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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월요일: 푸코의 철학 (2) 마지막 강의 후기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7-07-14 14:35
조회
194
1. 비판과 신자유주의

“통치 기예에 맞서는 반대자로서 혹은 상대방이자 동시에 적대자로서, 통치 기예를 불신하고, 거부하고, 제한하며, 그것의 정당한 한도를 모색하고, 그것을 변형시키며, 그것으로부터 탈피하려는 방식, 통치기예와 동일한 발전선상에서 조용하게 그 당시 유럽에서 탄생했던 일종의 문화적인 형식, 도덕적인 동시에 정치적인 태도, 사고방식과 같은 그 무엇을 저는 아주 간단하게 통치되지 않으려는 기예라고 이름붙이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비판의 가장 일차적인 정의로서 이 일반적인 특징, 이렇게 통치되지 않으려는 기예를 제안하고자 합니다.”(미셸 푸코, <비판이란 무엇인가>)

스피노자, 니체, 들뢰즈, 푸코. 이들은 모두 인간의 예속과 자유를 동일한 지평 위에서 사유했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예속의 원인과 자유의 근거를 따로 설정하지 않았던 것이죠. 스피노자의 능동/수동, 니체의 자유정신/속박된 정신, 들뢰즈의 도주/재영토화는 각각의 상이한 토대를 갖지 않습니다. 푸코의 통치화/비판역시 마찬가지죠. 푸코의 정의에 따르면 비판은 통치 기예가 작동하는 모든 곳에서 동시적으로 작동하는 ‘이렇게 통치당하지 않으려는 기예’입니다. 권력은 멈춰있는 대상에 가해지는 힘이 아닙니다. 푸코에 따르면 권력은 “가능한 행위들에 대한 일련의 행위들”입니다. 채운샘은 이를 ‘움직이는 것들에 대한 움직이는 힘의 작용’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권력의 역할은 타인의 행위를 구조화하고 방향을 부여하고 제한하며 격자화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권력의 작용은 이미 불복종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자유와 예속의 동시적 발생을 이야기할 때 중요해지는 것은 모든 통치로부터 벗어나 있는 지고한 자유를 상상하거나 통치에 대한 반응적인 힘으로서의 저항을 조직하는 것이 아니라, 매번의 조건 속에서 자유를 구성해내는 일일 것입니다. 자유를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출구를 발명하기. 푸코가 말하는 비판 역시 이러한 능동적인 구성의 역량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비판은 자기 자신은 바깥에 둔 채로 무언가에 가하는 일방적 지적질에 가까운 어떤 것이죠. 그에 비해 푸코가 말하는 비판은 스스로의 장(場)을, 담론의 영역을 만들어내는 일에 가까운 개념인 것 같습니다. 채운샘은 푸코가 정의한 비판 개념이 “주체화 양식을 능동적으로 구성하는 데 있어서 필수적으로 경유해야 할 개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푸코는 79년 콜레주 드 프랑스의 강의에서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데, 이때의 ‘비판’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푸코는 신자유주의를 통치성의 관점에서 다룹니다.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접해온 신자유주의 분석은 그것의 불합리성에 대한 비판이 대부분이었고 그마저도 대부분은 신자유주의를 경제논리에 국한해서 이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통치성의 관점에서 이를 다룬다는 것은 신자유주의를 ‘특수한 합리성의 유형’으로 파악함을 뜻합니다(채운샘 강의안). 단순한 경제정책이 아니라 “인간, 시장, 국가에 관한 새로운 정의를 내포”하는 새로운 통치기예로서의 신자유주의. 이러한 관점을 통한 비판에 의해서만 우리는 신자유주의라는 조건에 대한 이해에 이를 수 있고, 자발적인 불복종의 영역을 구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

흔히 신자유주의를 떠올리면 정부의 개입을 최소화하고 시장의 경쟁에 모든 것을 맡기는 방식의 경제정책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러나 푸코의 분석에 따르면 신자유주의는 자유방임이 아니라 오히려 “용의주도, 능동성, 항구적 개입 등의 비호 아래” 있습니다. 신자유주의의 기조는 통치와 개입의 최소화가 아니라, 반대로 가장 능동적이고 용의주도한 통치라는 것입니다. 애덤 스미스 식의 자유주의에서 시장이 자연발생적 교환의 장으로 출현했다면 신자유주의에서의 시장은 경쟁의 장이며 국가의 개입을 요구하는 인위적 질서입니다. 신자유주의에서 국가의 역할은 오히려 커지며, 국가의 용의주도하고 디테일한 개입이 요구됩니다. 물론 이때의 개입은 한국의 산업화 시기에 군사정권이 행한 것과 같은(?) 경제 주체로서의 개입이 아니라, 경제주체로서의 개인(기업)들의 경제 게임에 규칙을 부여하는 방식의 개입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국가에 의해 보증된 “사법-제도적 틀” 내부에서 인간은 능동적 경제주체로서 새롭게 출현합니다. 말 그대로 인간에 대한 새로운 정의가 이루어지는 것이죠. 개인들은 모두 일종의 기업가가 되어 그들의 모든 활동은 경제적 수익성에 따라 평가됩니다. 한국에서 ‘스펙’이라는 단어가 등장한 것도, 교육부가 ‘교육인적자원부’라는 이름으로 개편된 것도 신자유주의의 흐름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노동자는 이제 수동적인 임노동자로 남아있을 수 없으며, 스스로의 소득(노동의 대가로서의 임금이 아니라 노동력-자본이 창출해낸 것으로서의)을 관리하고 노동력-자본으로서의 스스로에 투자해야 합니다. 신자유주의의 노동자들은 자신을 고용할 기업과 임금협상을 하고, 더 높은 수익성을 위한 이직을 고민하며, 자격증 취득 등으로 끊임없이 스스로를 개발합니다.

“신자유주의자들의 문제는 관여할 수 없는 것과 관여할 권리가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바로 어떻게 관여하는가 입니다. 이것은 행동방식의 문제이고, 말하자면 통치양식의 문제입니다.” 푸코가 분석한 신자유주의는 예속적 주체를 생산하는 새로운 합리성입니다. 이는 ‘관여할 수 없는 것과 관여할 권리가 있는 것’에 대한 규정이 변경되는 수준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행동을, 우리의 욕망을 특정한 방식으로 구조화하고, 나아가 그 욕망을 불가피한 것으로 책임”지우는 새로운 통치기예의 탄생을 의미합니다. 그런 점에서 푸코의 신자유주의 비판은 분석의 대상으로서의 신자유주의를 향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생산하고 있는 ‘오늘날 우리 자신’에 이릅니다.

“대부분의 개인들은 자신과 자녀들이 복종적인 자세로 기업 엘리트들이 확립해놓은 경력의 사닥다리를 오르는 일 외에는 어떤 사회개선에도 관심이 없도록 부추김을 받는다.”(콜린 크라우치)

2. 디오게네스-혁명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런 방식으로 통치당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이것을 보여주기 위해 푸코는 또다시 시간을 거슬러 고대 그리스로 되돌아갑니다. 푸코는 인터뷰에서 자신에게 그리스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했다고 하지만, 디오게네스 한 사람만큼은 그에게도 특별했던 것 같습니다. 푸코는 고대 그리스의 개-인간 디오게네스의 삶을, 말하자면 모든 구체적인 배치 속에 내재해 있는 도주의 가능성으로 제시합니다. 푸코에 따르면 디오게네스와 견유학파는 “다양한 형식 속에서 다양한 목표를 갖고 서양사 전체를 횡단하는 역사적 카테고리”입니다.

푸코에게 디오게네스는 “파르헤지아와 삶의 양식을 연결하는 하나의 사례(채운샘 강의안)”였다고 합니다. 푸코가 주목했던 고대 그리스의 파르헤지아는 “말해야 할 바를 말하게 하고 말하고 싶은 바를 말하게 하며, 말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바를 말하게 하는 자유로움”을 의미했습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이는 우선 피지도자가 아니라 지도자와 관련된 윤리였죠. 그런데 이러한 파르헤지아는 기독교 유럽에서 커다란 변형을 겪습니다. 고백이라는 제도 앞에서 ‘솔직하게 말하기’는 권력의 명령에 복종하여 주체의 진실을 생산하는 과정으로 변형됩니다. ‘삶’은 고백과 파르헤지아를 가르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는 것 같습니다. 디오게네스의 삶은 그 자체로 파르헤지아였습니다. 거리에서 잠을 자고 모든 행위를 대중 앞에서 공공연하게 했던 디오게네스에게 ‘진리가 뭐냐’ 혹은 ‘당신의 욕망은 무엇이냐’라고 묻는 것은 우문입니다. 그는 이미 삶으로 진리를 말하고 있고, 자신의 진리를 살고 있기 때문이죠. 진정한 파르헤지아는 진실을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살아가는 게 아닐까요. 푸코는 말합니다. “견유학파는 ‘삶의 양태’와 ‘진실을 말하는 것’이 직접적으로, 무매개적으로 연결된 철학 형식이라고 생각합니다.” 푸코는 디오게네스의 삶의 양식으로서의 파르헤지아로부터, 이러한 ‘절대적 가시성’으로부터 무엇을 발견한 것일까요? 푸코는 견유학파를 “진리의 살아 있는 스캔들로서의 생존형식”으로 파악합니다.

“더 우리와 가까운 지점을 보면, 견유학파적인 존재 형태의 또 다른 기반을 흥미롭게 분석할 수 있습니다. 진리의 스캔들 속에 있는 삶의 형식으로서의 견유학파를 말이지요. 그것은 더는 종교적인 제도나 실천 속에 있지 않고 정치적인 실천 속에서 찾아낼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여러 혁명운동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 견유학파란 진리를 난폭하게, 폭력적으로, 파렴치하게 표명하는 삶의 양태에 관한 사상이고, 이는 혁명적 실천의 일부를 지금도 구성하고 있고, 예전에도 구성해 왔습니다. 19세기 동안 줄곧 혁명운동이 채용해온 제 형식의 일부도 그렇습니다 근대 유럽 세계의 혁명이란 (…) 정치적인 프로젝트가 아닌 삶의 형식이기도 했던 것입니다.”(미셸 푸코, <진실의 용기>, 채운샘 강의안 재인용)

개처럼 사는 것은 결코 막사는 것이 아닙니다. 개처럼 살기 위해서는 우선 사회적 규약들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삶의 조건에 대한 비판적 분석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비판적 분석을 통해 관습에 대해 무관심해지고 가족이나 국가에 자신을 가두지 않는 존재로 되는 것. 완벽한 자기통치의 과정을 통해 동물성을 획득하는 것. 그리고 자신의 동물적 삶을 통해 진리를 폭력적으로 표명하는 것. 이것이 견유학파의 삶이며, 이것이 푸코가 바라본 삶의 형식으로서의 혁명입니다.

푸코에 따르면 견유학파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다른 세계가 아니라 다른 삶입니다. 다른 세계에 대한 상상은 유토피아적 망상으로 귀결되거나 제도 차원에서의 타협으로 쉽게 끝나버립니다. 전적으로 무의미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지라도 혁명적이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디서 혁명을 찾을 수 있을까요? 문제는 비판, 폭력, 실험을 통해 다른 삶을 발명하는 것이 아닐까요? 신자유주의 안에서 신자유주의적이지 않은 삶을 구성해 내는 것. 다른 삶을 구성해 낼 수 있을 때에만 우리는 진리를 말할 수 있습니다.

3. 푸코

한나 아렌트에 따르면 “무사유는 특정 시기, 특정 사회에 통용되는 규정된 행위규칙을 지속시키는 데” 기여합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사유함이란 무엇일까요? 〈쾌락의 활용〉 서문에서 푸코는 ‘진실의 작용 속에서 자기 자신을 변형시키려는 시도’야말로 철학의 본체라고 이야기합니다.

“오늘날 철학은 -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철학적 활동인데 - 무엇인가? 그것은 사고에 대한 사고의 비판작업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대신에 어떻게, 그리고 어느 만큼까지 다르게 생각하는 것이 가능할지를 알려고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철학적 담론이 밖으로부터 타인들을 지배하고 그들에게 그들의 진리가 어디에 있으며 그것을 어떻게 찾는가를 말해주고자 할 때, 혹은 순수하게 실증적으로 그들의 옳고 그름을 가릴 수 있다고 자부 할 때, 그 철학적 담론은 얼마간은 터무니없는 것이다. 그보다 바로 그 철학적 사고 속에서 철학과는 무관한 지식의 훈련에 의해 변화될 수 있을 것을 탐구하는 것이 철학의 권리인 것이다. '시도'(Essai) - 이것은 의사소통의 목적에 맞게 타인을 단순화시키는 것으로가 아니라 진실의 작용 속에서 자기 자신을 변형시키려는 시험으로 이해되어야만 하는데 - 는 철학의 살아있는 본체이다. 적어도 철학이라는것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예전과 같은 것이라면, 다시 말해 그것이 사고에서의 '고행', 자기 훈련이라면 말이다.”(미셸 푸코, 〈쾌락의 활용〉 서문)

1984년 6월 25일 푸코는 세상을 떠납니다. 그리고 들뢰즈는 푸코의 장례식에서 조문을 대신하여 바로 이 서문을 읽어내려 갔습니다. 아마 들뢰즈는 이 서문이 푸코의 삶에 대해 많은 것을 이야기해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쾌락의 활용〉의 서문을 조문으로 읽었겠지요. 강의를 통해 보아온 것처럼 푸코는 성실한 연구자이며, 전투적 정치투사인 동시에 쾌락주의자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상식적으로는 결코 나란히 놓일 것 같지 않은 이 모든 것들이 푸코에게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었죠. 어쩌면 푸코에게는 이 모든 것이 바로 철학, 다시 말해 ‘진실의 작용 속에서 자기 자신을 변형시키려는 시도’와 관련되어 있던 것은 아닐까요? 푸코에게 철학은 무엇보다 자신의 삶을 조형하는 일과 관련된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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