발생 조건까지 내려가 통찰한 인물입니다.
말하자면 현실적인 것과 잠재적인 것 사이의 관계, 그것이 개체 발생의 조건임을 알아 다만 현상된 것을 가지고 가치와 사유, 감정을 고착시키지 않는 것.
이를 ‘맺히지 않음’이라고 설명하셨던 게 절묘했던 것 같아요. 聖人은 맺히지 않고 매이지 않는다지요. 점으로 사유하지 않고 흐름[線] 에 들어가는 게 성인이라고.
점, 즉 我相을 버림으로써 세계와 사물, 사건에 대한 일체의 분별이 사라지니 세계가 원래 그대로의 모습으로, 즉 매끄러운 모습으로 존재하게 됩니다. 그러니 자유롭고 가볍게 세계에 머물게 될 수밖에요.
이것이야말로 유연한 삶, 강도로서 존재하는 삶이라는 게 채운 쌤의 설명이었습니다.


여기서 오해하면 안 될 것은, 매끄러운 공간과 홈 패인 공간이 서로 구분되는 것이야 맞지만 둘 사이의 어느 하나가 독점적으로 한 공간을 점유하는 사태는 불가능하다는 것, 또한 매끄러운 공간이 더 좋고 홈 패인 공간이 나쁘다는 식의 가치판단이 무책임하고 안일한 것일 수 있다는 것!
이는 열네 번째 고원에서 저자들이 몇 번이고 강조한 것이기도 한데, 이를 세 번째 고원에서 말한 질료들의 흐름으로서의 알, 그리고 그와 동시적으로 존재하는 성층화와 유비적인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리토르넬로 장에서도 확인했듯 카오스모스에서는 흐름과 영토화과 동시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잠재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이 언제나 함께 있지요. 의미는 늘 의미화되지 않은 것들과 함께, 코드화는 언제나 미처 코드화되지 않고 흘러넘치는 것과 함께.
다만 여기서 관건은, 매번 홈이 패이고 지층이 만들어지는 이 세계 안에서 그것에 포획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선을 그리며, 고유한 속도를 만들어내면서, 유목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
거기에 실패할 때, 한때 혁명적이었던 실험과 시도와 그룹들의 욕망이 고착될 때, 파시즘이라는 응고물이 생기기 마련임을 이 책을 읽으며 계속 상기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자, 그래서. 그래서 저자들은 사유를 촉구합니다. 아카데믹한 학문적 태도, 정비된 회로 안을 안전하게 돌아다니는 담론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되묻고 공격해 무너뜨리는 직관적 사유를.
바로 그게 유목이라는 멋진 말이 그래서 열네 번째 고원에 나왔지요.
유목, 그것은 여기서 저기로 정처 없이 떠도는 게 아니라, 우발적으로 처하기 마련인 상이한 조건들 속에서마다 그와 더불어 변용되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처절하고 철저한 질문과 사유, 그게 곧 존재의 유연함을 방증하는 것. 그게 곧 유목민적 삶의 태도라는 것~!!


자, <고원>이 끝나고 이제 두 주 후면 마지막 5학기 시작되는 것 다들 아시죠?
이번에는 철학과 사유의 이미지 자체를 묻고, 그 연결선상에서 문학 및 예술을 사유합니다. 다음 학기에도 멋지게, 처절하게, 철저하게 깨지고 넘어져봅시다.


다시 한 번, 한 학기 수고하셨어요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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