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12.28 후기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7-01-01 19:27
조회
365
마지막 수업이 끝났습니다. 이제 에세이만 남겨두고 있는데요… <천개의 고원>만은 잘 마무리하고 싶은 마음이네요

우선 우리가 읽지 않은 15고원 <결론 : 구체적인 규칙들과 추상적인 기계들>을 조금 살펴봤습니다. (잠깐 봤지만) 15고원에서 저자들은 우리가 <천개의 고원>을 읽는 동안 너무 자주 들어서 익숙해져 있지만, 정작 설명해 보려고 하면 머뭇거리게 되는 개념들을 다시 짚어주는 것 같았습니다.

우선 탈영토화. 중요한 것은 항상 영토와 탈영토화, 재영토화가 동시에 작동한다는 점입니다. 영토에는 이미 탈영토화의 벡터가 존재하고, 탈영토화는 항상 재영토화를 동반합니다. ("영토 자체는 내부에서 탈영토화를 작동시키는 탈영토화의 벡터들과 분리될 수 없다", "D는 자신과 상관관계에 있는 재영토화들과 분리될 수 없다.") 채운쌤은 탈영토화된 흐름이 재영토화 될 때에 결코 원래의 영토로 환원되는 일은 없다고 하셨습니다. 영토, 탈영토화, 재영토화의 운동은 언뜻 순환적인 것으로 보일지라도 결코 같은 것을 재생산하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아무튼 이것들은 동시적인 운동 속에서만 이해될 수 있습니다. 운동과 별개로 이것들 각각을 이미 주어진 것으로 범주화할 수 없죠. 탈영토화라는 말이 주는 이미지는 대지로부터 떠나가는 어떤 것인데, 들뢰즈·가타리는 오히려 탈영토화가 "대지의 창조"라고 이야기합니다. 물론 이때의 대지는 천상과 같은 초월적 외부를 허용하지 않는 전체로서의 대지를 뜻하는 것이겠죠.

저자들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절대적 탈영토화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항상 재영토화를 동반하는 상대적 탈영토화와 질적으로 다른 절대적 탈영토화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절대’란 어떤 초월적이거나 신비한 것을 지칭하는 건 아닙니다. 이것은 외부의 척도를 필요로하는 상대적 탈영토화와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겠죠. 채운쌤은 이것이 하나의 기관 없는 신체를 만들어내는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자들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어떤 운동이 절대적인 때는 운동의 양과 속도가 어떻든 다양하다고 여겨진 하나의몸체를 매끈한 공간에 관련시킬 때인데, 이때 이 몸체는 이 공간을 소용돌이치는 방식으로 차지한다. 어떤 운동이 상대적인 때는 운동의 양과 속도가 어떻든 <하나>로 여겨진 몸체를 홈이 패인 공간에 관련시킬 때인데, 이때 몸체는 이 공간 안에서 자리를 바꾸고 또 적어도 잠재적인 것이긴 하지만 아무튼 직선에 따라 이 공간을 측정한다.”(천개의 고원, 969p)

채운쌤은 생생불식生生不息하는 우주의 운동을 따르는 인간, 화化한 존재(깨달은 자?)가 바로 탈영토화의 이미지일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자들이 절대적 탈영토화가 질적으로 다를 뿐, 초월적이거나 신비로운 것이 아니라고 말한 것처럼, 우주의 운동을 따르는 化한 존재 역시 현실 바깥에 있는 초월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오히려 이런 사람들을 상대적으로 표상화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상대적 척도의 꼭대기에 있는, 그러한 상대적 척도의 표준으로 이미지화하는 것이죠. 그렇지만 채운쌤은 이런 化한 존재는 오히려 그러한 척도가 부재하는 매끈한 공간을 주파하는 자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중요한 것은 절대적 탈영토화가 항상 상대적 탈영토화를 통과한다는 점입니다. 채운쌤은 절대적 탈영토화가 깨달음이라면 상대적 탈영토화는 수련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죠. 측정할 수 있는 특정한 양의 수련이 쌓이면 그 결과로 깨달음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수련의 과정과 무관한 깨달음도 없을 것입니다.

14번째 고원의 이야기로 들어가 볼까요. 채운쌤은 매끈한 공간과 홈 패인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사유의 이미지에 대해 이야기 하셨습니다. 미셸 세르에 따르면 속도는 “어디든지 지나가는 것”입니다. 홈 패인 곳을 따라 가는 게 아니라 매끈한 공간을 열어 놓으며, 그곳을 주파하는 것이야말로 사고라는 뜻이겠죠. 그런 점에서 사고의 속도는 변신의 문제와 관련됩니다. 어리석음은 두뇌 회전의 느림, 즉 상대적 척도의 문제가 아닙니다. 어리석음은 어디든 지나가지 못하는, 척도 안에 있는 뻔한 사고들과 뻔한 말들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유가 시작되는 것은 이러한 척도를 넘어갈 때입니다.

그러니까 사유는 자신의 전제가 깨질 때 시작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채운쌤은 그런 점에서 철학은 진리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진리의 이미지를 깨는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철학은 주어진 개념을 갈고 닦는 일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히 새로운 무언가를 창조하는 일도 아닙니다. 철학은 주어진 언어와 개념을 상대하되, 그것을 완전히 다르게 살도록 하는 일입니다. 개념에, 언어에 다른 뉘앙스를 부여하는 것. 이렇게 언어에 다른 뉘앙스를 부여하는 것, 언어를 다르게 살도록 하는 것은 곧 하나의 도주선을 그리는 일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런 도주선을 그리게 되는 순간은 사고가 제 기능을 가장 원활하게 수행할 때가 아니라, 주저하고 방황할 때라는 것이 채운쌤의 설명이었습니다. 도주는 a를 버리고 b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a를 떠나 b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a와 b라는 전제 자체를 깨는 순간에 일어납니다. 전혀 다른 방식으로 문제제기하고 문제화할 때에 가능해지는 것이죠. 자신의 전제가 깨지는 것은 많은 경우 고통을 동반하고 슬픔을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고통과 슬픔에도 불구하고 자기 전제가 깨지는 것은 그 자체로 유쾌한 일이 아닐까요? 채운쌤은 자유란 전제를 깨고 문제를 다르게 구성할 수 있는 역량과 다른 게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4번째 고원의 제목은 <매끈한 것과 홈 패인 것>이었죠. 들뢰즈·가타리는 14번째 고원에서 매끈한 것과 홈 패인 것이라는 또 다른 대립쌍을 통해 사유를 펼쳐내고 있습니다. 홈 패인 공간에는 국가장치가 관련되고 매끈한 공간에는 전쟁기계가 해당됩니다. 채운쌤은 “홈 패인 공간은 계량적, 외연적, 위계적 공간을, 매끈한 공간은 유목적, 강도적, 비정향적 공간을 뜻한다”고 설명하셨습니다. 홈 패인 공간의 예로는 학교, 감옥, 군대를 매끈한 공간으로는 바다나 사막을 예로 드셨습니다. 그렇지만 14고원에서 제시되는 여러 모델 중 특히 바다모델을 보면, 우리는 홈 패인 공간과 매끈한 공간이 각각 별개의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매끈한 공간에는 항상 홈이 파이게 마련이고, 홈 패인 공간은 끊임없이 매끈한 공간으로 되돌려 보내집니다.

매끈한 것과 홈 패인 것은 특정한 공간들에 배속되는 것이 아니라, 공간, 사유, 삶, 물질 등 모든 방면에 적용될 수 있습니다. 이 부분에서 앞서 채운쌤이 사유의 이미지에 대해 이야기하신 것이 연결되는데요,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앎에도 매끈한 것과 홈 패인 것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들뢰즈·가타리는 왕립과학과 유목과학, 국가적 지식과 유목적 지식을 대립시킵니다. 왕립과학이 분과와 과목을 나누고 기존의 기준과 척도 안에서 작용하는 지식이라면 유목과학은 그러한 틀을 무화시키는 문제를 던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채운쌤은 문제는 답의 안정성에 있는 게 아니라 질문의 절실함에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들뢰즈·가타리가 홈 패인 것과 매끈한 것 사이에서 매끈한 것을 선택하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들뢰즈·가타리는 홈 패인 것과 매끈한 것의 몇 가지 모델들을 제시하는데, 저는 홈 패인 공간과 매끈한 공간, 국가장치와 전쟁기계의 대립이 흐릿해져버리는 자본주의에 대한 저자들의 분석이 가장 흥미로웠습니다. <천개의 고원>의 거의 모든 고원이 두 개념의 대립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러한 개념쌍을 제시하는 것이 그러한 대립쌍이 무화되는 차원, 즉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을 목표로하고 있다는 점이 항상 놀라운 것 같습니다. 자본주의는 홈 파기의 극한에서 매끈한 공간을 열어버립니다. 자본주의는 우선 활동과 시간에 홈을 파는 방식으로 작동했습니다. 이전의 자유로운 활동에 노동과 여가라는 구분을 적용하고 노동을 ‘노동력’으로 계량화함으로써 작용하는 것이죠. 그런데 자본주의는 그러한 홈 파기의 극한에 갈수록 홈 파기와 무관해집니다. 자본주의는 더 이상 노동하는 자에게만 작동하지 않고 노동하지 않는 아이, 구직자, TV시청자에게서 잉여를 채취하기에 이릅니다. 자본은 이제 노동자의 직접적인 생산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전체로서의 유동하는 장으로부터 잉여를 획득하는 것이죠. 그리고 자본은 이제 더 이상 국가의 테두리 안에서 움직이지 않으며 세계 자본주의라는 매끈한 공간을 구축합니다.

사실 우리는 신자유주의가 열어놓은 매끈한 공간 위에 있습니다. 신자유주의는 우리에게 견고한 지반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일상적인 난민상태라고도 할 수 있겠죠. 그런데 문제는 자본주의가 이러한 상태로부터 잉여를 획득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지반이 유동적이 될수록 자본과의 관계에 더욱 강하게 종속됩니다. 믿을 것은 가족과 돈 뿐인 거죠. 이러한 상황 속에서 들뢰즈·가타리는 우리에게 신중하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유동적인 것과 고정된 것을 항상 함께 가지고 가라고. 채운쌤은 가족 안에서는 불가능한 유동적이고 느슨한 관계들을 계속해서 만들어가는 것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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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1-01 20:51
    마지막 후기, 기다리고 있었지^^ ... 나도 이번 천개의 고원만은 잘 마무리하고 싶은데... 또다시 실패하더라도 절대절대 두려워하지 않기로!!

  • 2017-01-03 01:33
    영토 얘기는 생물의 진화랑 엄청 비슷한 것 같기도....? 생물도 어떤 상태로 머물러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어떤 상태로 고착하지 않고 계속 다른 것으로 변이하죠! 그리고 A 상태의 동물이 물에서 나와서 B 상태가 되고 , B 상태의 동물이 다시 물로 돌아간다고 A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C 상태로 변하는 것!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변이가 단순히 특정 상황에 맞게 특정 부위만 변하는 게 아니라 그때그때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변이라는 블라블라블라~~ 홈 패인 것이랑 매끈한 것은..... 어렵군요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