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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월요일: 푸코의 철학 (2) 7강 후기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7-07-10 09:58
조회
182
1984년, 푸코는 정확히 200년 전에 발표된 칸트의 글 〈계몽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제목의 강연을 합니다. 칸트와 푸코, 어쩐지 막연히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라는 생각도 듭니다(현대철학을 어설프게 접하고 나면 플라톤, 데카르트, 칸트 등 형이상학적 전통 속에 있는 주류 철학자들에 대한 쓸데없는 편견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푸코가 칸트로부터 발견한 것은 유한성에 대한 자각이라고 합니다. 칸트는 계몽을 “인간이 아무 권위에도 이성을 종속시키지 않고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순간”으로 규정하는데, 이때 이성을 종속시키지 않기 위해서 요청되는 것이 바로 사유의 조건에 대한 사유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이성은 이성이 종속되어 있는 어떤 조건을 사유하고 그것을 비판해야하는 임무를 부여받은 거죠. 칸트는 목사직을 수행하면서도 교리를 자유롭게 사용하고, 세금을 내면서도 세금 제도를 비판할 수 있는 상태를 이성의 종속되지 않은 사용의 예로 제시합니다. 칸트의 유한성에 대한 자각 속에서 ‘대상’인 동시에 ‘주체’인, 다시 말해 조건 속에 놓여있는 동시에 조건을 사유하는 존재인 인간이 탄생합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푸코는 칸트에게 현대철학의 맨 앞자리를 내어줍니다.

푸코는 계몽에 대한 칸트의 정의를 빌려와 모더니티를 사유합니다. 칸트에게 계몽이 비판이라는 능동적 과정을 내포하고 있던 것과 마찬가지로, 푸코가 정의하는 모더니티는 시기와 관련된 개념이 아니라 태도와 관련된 개념입니다. 그리고 태도로서의 근대성을 규정하는 과정에서 푸코가 주목한 인물이 바로 보들레르였습니다. 보들레르에 따르면 모더니티는 순간적이고, 유동적이고, 우연적이며, 무상한 것입니다. “모든 견고한 것들은 공기 속으로 녹아 없어진다”고 했던 맑스도 이와 비슷한 인식을 공유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보들레르가 규정하는 모더니티는 단순히 이러한 운동에 끌려다니는 허무주의와는 무관합니다. 보들레르는 “흘러가는 시간에 대해 일정한 태도를 취하는 것, 다시 말하면 지금 이 순간을 넘어서거나 다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안에 내재하는 영원한 그 무엇을 포착하려는 의도적이고 힘겨운 노력”이야말로 ‘근대성’을 보장한다고 믿었습니다. 태도로서의 근대성. 보들레르는 ‘콩스탕탱 기(Constantin Guys)’를 이러한 근대성에 부합하는, ‘진정한 현대생활의 화가’로서 발견합니다.

[caption id="" align="aligncenter" width="652"]5962d12d799648752591.jpeg (콩스탕탱 기의 작품입니다. '현재를 영웅화하려는 의지'가 느껴지시는지?)[/caption]

푸코에 따르면 보들레르가 콩스탕탱 기를 현대생활의 화가로 여기는 이유는, 기가 “현실에 극단적으로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그 세계를 “변형”시킨다는 데 있습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이러한 변형 작용이 ‘현실에 극단적으로 주의를 기울이는’ 과정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리라 생각됩니다. 유동적이고 무상한 현실을 부정하고 폐기해버리는 자는 오히려 그러한 유동성과 무상성에 일부로서 끌려다니게 될 것입니다. 칸트는 이성의 종속되지 않은 사용(계몽)을 위해서 이성이 놓인 유한성에 대한 비판의 과정이 필요하다고 했죠. 마찬가지로 보들레르의 모더니티는, 현실을 파괴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포착하려는 노력을 수반하는 일종의 “훈련”입니다. 그런점에서 보들레르가 말하는 모더니티는 먹고 마시고 사랑하고 우정을 나누는 그 무수한 관계들에 대한 사유 없이는 자유의 영역을 구성할 수 없음을 시사합니다. 푸코에 따르면 보들레르의 현대성은 “현실성을 존중하면서도 그것을 뒤흔들어버리는 자유의 실천”입니다.

저는, 조금 뜬금없지만 오래전에 읽었던 『죽음의 도시, 생명의 거리』라는 책이 떠올랐습니다. 뉴욕에서 거주하며 일하고 있는 책의 저자는 도시를 영속적인 구조(고정체)가 아닌, 계속해서 만들어지고 있는 것(운동체)으로 볼 것을 제안합니다.  이때 저자는 '도시라는 현실'에 '극단적으로 주의를 기울일 것'을 제안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을 통해 저자 코소는 도시 안에서 벌어지는 젠트리피케이션의 문제와 9.11 이후 엄격해진 국가와 보안사회의 관리, 그리고 이와 동시에 진행되는 블록 내부의 등질화의 경향들을 분석하는 한편 동시에 언제나 상존하는, 그러한 경향으로부터 빠져나가는 운동들을 주목합니다. 보들레르가 모더니티를 말하며 우리에게 요구한 태도가 바로 이런 것은 아니었을까요? 채운샘은 A.I의 발달을 유토피아의 도래로 보는 관점과 인간의 삶을 해치게 될 것으로 보는 관점 모두가 현실에 대한 사유를 방기하는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그리고 알파고 시대의 바둑두기란 무엇일지 고민하고 있다는 이세돌에 대한 찬양이 이어졌었죠^^).

칸트가 말하는 비판으로서의 계몽, 그리고 보들레르가 말하는 태도로서의 근대에 대한 사유를 거치는 과정에서 푸코가 제기하는 질문은 조건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어떻게 생산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채운샘은 이것이야말로 모든 시대가 인간에게 요구하는 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보들레르의 모더니티 개념에 이러한 질문에 대해 제공하는 것은 ‘미학’이라는 관점입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윤리의 문제는 국가나 사회의 보편적 도덕과의 관계에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들에게 윤리와 철학은 자신의 삶을 예술의 대상으로 만들기 위한 과정이었던 것이죠. 이러한 관점에서 푸코는 현대사회에서 예술이란 “개인이나 삶에 대해서가 아니라 대상에 대해서만 연관되는 그 무엇”이라는 점을 낯설게 바라보며 질문합니다. “모든 사람의 삶이 예술 작품이 될 수는 없습니까?”

채운샘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살지 않는 것은 자신이 살아가는 방식, 살고 있는 조건에 대한 사유의 결여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유롭게 되는 것, 스스로를 예술작품으로 조형하는 것은 이러한 과정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철학의 목표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론이라는 연장통을 가지고 각자가 놓인 배치를 구부려내는 것. “변형”시키는 것. 그리고 이러한 구부려내는 과정은 이론을 현실에 ‘적용’하는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채운샘은 실천이란 개념을 경험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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